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의 일이다.

그 날은 장애여성 교육 세미나가 있어서 아침부터 바빴다. 예쁘게 몸치장도 해야 하고, 길을 몰라서 잘 찾아갈 수 있을지 마음이 부산했던 것이다.

나는 늘, '여성장애인의 행복은 지구 전체의 행복이다'라고 주장하고 있느니 만큼, 나와 같은 여성장애인들을 만날 때면 멋진 모습으로, 멋있게 사는 여성으로 나타나고 싶다.

자기 주장에 있어서 당당하고, 밝은 표정으로 풍요로우며, 나름대로 활기찬 모습으로 건강미를 풍기며, 거기다가 부드러운 옷차림으로 여성적인 나의 정체성을 한껏 드러내고 싶은 것이다.

나는 어릴 때부터 이쁜 여자의 옷을 입어본 적이 거의 없었다.

울 엄마는 내 젖가슴이 나오는 것을 챙피하게 여겨서 아줌마들이 입는 이중 칼러의 넉넉한 지지미 부라우스를 길이만 줄여서 나한테 입혔다. 푸대 자루를 덮어씌운 것 같은 그런 스타일이었다.

나는 그걸 못마땅해 하면서도 알게 모르게 길들여져서 두껍고 어두운 색의 면 남방을 입으면 왠지 모르게 편했던 것 같다. 대학생 때 찍은 사진을 보면 짧게 짜른 커트머리에 국방색 남방을 걸쳐 입고 헐렁한 판탈롱 바지가 그때 유행한 것을 깊이 감사하면서 어정쩡하게 서 있는, 그야말로 남자아이 같은 모습이다.

그러던 내가 멋을 부리기 시작한 것은, 바야흐로 나이 마흔을 넘기고 난 다음부터였다. 그 전에도 나름대로 멋을 부리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 때의 핵심은 내 체형을 감추기 위한 것에 오로지 집중되어 있었다. 몸의 실루엣을 없애버리고 전체적으로 평평하게 보이도록 하여 가능한 장애의 몸이 바깥으로 드러나지 않게 하는 것 말이다.

그러던 내가 마흔에 이르러 모든 건강을 다 잃어버렸다가 다시 운동을 시작하면서 몸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나서부터였다. 이 때의 운동이란 단지 몸으로 움직여주는 운동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몸에 귀 기울여서 몸이 원하는 대로 해주는 모든 것들이 다 포함된다.

좋은 음식을 먹고, 규칙적으로 몸을 움직여주고 그런 외적인 것들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 몸을 스스로 소외시키지 않고 소중하게 여기는 의식이 더 중요한 것이었다. 그러면서 내 몸이 얼마나 아름답고, 내 몸의 표현력이 얼마나 풍부한 것인지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그 해 처음으로 어깨가 드러나는 소위, '나시'라는 옷을 입게 되었다. 그리고 차츰차츰 허리선이 드러나고 가슴의 실루엣을 살릴 수 있는 여성적인 옷을 선택하게 되었다. 내 몸은 건강해졌고 건강해진 내 몸은 남성이나 중성이 아니라 여성의 몸임을 표현하기를 더 좋아했던 것이다.

대부분의 장애인처럼 나 역시 하체가 부실하여 아랫배가 나올 수밖에 없는 체형이지만, 그러나 시간이 나는 대로 편하게 누워서 다리를 공중으로 들어올리고-물론 오른쪽 다리는 손으로 잡아주어야 한다- 상체도 바닥에서 분리시켜 가능하면 허리의 힘만으로 몸을 지탱하려고 애를 쓴다. 너무 힘들어서 그때마다 낑낑거리지만 그것이 운동이 된다고 생각하면 충분히 극기할 수 있다.

왜냐, 나는 아름다워지고 있는 중이니까. ^--^))

그리고 일주일에 두 번 이상 목욕탕의 넓은 냉탕에 들어가 두 무릎을 손으로 잡고 뜀뛰기를 한다.

나는 늙어서 죽을 때까지도 목발을 포기하지 않고 내 힘으로 목발을 짚고, 가고 싶은 곳에 내 힘으로 걸어가고 싶다. 어리거나 젊었을 때는 목발이 싫었지만 지금은 목발과 함께 걸을 수 있다는 것이 그나마 소중하고 감사 할 뿐이다.

그러려면 그나마 허리가 몸을 버텨주도록 관심을 가져주어야 하고 다리의 힘도 더 이상 빠지지 않도록 신경을 써주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하루종일 운동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최소한 내 생활에서 몸에 대한 관심을 없애버리지 않고, 어떻게 하면 효율적인 방법으로 관리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서 신경을 쓸 뿐이다.

장애여성 세미나에 갔다는 이야기를 쓰던 중이었는데 어쩌다가 옆길로 샜다.

'옆길로 샌다'는 것은 내면 속에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는 것이어서 이럴 때는 힘이 실린다. 정말 하고 싶은 말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힘이 너무 실리다보면 잘난 척으로 빠지기가 또 십상이지만, 잘난 척을 해봤자, 얼마나 하겠는가!?

꽃 같이 피어오르던 십대, 이십대, 삼십대를 다 지나 이제 쉰을 바라보는 나이에 들어서서 비로소 자기 몸을 인정하게 되었으니 어쩌면 눈물겨운 이야기일 수밖에 없다.

세미나를 시작하면서 주최측의 담당자가 장미꽃을 가슴에 달아주었다. 나는 홀로 영광스럽게 예쁜 꽃을 달고 내 이야기를 했지만, 그 자리에 참석하신 여성 장애인들의 살아온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들 모두가 다 한결같이 꽃다발이 아니라 화환으로도 모자랄 만큼 아름답고도 의지에 가득 차 있는 여인들이다. 나는 늘 그들에게 감동을 받고 사랑을 받고 또 돈까지 받고 돌아오는 횡재를 한다.

그리고 같이 점심을 먹고 헤어지면서 이미 시들해진 꽃을 핸드백에 넣어 가지고 왔다. 아들한테 자랑도 하고 싶거니와 -울 아들은 엄마가 이렇게 활동하는 것을 너무 좋아한다- 꽃이니 만큼 물에 담그면 금방 또 살아날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꽃대에 꽂혀 있던 옷핀을 먼저 분리해내고 철사와 같이 꽁꽁 말아놓은 초록 테이프를 조심스럽게 풀었다. 그리고 장미꽃 줄기를 찾았지만 날카로운 철사만 보일 뿐 보이질 않는다. 어쨌거나 철사를 꽃에서 빨리 떼내야 했다. 가늘고 날카로운 그것이 얼마나 꽃을 옥죄이고 있겠는가. 그러나 이번에는 철사의 끝이 보이지를 않는 것이다.

철사와 꽃이 한 몸이 아닌 이상, 분명히 시작과 끝이 있을 터인데 아무리 꽃을 뱅뱅 돌리면서 손가락으로 더터봐도 끝이 느껴지지가 않았다.

아∼ 몇 번의 시도 끝에 결국 찾긴 찾았는데, 이럴 수가 있나 싶다.

장미 코사지를 만든 사람은 철사를 꽃받침 바로 밑에 꽂아서 중심을 잡아놓고, 다음에 철사를 길이대로 몇 번 오르내린 다음, 마지막 마무리로 또 다시 철사의 끝을 꽃대 속에다 깊숙이 박아버린 것이다. 그 바람에 꽃대를 가로지르는 철사줄이 만들어지면서 꽃대궁이는 아예 잘라져 나가버린 것이었다.

세미나에서 나누었던 감동이 금방 차갑게 오그라드는 느낌이다. 어떠한 처지에 있는 장애여성이라도 존귀한 한 생명으로 귀하게 여길 것을 주장해야 한다면, 길가에 무심히 피어 있는 꽃 한송이까지도 귀하게 여기는 마음이 그 바탕에 깔려져 있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한낱 속 빈 구호나 직업적인 요구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유리컵에 꽂아 놓으려고 했던 나는 할 수 없이 납작한 유리잔에다 물을 받아서 꽃송이를 동동 띄었다. 몸체는 없어지고 얼굴만 동그마니 남은 것 같은 그 모습이 얼마나 애처롭고 미안한지 눈이 자꾸 그쪽으로 갔다. 그런데 부실한 그 꽃이 얼마나 예쁘게 생기를 회복하면서 향기롭게 피어나는지…. 며칠이 지나도 시들 줄을 모른다.

아마도 쓸데없는 곁가지들을 모두다 생략시키고 독야청청 오롯이 피어 있는 생명의 정수를 보여주기 위함인가. 나는 오늘도 몇 번이나 분홍빛의 이 사랑스러운 장미를 훔쳐보면서 그녀가 들려주는 신비롭고도 아름다운 이야기를 청취하고 있는 중이다.

경남 밀양에서 태어났다. 일찌감치 바느질을 배워 혼자서 살 궁리를 하라는 부모님의 말을 거역하고 울며 불면서 억지로 대학에서 국어국문학을 전공했다. 가장 되고 싶었던 것은 국어 선생님이었고 다음에 되고 싶은 것은 작가가 되는 것이었다. 교사임용 순위고사에서는 신체상의 결격으로 불합격되어 그나마 일년 남짓 거제도의 한 고등학교에서 임시교사를 한 적이 있고, 다음에 정립회관에서 상담교사로 근무를 하다가 2급 지체장애인인 남편을 만나 결혼을 했다. 그리고 87년에는 친구처럼 듬직한 아들을 낳았고 94년에 동서문학 소설부문 신인상으로 등단을 했다. 김미선씨의 글은 한국DPI 홈페이지(www.dpikorea.org)에서도 연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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