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는 서울 가서 아부하는 법만 배웠나…."

어쩌다가 밀양 친정집에 모이는 날이면 우리 오라버니나 언니가 나한테 하는 말이다. 뭘 먹어도 맛있다고 그러고, 누구를 봐도 이뿌다고 그러고, 뭘 하는 것을 봐도 잘 한다고 수다를 떠니까 무뚝뚝한 경상도 사람으로서는 계면쩍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서울사람들의 습관적인 말치레로 여겨지기도 하는 모양이다.

우리집에서는 같이 티브이를 보다가, 내가 "저 사람 참 이뿌네", 혹은 "멋있다", 그러면 우리 집의 두 남자가 나를 꼬나보면서 면박을 준다.

"저게 무엇이 예뿌다고? 그걸 눈이라고 달고 있는 거야?"

그런데다가 별것도 아닌 걸 가지고 늘 눈물을 줄줄 흘린다.

특히 인간극장 같은 휴먼 다큐멘터리만 보면 어느샌가 눈물을 넘어 콧물까지 훌쩍여서 옆사람까지 민망하게 만들기가 일쑤다.

그러나 이렇게 망그라지기까지는 내 나름대로의 역사와 문화가 배어 있다.

나는 첫돌 지나고 나서 소아마비가 되어버렸으니깐, 날 보는 사람들은 누구나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우리 옴마, 이모, 고모, 할매, 삼촌, 외삼촌, 이웃 아지매, 아자씨 등등….

울 아부지는 원래 낙천적인 분이라 그나마 그런 내색이 없었던 유일하신 분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나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는, 무슨 이야기를 해도, 비관적으로 흐르기 마련이었다.

"시집은 당연히 못 갈테고, 직장도 당연히 못 얻을테고, 인간구실도 못 할테고…."

그래서 어디 놀러만 가도 울 옴마는 나가서 넘어지면,

혹 비라도 만나면,

친구들이 우르르 다 뛰어가버리고 니 혼자 남으면,

온갖 이유를 다 대면서 나가지 말라고 제지를 하셨다.

학교 진학하는 것도, "그런 몸으로 배워봤자 어데 쓸끼고?" 그러면서 반대를 하셨다.

나는 그 말에 댐비고, 울고불고, 싸우고, 그렇게 억척을 떨면서 옴마로 대표되는 부정적인 관점과 끊임없이 싸웠다.

그 과정에는 주변 친구들의 도움이 컸다.

살기도 싫고 움직이기도 싫어서 몇날 며칠동안 방안에 꼼짝도 않고 박혀있으면, 친구들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나를 바깥으로 데리고 나갔다.

가서 냉면 사주고, 둑에 가서 노래부르고, 같이 차 마시고, 수다떨고….

그리고 가출하듯이 집을 나와 억지로 대학이라는 곳을 가게 되었을 때 집 없는 나한테 재워주고, 먹여주고, 아르바이트 구해준 이가 바로 교회 학생부의 단짝친구였다.

그렇게 싸우는 일에 익숙한 나는 본래부터 씩씩하고 활달한 천성인 줄 알았다. 옆에 있는 사람들도 나한테 늘 그렇게 말했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나이 마흔이 되는 순간, 나는 아주 이른 사춘기를 심하게 앓게 되었다. 그러면서 내 내면을 들여다보게 되었고, 내 속에 눌려져 있던 수많은 좌절과 열등감, 피해의식, 슬픔을 만나게 되었고 그것이 암 덩어리처럼 나를 병들게 하고 지레 늙도록 만들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이가 어느 정도 들었을 때는 반항이라도 할 수 있고, 앙탈이라도 부릴 수 있지만, 아주 어린 아기 때에 투사된 슬픔과 절망은 으악, 소리도 한 번 못 질러보고 세포 속에 스폰지처럼 스며들고 젖어들어서 슬픔이 슬픔인지도 모르는 채로 슬픔을 만들게 하고, 그 슬픔은 또다시 열등감과 자기 비하의 감정으로 빠져들게 만들었다.

이러한 마이너스적인 감정을 나는 '소설가'라는 이름으로 보상을 해보려고 했지만 늘 부족함으로 웅크리고 있어야 했던 자신의 내면으로는 문학적인 활달한 상상력을 펼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리고 글에 대한 공적인 신분을 가지게 된 덕분에, 어디서나 날아올 수밖에 없었던 신랄한 비판과 평가 앞에서 작가로서의 확신은커녕 주눅부터 들었다.

아주 어린 날, 소아마비라는 병에 걸려서 일어나지 못하게 되자 그 누구도 나한테 그걸 견뎌내고 마침내 당당한 한 인간으로 우뚝 서게 될 것이라고 말해주지 않았던 것이다.

훨씬 더 자라고 나서는 그 결핍을 채우기 위해 가까스로 소설가의 문에 진입하긴 했지만 나는 늘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인간, 누구한테도 인정받을 수 없는 인간으로서의 불안감과 초조함이 나를 지배하고 있어서 누가 나에게 간단한 비판 한 마디라도 던질라치면, 이건 아주 예민한 안테나처럼 상대방이 말하기도 전에 스스로 먼저 반응을 하고 나서는 것이다.

기억의 무서움.

특히 잠재적으로 입력된 기억의 무서움.

아무리 자기 마음이라고 해도,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는 마음.

이런 순환을 일컬어 어떤 이는 운명이라고 하고, 팔자라고 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사실을 아는 순간,

다행히도 이 모든 악순환의 고리는 끊어지게 되어 있다.

사람에게는 의지라는 것이 있고, 이 의지를 발동하는 순간, 방법은 어디에서든지 나오게 되어 있다는 것이 나의 경험담이다.

나에게서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버리는 방법은 나를 스스로 인정해주고 스스로 사랑해주는 것이었다.

내가 무엇을 잘 할 수 있으므로 나를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무엇을 훌륭하게 이루었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 어떤 환경 속에서도, 그 어떤 상황 속에서도, 최선을 다하려고 애써왔던, 끝끝내 자신의 고귀함을 버리지 않으려고 했던 내 생명이 그것 자체로 너무나 감사하고 소중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면서 알게 된 것이다.

보이지 않는 사랑과 미움은 이 세상에서 하나도 없어지지 않고 우리의 세포 속에 그대로 각인된다는 것을.

단지 사랑과 부드러움과 긍정적인 배려는 내 속에 있는 나를 살리고 평화롭고도 역동적으로 재생산되지만 미움, 부정적인 언어, 장래에 대한 부정적인 관점들은 결국 내 속에 있는 나를 죽이고, 힘들고 기진맥진하게 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래서 나는 늘 아부하는 사람처럼 되어버렸다.

그러나 아부가 아니라, 그런 과정을 통해서 나는 언제나 그 사람의 좋은 점이 눈에 아주 잘 들어온다. 그것만이 우리를 살리는 것인 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때로는 아직도 뼈가 저리도록 매운 말을 상대방한테 던지기도 한다. 나의 불완전함 속에서 생긴 교만함이 아직도 자리를 못 찾고 헤매고 있기 때문이다.

그도 때로는 귀엽지 않은가?

그러나 내가 귀엽겠다고 누구의 힘을 빼는 짓을 한다면, 그건 참으로 곤란한 짓거리가 아닐 수 없다. 흠, 흠!!!

경남 밀양에서 태어났다. 일찌감치 바느질을 배워 혼자서 살 궁리를 하라는 부모님의 말을 거역하고 울며 불면서 억지로 대학에서 국어국문학을 전공했다. 가장 되고 싶었던 것은 국어 선생님이었고 다음에 되고 싶은 것은 작가가 되는 것이었다. 교사임용 순위고사에서는 신체상의 결격으로 불합격되어 그나마 일년 남짓 거제도의 한 고등학교에서 임시교사를 한 적이 있고, 다음에 정립회관에서 상담교사로 근무를 하다가 2급 지체장애인인 남편을 만나 결혼을 했다. 그리고 87년에는 친구처럼 듬직한 아들을 낳았고 94년에 동서문학 소설부문 신인상으로 등단을 했다. 김미선씨의 글은 한국DPI 홈페이지(www.dpikorea.org)에서도 연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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