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회 전국 절단장애인 모임'행사에 참석하셔서 참가들에게 인사를 하고 있는 모습이다.

"어머, 진희씨는 정말 잘 걷네. 얼마 줬어. 어디까지야."

"그래, 나중에 나하고 따로 만나자. 연락해, 꼭."

남들처럼… '어떻게 지내셨어요. 그동안 뭐하셨어요.'가 첫인사가 아니라 나와 우연정 선생님과 첫인사는 이렇게 시작됐다.

지난 4월 7일∼11일 한국영상자료원에서 '한국영화 명배우 회고전'이 있었다. 아는 친구와 함께 영상 자료원에서 우연정 선생님을 만날 수 있었다.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삶을 살아온 '각선미의 여왕' 우연정.

이 날은 우연정 선생님의 대표작들이 상영되는 자리였다. 첫날은 자전적 삶을 영화로 만든 '그대 앞에 다시 서리라'를 상영하기에 앞서 마련된 축하 리셉션이였다.

많은 영화계 관계자들과 탤런트들이 왔다. 김수용 감독, 이장호 감독, 탤런트 이정길씨 등 절친한 동료 100여 명이 모인 축하연에서 우연정 선생님은 오래도록 가슴에 묻어뒀던 감정을 쏟아냈다.

“이렇게 화려한 자리에 다시 서게 될 줄 몰랐어요. 벅찬 감격의 감정을 다시 가질 수 있다는 것은 엄청난 행복이죠”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눈물 때문에 눈가의 아이라인이 번지고 검정눈물이 흘러도 어쩜 저리도 잘 가꿨을까. 나이가 들어도 여전히 예쁘다.

내가 처음 사고나고 나서 만나고 싶었던 사람이 영화배우 우연정 선생님이다. 모르는 사람들은 그 많은 사람들 중에 '왜 하필 우연정이야?' 하고 물을 것이다.

왜냐구? 글쎄….

그냥 내가 알고 있는 영화배우 우연정 선생님은 숙명여대 무용과를 나온 재원이기도 하고, 70년대 빼어난 몸매와 미모로 남정임ㆍ윤정희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뭇 남성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으로 알고 있다. 그래서 더 만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요즘 잘 나가는 김희선이나 송혜교 같이 흔한 말로 정말 잘 나가는 영화배우였는데, 주가가 오르고 잘 나갈 때 오른쪽 허벅지에 생긴 골수암으로 다리를 자르고 투병해야만 했을 때 마음은 어땠을까…. 그리고 '그대 앞에 다시 서리라'라는 영화를 마지막으로 서서히 대중들의 관심에서 멀어졌다고 느꼈을 때의 느낌은….

그 모든 것이 궁금했고 어떻게 그 힘든 고비를 견디어 냈을까, 또 자신과의 싸움은 어떻게 극복했으며 살고 있을까…. 그 모든 것이 궁금했다. 그래서 무작정 각 방송국과 연예 스포츠 신문마다 전화를 건 적이 있었다.

"저, 혹시 영화배우 우연정 선생님 전화번호 아세요?"

"그 분이 누구죠, 어느 드라마에 나온 사람입니까?"

"오래 전에 굉장히 인기도 있었고요, 골수암으로 다리도 절단했다고 하는데…. 지금 나이가 한 50대쯤 되셨을거에요."

"잘 모르겠습니다. 다음에 다시 한번 전화하세요. 뚜뚜뚜…."

다들 모른단다. 아니면 일부러 안 가르쳐 주는 건지. 우연정 선생님이 요즘 젊은 사람들이 아니어서인가, 아니면 정말 몰라서 안 가르쳐 주는 걸까…. 세월이 가다 보면 언젠가는 만날 날 있겠지.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마음속에 생각하고 있었던 사람을 눈앞에서 만나다니….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저 앞에 지금 목발을 짚은 채 한쪽발로 서있다.

내가 너무 점잔을 뺀 걸까…. 난 나중에 더 좋은 만남을 위해 아쉽지만 간단한 인사를 나누고 집으로 돌아왔다.

6월말, 어느날이다. 같은 절단 장애인으로 공감대가 갔다고 할까…

그냥 그렇게 아는 분의 소개로 알게 된 자유고기자를 알게 됐다. 이야기 도중 "어떤 이유에서건 신체 일부를 절단한 절단 장애인들 모임을 9월쯤에 가질 예정인데 그 때 영화배우 우연정 선생님이 왔으면 좋겠다"고 말을 했는데 오히려 이 사람도 나에게 거꾸로 묻는다. "우연정이 누구예요, 뭐 하는 사람이예요, 어떤 영화에 나왔어요?"

그리고 얼마 후 전화가 왔다. 우연정 선생님을 인터뷰하고 싶다고….

한 장애인 잡지사 편집장이 "아, 우연정. 우연정은 어떤 영화에 나왔고 한참 인기 있을 때 골수암으로 팬들의 기억에서 사라졌지. 그래, 할 수 있으면 우연정씨를 인터뷰해."

그래서 겸사겸사 내가 선생님께 전회를 했다.

"선생님, 저 진희인데요. 아는 장애인 잡지사 자유고기자가 선생님을 인터뷰하고 싶다고 하는데요. 시간 되세요? 언제쯤이 좋을까요."

"진희야, 나 지금 아프다. 비도 오고 몸도 하루종일 아프고….비 안 오면 그때 다시 통화하자."

"네. 선생님도 몸조심 하시구요, 건강하세요. 다시 연락 드릴께요."

아니 그런데 웬놈의 비가 그리도 많이 오는지, 장마도 끝났건만 6월말에서 7월 초까지 어찌나 비가 많아오는지…. 잠깐 해가 빤짝 나서 전화를 할려면 '혹 부담을 주는 건 아닐까'하는 마음에 전화를 못하겠다.

몇 번 전화를 들었다놨다 하기를 수차례.

삐리리∼삐리릭∼핸드폰이 울렸다.

"진희야, 나 우연정이야. 내일은 어떠니? 그 기자에게 약속시간 말하고 장소도 말해. 그리고 니가 집으로 나를 태우러 와라. 부평 현대아파트00동00호로…."

와, 정말 기분 째졌다. 입이 귀에 걸리는 줄 알았다.

그렇게 다음날 선생님과 나, 그리고 그 자유고기자, 함께 온 사진 찍는 사람과 넷이서 커피도 먹고 과일도 먹으며 3시간 정도의 인터뷰는 끝났다.

인터뷰하는 3시간 동안 옆에 앉으면서 그동안의 삶 속에서 얼마나 선생님이 힘들었을까 하는 것들을 짐작할 수 있었다. (우연정 선생님의 이야기는 자세하게 더 안 써도 여기 이 글을 읽는 분들은 알 것이라고 생각해서 생략하겠다.)

그 후로 선생님과 나는 집이 가까워서 자주 안부 전화도 하고 찾아뵈었다. 어느 정도 친해졌다고 생각해서일까. 선생님은 나에게 이런 말도 해주셨다.

"나는 너 나이 때 다리절단 하고 아무 생각이 없었어. 그저 먹고 사는 게 바쁘고, 세 아이들 키우느라 정신이 없었거든, 이제 아이들도 다 키워놨고. 좀 늦었지만 뭔가 좋은 일도 하고 싶어. 정말.진희 이쁘다. 하고자 하는 일 열심히 하고…."

선생님은 얼마 전 충주에서 1박 2일에 걸친 '제1회 전국 절단장애인 모임'에 바쁘신데도 참석을 해주셔서 본인의 이야기도 해주셨다.

우연정 선생님은 이젠 영화배우가 아니라 장애인 운동가로 우리에게 다시 돌아왔다. 사시는 곳이 인천이고 주로 활동을 인천에서 하셨기 때문에 인천에서 여성 장애인과 그 가족의 자활(自活)을 돕는 단체 '인천 여성 장애인 복지 증진회'를 만드셨다.

이곳에서는 '중증 장애인들의 자립을 위해 기술을 연마하고 취업을 할 수 있게 끔 도와주는 일종의 배움터'라고 말한다.

"진희야, 너도 나중에 여기 일도 도와줘야 한다. 알았지?"

"네. 물론 당근이죠."

* 선생님. 지금처럼 호탕하고 여장부답게 그리고 오래오래 건강하게 사세요.

사람 만나기를 무척이나 좋아하는 칼럼리스트 김진희씨는 지난 97년 교통사고로 한쪽 다리를 잃었다. 사고를 당하기전 280명의 원생을 둔 미술학원 원장이기도 했던 필자는 이제 영세장애인이나 독거노인들에게 재활보조기구나 의료기를 무료로 보급하고 있으며 장애인생활시설에 자원봉사로 또 '지구촌나눔운동'의 홍보이사로 훨씬 더 왕성한 사회 활동을 하고 있다. 필자는 현재 방송작가로 또 KBS 제3라디오에 패널로 직접 출연해 장애인계에는 알려진 인물이다. 특히 음식을 아주 재미있고 맛있게 요리를 할 줄 아는 방년 36살 처녀인 그녀는 장애인 재활보조기구에 대한 올바른 정보를 제공해주는 사이트 deco를 운영하고 있다. ■ deco 홈페이지 http://www.uk-orth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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