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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발마녀전(3)

일그러진 자화상

에이블뉴스, 기사작성일 : 2003-02-03 13:0
"이담에 커서 엄마, 아버지랑 살자."

어릴적 수도 없이 이런 말을 들으며 자랐다. 언니들과 여동생이 언제나 "이 다음에 시집가면…"이라는 말을 들었던 것과 얼마나 대조가 되었던지…. 속으론 많이 반발했지만 드러내놓고 "왜 나만 부모님과 살아야 해요?"라고 표현하지는 못했다. 왠지 그러면 안 되는 분위기가 늘 감지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면서 '난 결혼할 수 없겠구나' 하는 막연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가끔 동화를 읽거나 드라마 또는 영화를 보고 나서 내게도 사랑이 찾아오는 꿈을 꾸어보기는 했었다. 하지만 꿈속에서 나는 언제나 비련의 여
주인공이었다. 꿈속에는 너무도 아름다운 처녀로 성장하여 피아니스트 또는 화가가 되어 있는 내게 프로포즈하는 멋진 남자가 있다. 그는 언제나 비장애인이었으며, 냉담한 나에게 끊임없이 구애를 한다. 나는 그에게 마음이 끌려 서로 사랑하다가 끝내는 상대의 마음이 변하고 말아 사무치는 이별의 아픔을 느끼는 비련의 여주인공이거나 기껏해야 끝끝내 상대의 마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서로의 행복을 위해 눈물을 흘리며 이별을 감수하는 순애보의 주인공이 고작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도 유치찬란하지만, 나만 유독 소녀적인 취향이 강해서 그렇게 비련의 여주인공을 꿈꾸었다고는 여기지 않는다. 장애여성은, 어릴 적에는 부모, 어른이 되어서는 남편 혹은 시설 등 누군가에게 의탁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로 치부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나 역시 고스란히 내면화했다고 생각한다. 장애여성은 미적 기준으로 보나 신체적 조건으로 보나 아내, 엄마의 역할을 수행해낼 수 없다고 여겨 여성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장애여성이면서도 꿈속의 왕자가 장애인이 아니었던 이유는 아마도 나 역시 정상성을 기준으로 한 사회적 가치를 어느 사이 받아들인 탓이리라. 장애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비장애의 상태를 동경하게 만드는 폭력적인 세상이여! 꿈이야기가 나온 김에-- 그 꿈과 이 꿈은 성질이 좀 다르긴 하지만 -- 하나 더 고백하자면 난 한번도 내 꿈 속에서 목발을 짚고 등장한 적이 없다. 장애를 가졌거나 그렇지 않거나 내 몸은 있는 그대로 소중하다는 것을 그때는 미처 깨닫지 못했었다.

아버지는 장애딸을 둔 죄(?)로 돈을 아주 많이 벌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렸던 듯하다. 겉으로는 '엄마, 아빠와 평생 같이 살자'고 하면서도 당신들은 언젠가 세상을 떠나야 할 운명임을 잘 알고 있었던 탓에 한재산 장만해서 괜찮은 놈팽이에게 나를 떠맡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 세상에 놈팽이는 많지만 괜찮은 놈팽이-- 이런 구도 자체에 평등하지 못한 관계가 예정되어 있다 -- 는 없기에 아버지가 일찌감치 사업에 실패해 괜찮은 놈팽이를 찾을 여유조차 없이 힘겨운 말년을 보낸 것이 내게는 다행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엄마는 나를 무조건 보호만 하지는 않았다. 결혼 대신 독립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고 늘 강조했다. 그래서 많이 배워야 하고, 남들 할 수 있는 모든 걸 잘해내야 한다고 채근했다. 공부, 예능, 친구관계는 물론이요, 집안일까지도 난 장애가 없는 언니들처럼 해내야 했다. 마당 청소처럼 내가 못하는 일은 다른 형제들 몫이었고 대신 앉아서도 할 수 있는 일은 언제나 내게 맡겨졌다. 마늘까기와 찧기, 나물 다듬기, 밀가루 반죽, 만두와 송편 빚기, 부침개 부치기 등등 보통 할머니들이나 하는 일이 내 차지가 되었고, 엄마의 어깨와 다리를 주무르는 일도 내 몫으로 떨어졌다. 물론 내가 이렇게 주어진 역할에 순응만 했던 건 아니다. 하지만 착한여자 콤플렉스에서 벗어나기까지 너무 긴 시간이 흘러야만 했다. 장애여성이 착한여자이기를 거부하려면 몇 배의 용기와 노력이 필요하다. 내가 내 인생, 또는 내게 일그러진 자화상을 강요하는 사회에 저항해서 어떻게 반란을 일으켰는지는 다음에 또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것 같다.

아무튼 다른 형제들은 동네 친구들과 뛰어놀기 바빠 엄마의 시야에서 멀어져있던 반면 나는 행동반경이 좁은 탓에 엄마 곁을 맴돌면서 엄마의 말동무가 되어주다 보니 어린 나이에 애늙은이가 되어 있었다. 우리 집안 대소사는 물론이요 동네에서 일어나는 일까지 소상하게 알게 되었다. 초등학교 다닐 무렵 엄마, 아빠가 기억해내지 못하는 이웃집 아저씨의 이름을 대서 가족들을 놀라게 했던 결코 자랑스럽지 못한 -- 아이는 아이다워야 한다는 게 내 지론이다 -- 경험이 있을 정도였다. 엄마와 동네아주머니들은 모였다 하면 남편 흉, 시집 식구들 흉을 보면서 남자들은 모두 저만 아는 이기적인 동물이라느니, 남자 잘못 만나 신세 망쳤다느니 푸념을 했다. 그걸 고스란히 들으면서 한창 뛰어놀아야 할 어린 나이에 너무 일찍, 그것도 관념적으로 어른들의 세계를 알아버린 것이 훗날 내가 부정적인 남성상, 결혼관을 갖게 만드는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장애가 있다는 이유로 한정된 세계만을 경험하게 하는 것은 의도적 배제이자 폭력이며, 명백한 차별이다.

난 대체로 내게 주어진 역할을 충실히 해냄으로써 내 존재를 증명해냈던 듯하다. 아니, 역할이 없으면 나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 존재였다. 누가 뭐라 하지 않는데도 나는 살아있음을 증명하기 위해 매순간 역할을 찾아내려고 안절부절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어떤 장소나 어느 모임에 가서든 내 역할이 없으면 어쩐지 불안하고 스스로가 한심하게 여겨지는 자신을 발견하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서른 초반 무렵의 일로 기억된다. 여고 동창 모임이 있었는데, 맛있는 식사를 하고 후식까지 다 먹고 단 뒤에 모두들 편안한 자세로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때 불안해진 내가 슬그머니 일어나 설거지를 시작했더니 친구들이 모두 한 마디씩 했다.

"매일 하는 설거지, 좀 뒀다 하려고 했더니…."
"멀쩡한 우리들은 가만히 있는데, 너도 참 어지간하다."
"그냥, 불안해서…."

내 살림도 아니고 남의 살림인데 설거지쯤 밀렸기로니 불안해할 이유가 없는데, 나는 왜 이 모양일까 곰곰 생각해보니 역할 없이는 무리들 속에 자연스럽게 섞이지 못하는 습성 탓이라는 결론이 나왔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때로 역할이 있거나 없거나 매사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텐데…. 나는 매순간 조그맣게라도 어떤 역할이 없으면 스스로 아무것도 아니라는 의식 속에 살아오면서 스스로를 부정해왔던 것이나 다름없음을 알게 되었다. 그 뒤부터 사회가 내게 강요해온 굴레, 나 스스로 강제해온 굴레로부터 한없이 자유로워지는 새로운 꿈을 꾸게 되었다.


김효진 (a848@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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