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부터 가장 많이 듣던 말 세 가지.

"넌 안 돼."

"너 같은 아이는 한쪽에 가만히 있어."

"누가 너 같은 아이를 인정해주겠니?"

그때마다 나는,

"난 할 수 있어."(퉁명스럽게)

"난 잘 할 수 있는데…."(손가락을 빼물고 울먹이면서)

"난 잘 할 수 있단 말이야."(오기로 독이 오른 상태로)

이런 일을 늘 반복하다 보니까 잘 할 수 없는 일에도 "나는 잘 할 수 있어"라고 큰소리치다가 낭패 당하는 일이 여러 번 있다.

20대 때, 중등교사 임용시험에 합격하고 나서 마지막으로 서류를 제출하는데, 지정병원에서 신체검사를 하고는 그 결과를 내는 일도 포함되어 있었다. 거기에서 나는 불구 폐질자로 분류되어 탈락되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부산교위 중등교사 순위고사에서 장애라는 이유로 면접에서 탈락된 수험생이 생겨났다. 그래서 정립회관 황연대 관장님이 그 상황을 타개해보기 위해 부산으로 내려오셨는데, 나까지 포함해서 교위측에다 재고를 요청했다.

이미 신문에서 기사화되기도 해서 교위측은 가볍게 넘길 수 없는 사안이라 우리 두 사람을 다시 만나주었는데, 그 자리에서도 우리가 한 말이라곤,

"우리도 할 수 있어요."

"아니, 더 잘 할 수 있어요."

라고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것이었다.

그 때 교위측의 담당자가 우리를 그 건물의 계단으로 데리고 갔다. 그리고 거기를 올라가 보라고 지시했다.

장애를 가진 우리가 거기를 잘 오르내릴 수 있는가를 확인해보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부산의 수험생 아가씨와 나는 그들이 엄격한 눈으로 지켜보고 있는 그 앞에서 다리를 절룩거리며 열심히 그 계단을 올라갔다.

아무리 잘 올라가봤자, 그들의 눈으로 보면 한심하기 이를 데 없는 그 짓을 우리는 참으로 진지하게, 그리고 열심히 보여주려고 애를 썼다.

참으로 순진한 시절이었다. 그리고 그 시절의 그 사람들은 우리의 순진함을 그렇게 함부로 사용해도 되는 것으로 알고 있던 시절이었다.

그리고 많은 세월이 흐르고, 나는 나처럼 장애를 가진 남자와 결혼이라는 걸 하게 되었다. 그때만 해도 장애인끼리의 결혼이란 자기 함정을 스스로 파는 자기도피처럼 인식되어서 주변의 반대가 심각했다.

우리 엄마는 상대방을 만나보려고도 하지 않았고 직장에서도 은근히 압력이 심했다. 그런 와중에 우리 시어머니 될 분만 씩씩하게 우리의 결혼을 찬성하고 나섰다.

나는 그런 시어머니한테 미안했다. 아들한테 겪은 마음고생도 심할 터인데 며느리까지 장애인이어야 하다니 어머니가 견뎌내고 있는 마음의 짐이 얼마나 클 것일지, 나는 죄송스러운 마음이 많았다.

그래서 신랑 될 사람한테 그랬다.

"어머니께 너무 신경 쓰시지 말라고 그래요. 다 잘 할 수 있다고 말씀드려. 나는 다 잘 해 낼 수 있어. 살림도 잘 살고 아이도 잘 키울 수 있어."

그러나 기저귀를 빠는 일에서부터 나는 당장 난관에 부딪쳤다. 기저귀를 일단 손으로 빤 다음에는 불 위에 옮겨서 푹푹 삶았다가 다시 세탁기로 돌려야 하는 그 과정이 너무나 힘들었다. 앉아서 빠는 건 빤다고 해도, 불 위에 있는 빨래를 가져와서 세탁기에 다시 넣고 빼는 그 과정이 나로서는 불가항력이었다. 나는 삶은 솥단지를 들고 올 수가 없으니까 그걸 손잡이가 있는 양동이에 옮겨서 세탁기에 갖다 날라야했다.

지금은 모두 자동세탁기이지만 그때만 해도 수동 세탁기가 많아서 빨래와 탈수과정에 일일이 손으로 옮겨주어야 했는데, 우리 시어머님은 유난히 더 깔끔하셔서 헹구는 건, 꼭 수돗물을 틀어놓고 손으로 해야만 했다.

그러니 한 과정이 끝나면 빨래를 내렸다가 헹구어서 또 세탁기 통에 담아야 했으니, 앉았다가 섰다가 반복하는 그것만으로도 나는 지쳐버렸다. 그러나 잘 할 수 있다고 큰 소리를 펑펑 쳤으니 어쩌랴?

그리고 기저귀 널기.

빨랫줄이 마당 한 복판에 있어서 기댈 곳이 없는 나는 늘 아슬아슬하게 한 손으로 목발을 짚고 한 손으로 빨래를 널어야 했다. 두 손으로 빨래를 쫙- 쫙- 펼쳐서 널어야 반반하게 마르는데, 한 손으로 하자니 언제나 빨래가 주글주글해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우리 시어머니 왈, "얘, 빨래를 이렇게 하면 어떡하니!"

울 어머니는 손끝이 맵차기로 소문나신 분이라 그런 걸 참아내기 참으로 힘드신 경지였다.

"어머니, 전 그렇게 못해요" 그러면 될 것을,

그렇게 한 마디만 하면 눈치 빠른 울 시어머니가 재꺽 알아들으실 것을,

나는 내 입으로 못한다는 말을 이 세상에 내면 죽을 것 같아서, 내 인생은 그것으로 매장될 것 같아서 그 말을 못하고 속으로 눈물만 투덕 투덕…

이제서야 뒤늦게 나는 이 세상을 향해 외친다.

"난 못해!"

"난 힘들어!!!"

"난 힘들단 말이야∼잉∼∼."

경남 밀양에서 태어났다. 일찌감치 바느질을 배워 혼자서 살 궁리를 하라는 부모님의 말을 거역하고 울며 불면서 억지로 대학에서 국어국문학을 전공했다. 가장 되고 싶었던 것은 국어 선생님이었고 다음에 되고 싶은 것은 작가가 되는 것이었다. 교사임용 순위고사에서는 신체상의 결격으로 불합격되어 그나마 일년 남짓 거제도의 한 고등학교에서 임시교사를 한 적이 있고, 다음에 정립회관에서 상담교사로 근무를 하다가 2급 지체장애인인 남편을 만나 결혼을 했다. 그리고 87년에는 친구처럼 듬직한 아들을 낳았고 94년에 동서문학 소설부문 신인상으로 등단을 했다. 김미선씨의 글은 한국DPI 홈페이지(www.dpikorea.org)에서도 연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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