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그림을 그리게 권유 했던 처형은
전주로 서예를 배우러 서울서 한 달에 한 두 번씩 갈 때마다 집 사람과 같이 갔으나 애들이 커서 유치원을 다니게 되고 나서 나는 중대한 결심을 하게 되었다. 나 홀로 다니겠다고…..
처음 혼자 전주를 가겠다고 하니 집 사람은 상당히 불안 했나 보다. 그렇다고 자기가 계속 같이 다닐 처지도 아니고 하니 불안한 마음을 가지고 영등포 역까지 따라와서 조심해서 가라고 하고 도착하면 꼭 전화 하라고 당부한다.
내게 명함이 있으니 이상이 있으면 남이 알아서 전화 할 테니 걱정말고 전화 없으면 잘 도착 했다고 생각하고 기차에 올랐다. 이렇게 시작한 홀로서기이지만 고생은 엉뚱한 사람이 했다. 집 사람은 처형에게 전화하여 몇 시 차로 갔으니 전주 역으로 마중을 가라고 했나 보다.
어떻게 혼자 왔느냐며 마중 나와 반기는 동서와 같이 집으로 가서 점심 먹고 학원으로 갔다. 보통 전주가면 2,3일을 있다가 오는데 밤에는 동서가 있어서 괜찮은데 낮에는 문제가 생겼다. 대소변의 처리가 문제였다.
이런 것은 생각지도 않고 모든 것이 잘 해결 되리라 생각했는데 낭패였다. 처형 댁은 딸만 셋이 있어서 그런 것을 부탁하기가 좀 그랬다. 그러나 눈치 빠른 처형이 그런 것은 자기가 해 줄 테니 걱정말고 자기에게 부탁하라고 한다.
사실 지금도 소변 보는 것은 남에게 부탁해서 할 수 있으나 대변은 부탁하기가 미안하다. 그런데 이것을 아무 거리낌 없이 해 주는 처형으로 인해 나 홀로 외출이 엄청 쉬워졌다. 그렇게 하니 애들도 동화되어 잘 해 주니 동서 집이 우리 집 보다 더 편한 느낌이 들었다.
처형의 음식 솜씨는 장모님의 좋은 손맛을 이어 받아 이 맛에 반한 것도 있지만 나를 형제 이상으로 대해준 동서는 어디 갈 때 마다 자기 차(개인택시)로 태워주곤 했다. 그리고 갈 때 마다 변하는 내 서예 연습한 것을 보고는 자기일 같이 좋아하고 1991년 첨부 된 전라북도 서예대전 입선을 보고 모두가 기뻐하였다.
이렇게 7년 동안 매달 전주로 서예를 배우러 다니는 동안 처형과 동서 식구들은 변함 없이 친절하게 해 주어 오늘의 내가 이렇게 나마 뭔가를 할 수 있게 한 터전이 되었다.
2003-09-07 일. 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