여행길에서 여러 인연을 만나는 일은 몸과 마음을 둘 다 맑게 정화하는 수행과 같은 것이기에 즐겁고 뜻깊은 일이다. 그런 이유로 틈만 나면 짐을 꾸리게 되는 지도 모르겠다.

얼마 전 뇌성마비인들의 재활을 애쓰시던 어른 또한 분이 돌아가셔서 이제는 가깝게 모시던 주위의 어르신들이 곁을 떠나시는 일이 잦은 나이가 되었음에 우울하던 차에, 마침 삼천배 법회가 있어서 봉화의 쳥량사로 향했었다.

자주 가는 곳이라 이제는 반갑게 인사하는 도반(벗)들도 여러 명이 있고, 조계종사회복지재단 상임이사 소임을 맡고 계신 지현 주지스님, 그리고 대금을 하시는 운산 스님과 공부와 정진에 매진하시는 보성 스님이 늘 맞아주시니 잠시나마 마음공부를 하고 돌아올 수 있어 자주 찾게 되는 곳이다.

대금을 하시는 운산 스님의 거처는 청량사 응진전 옆에 너와집 같은 작은 초막이다. 이 초막에는 누구나 쉬어가기에 충분한 곳이다. 사람만이 아니라 뻐꾸기, 청솔모 등 산짐승들도 온산을 돌아다니느라 가빠진 숨을 고르면서 휴식을 취하고 감직하다.

운산 스님이 산비탈을 직접 일궈 가꾸는 초막 주위의 텃밭에는 호박, 상추, 열무, 고수(스님들이 즐겨드시는 식물, 꽃은 메밀꽃과 비슷하고 지금한창 피었다)이 등 각종 무공해 야채들이 스님의 상좌승처럼 자라고 있다.

늘 밀짚모자를 쓰고 검게 그을린 얼굴로 야채를 돌보고 계시는 스님의 모습은 숲의 일부가 되어 빈 마음으로 사는 수행자의 모습이다.

여명이 밝아오는 새벽예불시간과 노을 붉게 깔리는 저녁예불시간이면 산중으로 퍼져나가는 법고와 범종을 치시는 가사를 입은 운산 스님의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하지만 두 모습 모두 일상사에 찌들어 사는 우리에게 마음 밑바닥에서 피어오르는 깨끗한 삶의 진리를 그대로 깨우쳐 주고 있다.

법회와 산행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올 채비를 끝낸 후, 도반 두 명과 함께 인사를 드리기 위하여 응진전으로 다시 올랐다.

운산 스님은 다른 날처럼 자갈밭을 고르고 계셨다.

응진전에서 열 여섯 나한의 웃음소리가 새어나올 것만 같고 처마 끝에서 풍경이 바람결을 따라 뎅그렁, 뎅그렁 하면서 울렸다. 초막의 울타리를 타고 자라는 호박과 박, 더덕넝쿨이 고개를 들고 이어서 쏙독새 울음소리가 쏙독 쏙독 들렸다.

“스님,, 스님 손님 왔어요" 하고 부르는 소리처럼 들려왔다.

들깨와 고들빼기를 심을 거라고 하시는 스님을 도와 자갈밭에 돌 고르는 일을 하고서 텃밭에서 금방 따온 배추와 상추쌈으로 먹는 점심공양은 꿀맛이었다.

스님께서 간간이 하시는 말씀은 가슴을 채워주었다.

“병이 마음에서 시작되는 듯 자신을 이기는 것도 마음에서부터 시작해야 하는 것이지요. 부친 힘으로라도 넘어야 하는 일들이 있고, 넘는 이도 있는 힘을 다해서 넘어야 하니까요.”

재작년 처음 청량사를 향해 초행길을 나셨을 때 나 자신이 고생을 자초하며 뭘 하고 있나 싶어 망설였던 기억, 절을 한배 한배 해도 마음 밑바닥에서 별별 생각이 다 떠올랐던 기억, 그때 나를 위로해준 것은 시시때때로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던 숲과 스님의 말씀, 도반이었던 것 같다.

이처럼 가끔은 짐을 꾸리면서 힘들다는 생각을 한 여행길인 적도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축복이기도 하였다.

“자연에서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토끼, 청설모 산새들도 제 목숨을 지키기 위해 시달리기도 하고, 두려워하고, 힘들어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깊이 들여다보면 자신의 소중함도 알게 되고, 그것을 알면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같은 생명의 눈에서 보면 만물을 섬기는 마음이 생기고, 만물을 평등하게 바라보는 관점에서 보면 인종, 계급, 남녀 , 장애와 비장애를 어떤 기준에서 구별하지 않는 나와 사회가 될 것입니다"

라고 하시는 늘 듣는 평범한 스님말씀이 특별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오늘도 스님의 초막을 누군가 기웃거릴 것이다. "뉘 신데 저를 알아요" 하면서 안으로 들어오라고 하여 차 한잔 내려주실 스님의 모습이 눈앞에 선하다.

호미를 들고 텃밭으로 나서는 스님을 따라 산새도, 산짐승도 모두 따라 나설 듯 하다.

텃밭의 배춧잎 이파리에 붙은 무당벌레 한 마리가 부처님 제자가 되겠다고 운산 스님 앞에 합장을 할 듯도 하다.

최명숙씨는 한국방송통신대를 졸업하고 1991년부터 한국뇌성마비복지회 홍보담당으로 근무하고 있다. 또한 시인으로 한국장애인문인협회회원으로 활동하고 있기도 하다. 1995년에 곰두리문학상 소설 부문 입상, 2000년 솟대문학 본상을 수상했으며 2002년 장애인의 날에 대통령 표창을 받기도 했다. 주요 저서로는 시집 '버리지 않아도 소유한 것은 절로 떠난다' 등 4권이 있다. 일상 가운데 만나는 뇌성마비친구들, 언론사 기자들, 우연히 스치는 사람 등 무수한 사람들, 이들과 엮어 가는 삶은 지나가면 기쁜 것이든 슬픈 것이든 모두가 아름다운 추억이 되어 남으니 만나는 사람마다 아름다운 사람으로 기억되길 바라고, 스스로도 아름답게 기억되는 사람이 되길 바라는 마음속에 기쁜 희망의 햇살을 담고 사는 게 그녀의 꿈이다. ■한국뇌성마비복지회 홈페이지 http://www.kscp.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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