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은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도 싸하니 가슴을 쓸어 내리는 때가 있는 것처럼 오래 기억에 남아 추억이 된 책이나 영화가 있게 마련이다

아주 오래된 팝송 Patti Page의 I Went To Your Wedding을 듣다가, 영화 내 마음의 풍금에서 열 일곱 늦깎이 초등학생 홍연이 서울로 떠나가는 총각선생님 수하에게 LP판을 이별의 선물하는 끝부분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하근찬 님이 1981년에 쓴 원작소설 '여제자'를 각색하여 1960년대를 배경으로 총각선생님과 열 일곱 늦깎이 여제자의 애틋한 사랑과 시골마을의 이야기를 서정적으로 담은 영화이다.

강원도 어느 산골마을, 검정고무신에 손으로 짠 분홍빛 스웨터를 입은 늦깎이 초등학생 홍연은 소달구지를 타고 함께 마을로 들어오면서 길을 묻는 총각선생 수하에게 첫눈에 반해 짝사랑을 시작한다. 수업이 끝난 후, 교실 주변을 맴돌기도 하고 일기장에 사랑의 고백을 남기지만 수하는 대수롭지 않게 넘기고 연상의 양은희 선생에게만 늘 관심을 보인다,

수하와 양은희 선생이 함께 풍금을 치는 모습은 장난기 많은 아이들에게 화장실의 좋은 낙서 거리가 되고 수하는 양은희 선생에게 LP판을 선물하고,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들은 홍연은 생소한 이름인 엘피를 엘프로 중얼거리고, 다정하게 걸어가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 밤새 비를 맞기도 한다.

얼마 뒤 양은희는 서울의 약혼자를 따라 유학길에 오르고 수하는 아파하지만 홍연은 내심 기쁘다.

그러던 중 학예회 연습을 하던 아이들의 장난으로 강당에 불이 난다. 수하는 아이들을 구하려고 불 속으로 뛰어 들고 홍연도 한번도 고백해보지 못한 사랑인 수하를 보낼 수 없어 그의 뒤를 따라 불 속으로 뛰어든다. 그 후 봄방학이 시작되고 새 학기가 시작되기 직전 수하는 말 한마디 건네지 못한 홍연을 뒤로 한 채 학교를 떠난다.

60년대에 태어나 초등학교 1학년을 강원도 산골에서 다닌 내게는 낡은 초가집과 돌담길, 마을을 품에 안은 산골정경을 비롯한 영화 속의 모든 풍경들이 낯익은 모습들이다.

어머니의 손길, 낡은 곰 인형, 첫사랑의 일기장, 너무나 많이 턴테이블에 걸어 바늘이 자주 튀는 LP….

이러한 소품들은 팍팍하고 삭막해진 현대를 살면서 우리가 잃어가고 있는, 그리고 그와 동시에 인간적 진실함, 순수함, 따뜻함을 찾기에 충분하다.

삐거덕거리는 바닥에 왁스칠을 해야 하는 목조 건물의 교사, 아이들의 양은 도시락을 데우고, 층층이 쌓아 놓은 나무를 때는 연통이 달린 난로, 그리고 분필가루 날리는 칠판과 한쪽에 풍금이 놓여진 교실, 학교 교정이 내다보이는 미닫이로 된 교무실과 그 한편의 교장실, 아이들의 학예회가 열리는 강당, 발 딛고 올라서면 밖이 내다보이는 화장실 등등. 일상적이고 소박하지만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에서는 더 이상 볼 수 없는 것들로 마음 깊은 곳의 감성을 일깨워 주고 있다. .

아가씨라고 불러준 한마디에 열 일곱 소녀에서 여인으로 성숙해 가는 홍연의 모습, 서로 다른 사랑을 자잘한 모습으로 담은 장면들은 저절로 미소를 짓게 하고, 천진난만한 코흘리개 아이들의 모습도 정겹고 아름다운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총각선생님에 대한 홍연의 애틋한 첫사랑도, 눈감으면 아련하게 떠오르는 초등학교의 풍경도 이미 우리들 마음속의 시계를 어린 시절로 향하게 하고, 나의 마음속에서 울린 감동의 풍금소리는 아주 오랫동안 멈추지 않는다.

오늘같이 날이 흐리고 비가 와서 조금 우울한 날, 무심히 켠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실려 생각나는 영화가 있다면 다시 한번 보기를….

그리고 아주 오래 전에 보았던 잊지 못할 추억의 영화가 있다면, 올 여름 피서는 영화 속으로 떠나보자.

최명숙씨는 한국방송통신대를 졸업하고 1991년부터 한국뇌성마비복지회 홍보담당으로 근무하고 있다. 또한 시인으로 한국장애인문인협회회원으로 활동하고 있기도 하다. 1995년에 곰두리문학상 소설 부문 입상, 2000년 솟대문학 본상을 수상했으며 2002년 장애인의 날에 대통령 표창을 받기도 했다. 주요 저서로는 시집 '버리지 않아도 소유한 것은 절로 떠난다' 등 4권이 있다. 일상 가운데 만나는 뇌성마비친구들, 언론사 기자들, 우연히 스치는 사람 등 무수한 사람들, 이들과 엮어 가는 삶은 지나가면 기쁜 것이든 슬픈 것이든 모두가 아름다운 추억이 되어 남으니 만나는 사람마다 아름다운 사람으로 기억되길 바라고, 스스로도 아름답게 기억되는 사람이 되길 바라는 마음속에 기쁜 희망의 햇살을 담고 사는 게 그녀의 꿈이다. ■한국뇌성마비복지회 홈페이지 http://www.kscp.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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