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다음 미디어'에서는 '가수 박진영 청와대 의상테러'라는 제목이 크게 실려 있었다.

지난 10일 대통령과 정보통신부·문화관광부 등 7개 장관과 정·재계, 학계 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차세대 성장동력보고회'에서 그는 유일하게 정장 대신 눈에 띄는 컬러풀한 의상으로 참석을 했다는 것이다. 과연 마이크를 들고 5분 발언을 하고 있는 그의 사진을 보니까, 하얀색 가죽바지에 속이 비치는 파란색 망사셔츠를 입고 있긴 했지만 내 눈에는 그다지 컬러풀한 것 같지도 않고, 그의 표정도 진지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런데 그 기사를 본 네티즌들의 반응은 상당히 엄격한 것이었다.

"그렇게 튀고 싶냐?? 오바다!!"

심지어는, "무뇌 박(無惱 朴)"이라 하기도 하고

어떤 네티즌은,

"저딴 놈을 뭐하러 초청했으며 뭐하러 들여보냈냐? 하물며 강남에 나이트 한번 들어가려고 해도 앞에서 복장검사한다. 저런 허접들이 망사옷 입고 들어오는데 아무런 제재도 가하지 못했던 청와대는 제발 자존심을 지켜라"

고 심한 말을 하기도 했다.

가끔은, "제발 그놈의 고리타분한 생각들 좀 바꿔요~!!" 라는 의견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생각들은, 함께 살아가야 하는 사회에서는 예의라는 것이 있지 않느냐? 표현의 자유 못지 않게 형식이라는 것도 중요하다.

뭐 이런 식의 내용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것 같았다.

이걸 보면서 나는 몇 년 전에 신문에 났던 백남준의 사진 한 컷이 떠올랐다.

클린턴 대통령의 초청을 받아서 백악관 만찬회에 참석했던 백남준씨가 자리에서 일어서는데 어떻게 된 영문인지, 바지가 훌떡 벗겨져 내리면서 그만 아랫도리가 다 드러난 모습이 기자의 사진에 찍히고 만 것이다.

그는 바지 속에 아무 것도 입고 있지 않았으므로 당연히 남정네의 물건이 그만 다 드러나고 말았다.

그 순간 힐러리는 손으로 자신의 눈을 가렸고 (가린 손가락 사이로 두 눈이 반짝거리고 있었음) 클린턴은 좀 황당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우리 신문 같았으면 난리가 났겠지만 미국의 신문은 어떤 멘트도 없이 그 사진만 실었다.

그런데도 한 개인의 존엄성을 가십화 시킨 악질적인 기사였다고 비난을 받았다는 후문이 있었던 것 같은데, 이것까지는 내 기억력이 정확한 것인지는 믿을 수가 없다.

그때 우리 부부는 이 사진을 보고,백남준씨의 이 훌떡쇼가 우연하게 일어난 사건이었을까, 아님 다분히 의도적인 이벤트였을까, 라고 한참 설왕설래를 한 적이 있었다.

나이 예순이 넘어서 중풍에 걸리고 말았으니, 아무리 세계적인 천재라고 해도 자기 한 몸 못 가누는 처지가 되고 만 것에 대한 연민과, 그런 가운데에서도 결코 자기 표현을 멈추지 않는 작가 정신. 이 둘 다가 팽팽하게 느껴져서 우리는 어느 한쪽이라고 우길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나이가 들수록, 백남준씨의 이 사건이 의도적으로 창조된 해프닝이라고 여겨진다. 어린 아이처럼 당황하고 있는 그의 표정 뒤에서, 의미심장하고도 능글맞게 웃고 있는 그의 또 다른 모습이 너무나 확연하게 보이는 것이다.

우리남편의 표현에 의하면,

"씨벌, 지가 대통령이면 대통령이지, 왜 지존이신 이 몸을 이런 시덥잖은 정치적 자리에 오라 가라 하는 거야."

이런 뜻이라는 것이다.

킬킬거리며 듣던 나한테도 그 말은 상당히 신빙성 있게 들렸다.

대통령이 부른다고 해서 부실한 몸으로 넙죽 달려가기에는 예술가로서의 그의 자존심이 허락지를 않았던지도 모른다.

에라이, 엿먹어라!!!

그는 그 자리에 기꺼이 참석을 하면서도 한편으론 하고 싶었던 그의 목소리까지도 완벽하게 재현시켜버린 것이다.

길길길, 킬킬킬

우리는 백남준씨의 잘 만들어진 예술 한 편을 감상한 것처럼, 괜히 즐거워져서 오랫동안 그렇게 모종의 웃음을 주고 받았다.

지금 이 자리에서 나는 박진영의 청와대 행을, 백남준의 백악관 행과 같은 것이었을 것이라고 말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작가정신에 있어서만은 서로 일맥상통하는 바가 있지 않을까 라는 추측 때문이다.

표현의 자유도 중요하지만,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예의라는 것도 중요하다, 라는 일반적인 견해는 너무나 두루뭉실해서, 새로운 그 무엇을 만들어내고자 온통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작가한테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나도 소설가랍시고 사람들이 잘 물어오는 질문 몇 가지가 있는데,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소설가나 시인들이라는 작자는 왜 그렇게 불륜을 밥 먹듯이 잘 저지르냐고 묻는 것이다.

물론 작가라고 해서 다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작품 속에서 항상 그런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오고, 이것이 작가라는 한 개인성과 뒤섞여서 과장되거나 오해된 부분이 많은 듯 하다. 또한 실제로 작가들 중에서는 사랑을 밥먹듯이 구하러 다니는 사람도 적잖게 있을 것이다.

나는 그것도 그들의 예술적인 몸부림이라고 본다.

자신을 늘 삶의 예각에 세워놓음으로 해서, 삶의 그 위태로움과 아름다움을 다 흡수하고저 하고 결국은 그것을 표현해내고자 하는 그것이야말로 바로 작가의 원초적인 바램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표현의 자유도 지키고, 일반적인 예의나 관념도 충실히 따르면서 그렇게 살으라고 하면, 말은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것이지만, 결국 감각은 맨질맨질해져버리고 사고는 편한 쪽으로 몰려들어서 새로운 창작이란 어느새 물 건너 가버리고 말 것이다.

박진영이라고 해서 정장이 없겠는가.

그러나 그는 행동으로 튀어주어야만, 그의 의식도 같이 튀어 오르고 그가 만든 노래도 튀어서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

온 세포를 다 흔들어서 전력투구하는 있는 그의 춤을 보라.

그 춤은 그냥 두루뭉실 좋게, 좋게만 살아가고 있어서 저절로 만들어지는 부로조아 식의 춤이 결코 아니다. 그는 자기 자신을 새로움과 낯설음의 예각 위에 날카롭게 띄워놓고, 그 스릴과 모험을 기꺼이 감수해내고 있는 것이다.

일반적인 사회의 흐름에서 튀는 이런 사람들이란 결국 역동적이고도 다양한 가치관이 혼재하는 새로운 사회로 향하는 도전이 된다.

그런 면에서 장애인의 존재 역시 마찬가지로 이 사회에 언제나 새로운 물음을 던지는 영원한 도전자의 자리에 있다.

기존의 것은 편안하지만 고여 있기 쉽고, 새로운 것은 낯설지만 고인 물을 흐르게 하여 사회의 새로운 역동성을 만들어낸다.

우리는 이 사회에서 과연 어떤 물음을 던지고 있는 것일까!?

경남 밀양에서 태어났다. 일찌감치 바느질을 배워 혼자서 살 궁리를 하라는 부모님의 말을 거역하고 울며 불면서 억지로 대학에서 국어국문학을 전공했다. 가장 되고 싶었던 것은 국어 선생님이었고 다음에 되고 싶은 것은 작가가 되는 것이었다. 교사임용 순위고사에서는 신체상의 결격으로 불합격되어 그나마 일년 남짓 거제도의 한 고등학교에서 임시교사를 한 적이 있고, 다음에 정립회관에서 상담교사로 근무를 하다가 2급 지체장애인인 남편을 만나 결혼을 했다. 그리고 87년에는 친구처럼 듬직한 아들을 낳았고 94년에 동서문학 소설부문 신인상으로 등단을 했다. 김미선씨의 글은 한국DPI 홈페이지(www.dpikorea.org)에서도 연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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