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에이블 뉴스에 장애인 남성의 성생활을 인터뷰한 조향주씨의 칼럼이 실렸는데 읽어보니까 뭐 별다른 내용이 없었다.

섹스할 때 비장애 여성이 주로 올라가는 상위체위를 했다니까, 그러면 장애 남성한테는 더 편한 것일까, 그런 생각을 잠깐 했었다.

그런데 다음날 다시 들어가서 보니깐 이런 저런 의견이 분분해지고 있었다. 특히 장애여성의 반발이 상대적으로 좀 더 심한 것 같았다. 언제나 그런 것처럼 클릭 햇수도 금방 100회를 넘어가고 있었다.

우선 부럽다~

빗발같은 관심 속에서 쓰여지는 글이라니~

나는 젖먹은 힘까지 동원해서, 재미나게 쓴다고 써도 답글에 달린 클릭 수가 고작 사오십 회에 지나지 않는다. 그나마 답글이 없을 때도 허다하다.

그래서 나도 섹스 야그 한 번 써볼까나~

대찬 여자, 화끈한 여자, 조항주씨가 장애인 성문제 공론화에 앞장서고 있는 마당에, 나도 일조를 해볼까나~

성이라면 나도 할 말이 무지 많은데 말이다.

그러나 여태까지는 무서웠다.

성 담론 어쩌구 저쩌구 하다가 어디로 빠질지 나도 나를 잘 모르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이 기회에 한번 풀어보고자 한다.

성을 대하는 태도는 결국 자기 자신을 대하는 태도,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과 동일하지 않을까 하는, 아주 심오한 철학을 나름대로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톡 깨놓고 까발리는 거라면 둘째가면 서러운 나지만, 그나마 털어놓고 싶지 않은 것 몇가지가 있는데 그중에 하나가, 어릴 때 우리집이 고물상을 했다는 것이다. 지성과 이성이 존중되는 고상한 정신적 집안이 출생배경이 아니라, 온갖 쓰레기 잡동사니들이 쌓이는 환경 속에서 억척스럽게 생존해야 했다는 것은 늘 나한테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요목이었던 것이다.

그런 관계로 나는 아주 어릴 적부터 책이라는 책은 나이와 질과는 전혀 관계없이 해치울 수 있었다. 60년대, 70년 그 시절의 유명한 대중잡지이던 아리랑을 비롯해서 청춘, 부부 같은 것을 모조리 다 섭렵했고, 야한 대중소설들도 심심찮게 읽었다. 아직도 기억에 남는 것으로는, 앞부분이 떨어져나간 번역소설이었는데 2차 대전 당시의 나치군인들의 유대 여자들에 대한 변태적인 내용을 다룬 글도 있었다. 그때는 그게 무슨 말인지도 모르고, 분위기상 상당히 심상찮은 것으로 짐작만 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조숙해빠진 나는 초등학교 5학년에 초경을 시작했다.

물론 학교를 늦게 간 탓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때의 또래로서는 상당히 이른 초경이었다. 그러니 우리 엄마가 얼마나 대경실색을 했겠는가?

그때엔 생리대도 당연히 없던 시절이라, 이런 일이 생겨나면 엄마는 우선 당신 쓰던 것을 내주고 부랴 부랴 시장에 달려가서 가제 천을 끊어와야만 했었다.

마침 여름방학이던 그 날은 달까지 휘영청 밝았다.

놀람과 시름에 잠겨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시던 우리 엄마는 불도 켜지 못한 채, 달빛만으로 가제를 자르고 마름질을 해서 내 인생 최초의 생리대를 만들었다.

그때 쏟아지던 한숨과 또 한숨.

그동안 이 지구상에 발생한 수많은 지진과 폭풍 속에는 그 때 우리엄마가 쏟아놓은 한숨도 커다란 일조를 했으리라.

나는 이미 여성과 남성의 성에 대한 신비와 호기심을 다 갖춘 상태였지만 그걸 절대 밖으로 표현하면 안 된다는 것이 그 때 이미 여름밤의 암울하던 어둠과 엄마의 한숨을 통해서 내 세포에 새겨졌다.

그래서 나는 결코 여성으로 살지 않으리라 결심했다. 한 인간으로 사는 것만이 내가 당당해질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이때의 여성은 남성에게 선택당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는 ‘수동적인 의미에서의 여성’이었고, 한 인간이라 함은 여성과 남성을 함께 공유한 완전한 인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남자같은 인간' '성이 없는 무성 인간'을 의미했다.

어린 것이 알면 얼마나 알았겠는가?

그저 이 사회가 막연하게 주지시키고 있는 것을 엄마를 통해 알았을 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남자 같은 인간’이 되기 위해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내 취향이나 적성과는 상관없이 한의대에 가야한다고 한때 만용을 부리기도 했었다.

그러면서 이런 저런 내적 갈등이 많았겠지만 그중 가장 크게 밖으로 불거져 나온 것이 대학 1학년 때의 내장산 사건이 아닌가 싶다.

나는 초등학교, 중고등학교 12년을 통털어서 소풍이라고는 고3시절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가본 것이 단 한 번이었고, 여행은 한번도 따라 가보지를 못했다. 그런데 대학이라는 곳엘 갔더니 M.T를 간다면서 주선하는 남학생들이 부실한 나한테 제일 먼저 와서 의논을 하는 것이 아닌가. 물론 동급생 중에서 가장 나이 많은 여학생인 터라 누이처럼 의논을 해온 것이었겠지만, 어쨌든 그들한테는 부실한 내가 M.T를 갈 수 있을지 없을지에 대해서 의심은커녕 그런 의식조차 아예 없는 것 같았다.

어라!!!!

난 이 사실이 무척 신기했다.

여태까지 한번도 교실 밖의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일에 자연스럽게 끼어든 적이 없었던 나로서는 어쩌면 흥분했던지도 모른다.

그래서 잠자코 있긴 했지만, 새로운 장이 일어날 때마다 이 일이 어떻게 치러질 것인가, 숨을 죽이고 바라보고 있었다.

마침 10월 연휴라, 배낭을 바리 바리 맨 대학생들이 타는 완행열차는 미어질 듯이 복잡했지만 그중에 잽싼 남학생들이 어떻게든지 뛰어들어가서 내 자리를 잡아놓고는 통쾌하게 낄낄거리곤 했다.

그 중에 특히 목소리 육중한 한 남학생이 있어서 움직일 때마다 나를 먼저 챙기려고 들었다. 밤에 내장산에 도착하여 야영장을 향해 올라가던 산길에도 그 남학생은 끝까지 나와 함께 동행해주었다.

“천천히, 천천히, 뭐가 바쁘오? 산길도 좋고 달빛도 좋은데..... 우리끼리 천천히 갑시다”

누구의 도움을 일방적으로 받을 수밖에 없는 미안함에 내가 발길을 재촉하면, 그는 이런 마음을 이미 알고 있다는 듯이 느긋한 목소리와 반짝이는 후레쉬로 내 발밑을 비쳐주곤 했다.

그리고 내장산에서의 2박 3일동안 우리는 같은 조가 되어서 내내 같이 지냈다. 기타도 잘 치고, 노래도 잘 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독특한 리더십에다 언제 어디서든 튀어나오는 느긋한 유머, 게다가 언제나 내 옆에 자리를 잡고 같이 앉는다는 사실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돌아오는 날 새벽에는 택시로 그가 나를 자취집 앞에 내려주고 자신의 하숙집으로 돌아갔다.

늘 새벽기도에 나가는 주인집 아줌마가 나오기를 기다리면서 컴컴한 대문 앞에 걸터앉아 있는데 갑자기 가슴이 미어질 것처럼 눈물이 쏟아져나왔다.

이 일을 어쩔 것인가? 어찌할 것인가?

수렁에 빠지고 화산재에 둘러빠진다고 한들 이보다 더 절망적일 수 있을 것인가?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곧 내가 여성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이 몸으로 어떻게 여성이 된단 말인가.......

학교에 돌아오고 나서도 우리 조는 떨어질 줄 모르고 늘 같이 어울려 다녔다. 남학생 세명에 여학생 두명으로 이루어진 우리는 강의가 끝나고 나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잔디밭에 모였다가 같이 밥먹고 같이 영화보고 그러고도 헤어지기 싫어서 또 차 마시러 가고....

그때마다 그는 천천히, 천천히, 라고 내 목발 위에 손을 거들어주곤 했다. 그리곤 내 눈을 지그시 들여다보았다. 그런 그가 나는 죽을 만큼 좋았다. 그러나 그 표현을 할 수가 없었다. 그건 수치심이자 부끄러움이었고 그에 대한 배반이자 나 스스로의 당당함을 포기하는 것이었던 것이다. 그의 눈길 앞에서 점점 더 솟구쳐오르는 격정을 참을 수가 없어서 나는 화장실로 들어가 뜨거운 눈물을 찬물에 씻어내고 뒷문으로 도망을 치곤 했다.

그리고 어느 날, 나는 그에게 장문의 편지를 보냈다.

한 남자에게 한 여성으로 보여진다는 것이 나에게는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지,

결국 여성이 아닌, 당당한 한 인간으로서의 길을 갈 수밖에 없는 것이 나의 선택이라는 요지였다.

내 스스로 이런 말을 뱉아놓고도 그가 나를 붙들지 않는다는 것에 충격을 먹었다. 그럼 그 동안 나를 향해 퍼부어지던 그의 활화산 같던 눈은 대체 무엇이었더란 말인가?

나는 시도 때도 없이 찻길로 뛰어들고 싶었다.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았다.

경남 밀양에서 태어났다. 일찌감치 바느질을 배워 혼자서 살 궁리를 하라는 부모님의 말을 거역하고 울며 불면서 억지로 대학에서 국어국문학을 전공했다. 가장 되고 싶었던 것은 국어 선생님이었고 다음에 되고 싶은 것은 작가가 되는 것이었다. 교사임용 순위고사에서는 신체상의 결격으로 불합격되어 그나마 일년 남짓 거제도의 한 고등학교에서 임시교사를 한 적이 있고, 다음에 정립회관에서 상담교사로 근무를 하다가 2급 지체장애인인 남편을 만나 결혼을 했다. 그리고 87년에는 친구처럼 듬직한 아들을 낳았고 94년에 동서문학 소설부문 신인상으로 등단을 했다. 김미선씨의 글은 한국DPI 홈페이지(www.dpikorea.org)에서도 연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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