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의 끝자락 짧은 여행길에서 돌아오는 길, 기차시간을 한시간 남짓 남겨두고 친구를 만났습니다. 친구와 역 근처의 산책로에서 이야기를 나누면서 다음 기차를 탈까하는 유혹도 없지는 않았지만 캔 커피 한 잔의 여유로움으로 충분했던 만남은 아쉬운 듯하면서도 즐거운 만남이었습니다.

친구는 11월은 마흔을 넘어선 우리의 나이 같다고 말했습니다.

열매를 맺어놓고 나뭇잎마저 반쯤 떨구고 있는 서 있는 나무는 친구의 말처럼 우리들의 자화상 같아 보였습니다. 이제 보여줄 것보다는 보여줄 수 없는 것이 더 많은 나이가 맞는지도 모릅니다.

바람불면 우수수 떨어지는 낙엽처럼 우리들의 시간도 그렇게 흘러가고 있는지 모릅니다. 내 안에 품었던 열정을 스스로 버린 아픈 기억으로, 혹은 미완성의 추억으로, 꼭 이루어야 할 꿈으로 아직 남아 우리를 부추기고 있는데 말입니다.

자취했던 이야기, 버스를 두 번이나 갈아타고 힘들게 학교 다닌 이야기, 캠퍼스 앞에서 친구와 함께 버스를 내려도 친구들은 강의시간 10분 먼저 도착하고 자기는 10분 지각이더라고 말하는 친구의 추억담을 듣고, 고등학교에 입학하여 첫 영어시간에 책을 읽으려고 일어난 내게 입 이상하게 벌리지 말고 앉으라고 한 영어선생님 말 한마디가 3년 내내 영어공부를 덮어버리게 했던 일이 떠올랐습니다.

남의 말에 노여움을 타지지 않았던 내게 젊은 영어선생님의 말 한마디가 뭐 그리 노여워서 순간을 참지 못했던 일은 지금도 "왜 그랬을까" 하는 후해로 가슴을 아리게 합니다. 그리고 가끔은 다시 돌아가서 바꿔놓고 싶어집니다.

시간이 좀더 있었다면 아줌마 수다도 떨고, 아직 가슴에서 살아 꿈틀거리는 꿈과 열정에 대한 이야기를 했을 것입니다. 영화를 좋아하는 친구와 오랜만에 영화이야기라도 더 나누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은 다음을 기약하게 했습니다.

기차에 오르는 내게 친구는 이제는 느슨하게 풀고 살아도 좋을 나이라고 말했습니다.

같은 영화를 함께 보아도 느끼는 감동이 다르듯이 각자의 생각과 사는 방법은 다릅니다. 원처럼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예상도 이해도 안 되는 모양을 만들며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렇게 사는 게 모범생으로 사는 것이라고, 이것이 바르게 사는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으나 십년 후의 내 모습을 그리며 최선을 다하면 될 것입니다.

시나리오 없는 하루 하루가 모여서 우리의 삶은 이루어지기에, 하루를 살아가는 동안 넘어서는 안 되는 스스로의 경계선, 삶의 지침을 하나쯤 세워놓고 살아야 합니다. 그것으로 인하여 잃어버리는 것도 많겠지만, 무엇이 소중한 지를 알게 되고, 함께 하는 사람들에게 감사할 뿐인 사랑 또한 그 소중함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추수를 끝낸 빈들만이 차창에 스쳐지나갑니다. 빈 차창 위로 아름다운 뉴욕의 가을을 한 폭의 수채화처럼 담아낸 영화 [뉴욕의 가을]에서 윌과 샬롯이 노란 낙엽 깔린 길 위를 나란히 걸어가는 장면을 엽서처럼 그려 넣었습니다. 그리고 그려진 창을 엽서 삼아 친구에게 잘 도착했다는 메모를 적어 마음의 엽서를 보냈습니다.

최명숙씨는 한국방송통신대를 졸업하고 1991년부터 한국뇌성마비복지회 홍보담당으로 근무하고 있다. 또한 시인으로 한국장애인문인협회회원으로 활동하고 있기도 하다. 1995년에 곰두리문학상 소설 부문 입상, 2000년 솟대문학 본상을 수상했으며 2002년 장애인의 날에 대통령 표창을 받기도 했다. 주요 저서로는 시집 '버리지 않아도 소유한 것은 절로 떠난다' 등 4권이 있다. 일상 가운데 만나는 뇌성마비친구들, 언론사 기자들, 우연히 스치는 사람 등 무수한 사람들, 이들과 엮어 가는 삶은 지나가면 기쁜 것이든 슬픈 것이든 모두가 아름다운 추억이 되어 남으니 만나는 사람마다 아름다운 사람으로 기억되길 바라고, 스스로도 아름답게 기억되는 사람이 되길 바라는 마음속에 기쁜 희망의 햇살을 담고 사는 게 그녀의 꿈이다. ■한국뇌성마비복지회 홈페이지 http://www.kscp.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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