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내가 중학교 1학년 때 크게 사업에 실패한 뒤로 다시는 재기하지 못했다. 아니 자신의 실패를 인정하지 못하고 성급하게 다시 일어서려고 시도하는 바람에 더욱더 깊은 수렁에 빠지곤 했다. 자신의 실패요인을 찬찬히 분석해보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기에 다섯 아이들의 아버지라는 짐이 너무 무거웠던 탓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버지를 힘들게 했던 건 그때까지 아버지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순식간에 사라지거나 적대적으로 변한 것이었다. 술은 입에도 대지 못하던 아버지는 무엇으로 그 쓰라린 배신감과 분노, 외로움을 이겨내셨을까? 장기, 화투 등 잡기에 능했던 아버지가 도박에 손을 댄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무엇엔가에 매달리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으리라. 그때 며칠씩 까만 밤을 하얗게 지새고 쾽한 눈으로 집에 돌아온 아버지는 빈껍데기 같았다.

세상의 대부분의 엄마들이 그렇듯이 엄마는 강했다. 어떻게든 살아야 했기 때문이다. 오십이 다 되도록 가정만을 지키며 살아온 엄마이지만 그녀는 하루가 다르게 억척스럽게 변했다. 다섯 아이들의 학업을 중단시킬 수 없다는 것을 철칙으로 여겼기에 푼돈이라도 벌기 위해서는 무슨 일이든지 해야 했던 것이다. 그런 엄마가 빈껍데기처럼 되어버린 아버지를 이해하기는 힘든 일이었다. 누구 하나 도와주는 사람 없이 초등학생이 둘, 중학생 하나, 고등학생이 둘인 집안의 생활비의 학비는 고스란히 엄마의 몫이었다. 처음엔 아무에게도 원한지기는커녕 오히려 베풀면서 살아온 결과가 고작 이렇게 돌아온 것에 대해 엄마도 무척이나 배신감에 치를 떨었지만 그럴수록 살아야 한다는 의지가 더 강해진 것이 아버지와 다른 점이었다. 그러나 삶이 고달퍼질수록 이를 악물고 닥치는 대로 정신 차리고 막노동이라도 하지 않고 자꾸만 현실에서 도피해버리려고 하는 아버지에 원망은 점점 더 심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때 나는 본의 아니게 늘 엄마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있던 딸이었기에 아버지에 대한 엄마의 원망을 고스란히 들어야만 했다.

“네 아버지는 어쩜 그렇게 무책임하니?”

“아이를 다섯이나 낳았으면 아버지로서 도리를 해야 하는 것 아니니? 그런데 네 아버지는 나 몰라라 하니 나는 누굴 믿고 사니?”

엄마의 자연스런 푸념과 원망은 고스란히 내게 전염이 되었다. 내가 생각하기에도 아버지의 모습은 건강해보이지 않았다. 그런 이유로 나는 아버지를 무책임한 가장, 무능력한 아버지, 불성실한 남편으로 규정해가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무책임한 가장, 불성실한 남편이었을지언정 우리 형제에게는 참 좋은 아버지였다. 어린 시절 아버지는 세상 어느 누구보다도 자상한 아버지였다. 퇴근 때면 아무리 늦은 시간이어도 아이들 먹을 군것질거리를 잊지 않고 사들고 오셨기에 우리 형제들은 졸린 눈을 비비며 아버지의 귀가를 목이 빠지게 기다렸다가 찐빵이며 귤, 초콜렛 등 군것질을 하고서야 늦게 잠들곤 했었다. 아버지는 다섯 아이들에게 한번도 매를 들거나 욕을 한 적이 없었다. 우리가 잘못을 해도 “그러면 돼니?” 한마디뿐 늘 허물을 덮어주셨으며, 하나밖에 없는 아들과 네 딸을 조금도 다르게 대하지 않았다. 네 딸 중에서도 장애가 있는 셋째딸인 나를 특히 예뻐하시어 언제나 무릎 위에 앉혀 놓고 볼을 부벼주시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아버지의 무릎에 앉아 나는 언제나 그의 눈가에 맺히는 눈물을 보곤 했었다. 나는 늘 그 눈물을 못본 척하면서 아버지의 젖꼭지도 잡아당겨보고 귀도 잡아당기면서 재롱을 떨었었다. 아버지는 “어, 요놈 봐라!” 하면서 마냥 흐뭇해하셨다.

그런데 아버지의 사업 실패 후 엄마가 지고 있던 현실의 무게에 함께 짓눌리느라 나는 그만 아버지의 눈물과 아버지의 냄새, 아버지의 따뜻한 가슴을 잊어버리고 만 것이다. 그리고 한 남자로서의 아버지의 좌절과 비애를 이해하기에는 내 나이가 너무 어렸었다. 그렇게도 허무하게 무너졌으면서도 자식들에게 난폭한 언행을 하거나 폭력을 행사한 적이 한번도 없이 언제나 웃는 얼굴로 대해주시던 아버지의 참모습을 제대로 보지 못하다니... 그때 우리 가족 모두에게 가장인 아버지에 대한 기대가 너무도 절박한 것이긴 했다. 하지만 한 가정의 가장이라고 해서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의무가 전부일 수는 없으며, 그 역시 상처받고 아파서 울부짖는 한 인간임을 미처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그는 아마도 지배자들이 만들어낸 세상 모든 아버지는 강해야 한다는 거짓신화의 희생자였던 듯하다. 요즘 들어 부쩍 장애가 있는 딸을 평생 데리고 사시겠다던 아버지가 몹시 그립다.

김효진씨는 현재 한국장애인연맹 기획실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녀는 지체 3급의 장애여성이다. 그녀는 자신을 '자기결정권'이라는 한마디 때문에 깨달음을 얻은 바 있어 DPI에 입문한 대책없는 센티멘탈리스트라고 소개했다. 또 그녀는 섹시하지 않다느니 의존적이라느니 무능력하다느니 하는 허위의식을 유포해 장애여성을 화형(?)시켜버리는 폭력적인 세상에 도전하는 백발마녀(일명 흰머리소녀)라고 덧붙였다. 그녀의 특기는 독설이며, 특히 편두통이 심할 때는 굉장한 마녀로도 변신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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