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당신의 자리는 늘 고운 바람이 불고 갑니다.

엎드려 잠자는 소의 등과 같은 능선, 둘러싸인 사과밭과 그 길을 따라 피어난 한 무리 들국화, 바람 부는 대로 너울거리는 갈대, 저는 당신이 좋아하던 갈꽃을 한아름 꺾으면서 당신에게로 향합니다. 당신은 갈꽃은 화려하지 않아도 그 수수함과 강한 생명력을 귀하게 여기셨지요.

어머니, 당신은 누구든지 존중하고 겸손한 마음이 있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계절이 가을이라 하셨지요. 바람 싸하니 부는 날 길이 아직도 느껴지는 스웨터를 꺼내 걸쳐봅니다.

당신은 딸에 대한 사랑이 각별하고 깊으신 분이셨습니다. 아침마다 머리를 빗기시며 시를 들려주시듯이 이야기하셨지요.

" 남의 말을 소중히 알고, 서로의 믿음을 깨뜨리지 말며, 네 앞에 있는 것은 어느 것 하나 소홀히 여기거나 가벼이 하지 마라, 들녘에 핀 꽃 한 송이에도 살아있음을 축복으로 여기는 마음과 욕심 없는 마음과 여유 있는 마음으로 먼저 늘 베풀면 괴롭지 않고 외롭지 않을 수 있단다."

그리고 어머니는 제게 책을 가까이 하는 것과 추억을 만드는 것을 망설이지 않게 하셨습니다. 책은 늘 좋은 벗이 되었으며 낯선 환경과 새로운 만남은 제게 두려움을 극복하고 설레임을 주었고 늘 바깥 세상을 향해 서도록 하였습니다. 어른이 되어가면서 어려운 일에 부딪칠 때마다, 가슴 저미도록 아프게 절망하고 돌아서고 싶을 때마다 잔잔히 떠오르는 당신입니다.

늘 당당하라고 당부하시던 어머니, 오늘은 당신이 그립습니다.

오늘같이 당신이 그리운 날에는 국화차를 우려 향기를 온 방안 가득 차게 합니다.

지금 이 순간 불현듯 당신과 따뜻한 국화차 차 한 잔이 마시고 싶어집니다,

소박한 찻잔에 향기로운 국화차향 담아 내오시던 당신의 모습은 또렷이 기억나지만, 어머니 당신이 앉아 계셨던 자리에는 빈자리만 덩그러니 놓여 있습니다. 바람 불어 지는 낙엽이 창문가를 기웃거릴 때 손끝 머문 茶향기와 더불어 가을 이야기 나누고 싶어져, 마시던 찻잔을 내려놓습니다.

어머니 만일 당신께서 이 세상으로 단 하루만이라도 외출을 나오실 수 있다면 저는 당신을 위한 하루 여행을 떠나고 싶습니다.

어머니의 야윈 손을 꼭 잡고, 흰머리 듬성듬성 난 머리와 주름진 눈매를 어루만지며 "엄마도 이제 많이 늙었네," 라고 하면서 마음껏 수다를 떨어보고 싶습니다.

어떤 경우라도 저의 편이 되어주시던 어머니, 우리 오남매 서로 소중히 여기며 우애 깊게 키우시며 맏이로서 제역할의 자리를 만들어주신 어머니, 그 이름을 아직도 부르고 싶은 마음 간절합니다.

당신이 떠나실 때 열두 살이던 막내가 이제 스물 여섯 청년이 되었습니다

요즈음은 막내와 함께 길을 가다보면 십육년 나이 차이를 속일 수 없는지 "아들을 참 일찍 두셨나봐요" 하는 이야기를 들을 때가 있습니다. 막내는 "네 엄마 같은 우리 큰누나입니다" 라고 얼른 대답을 한답니다. 거리에서 주저 없이 큰누나의 팔짱을 끼는 막내가 참 대견스러워지다가 다시금 어머니 당신 생각이 납니다.

살아 계시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이룰 수 없는 소망하나 가슴에 품어봅니다.

최명숙씨는 한국방송통신대를 졸업하고 1991년부터 한국뇌성마비복지회 홍보담당으로 근무하고 있다. 또한 시인으로 한국장애인문인협회회원으로 활동하고 있기도 하다. 1995년에 곰두리문학상 소설 부문 입상, 2000년 솟대문학 본상을 수상했으며 2002년 장애인의 날에 대통령 표창을 받기도 했다. 주요 저서로는 시집 '버리지 않아도 소유한 것은 절로 떠난다' 등 4권이 있다. 일상 가운데 만나는 뇌성마비친구들, 언론사 기자들, 우연히 스치는 사람 등 무수한 사람들, 이들과 엮어 가는 삶은 지나가면 기쁜 것이든 슬픈 것이든 모두가 아름다운 추억이 되어 남으니 만나는 사람마다 아름다운 사람으로 기억되길 바라고, 스스로도 아름답게 기억되는 사람이 되길 바라는 마음속에 기쁜 희망의 햇살을 담고 사는 게 그녀의 꿈이다. ■한국뇌성마비복지회 홈페이지 http://www.kscp.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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