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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발마녀전(4)

외로움

에이블뉴스, 기사작성일 : 2003-02-13 11:4
중학생이 되기 전까지 난 그리 활동이 자유롭지 못했다. 목발을 짚어도 걸음걸이가 서툴러서 대부분의 시간을 집안에서 보내야 했다. 친구들과 고무줄놀이--언제나 깍두기였다--도 하고 우리집 담벼락 앞에서 소꿉놀이도 했지만, 많은 시간 동화책, 만화책을 읽거나 인형놀이, 공기놀이를 하며 지냈다. 친구들이 자주 놀러와주었지만 그애들도 한창 뛰놀기 좋아할 나이에 나하고만 놀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게 외로움이었던가 싶을 만큼 적막했던 순간들이 꽤 많았다.

난 순정만화와 추리소설을 좋아했다. 혼자 있을 땐 종이인형 놀이를 즐겼다. 두꺼운 도화지에 알록달록 그려진 종이인형을 사다가 정성껏 오려 옷장도 만들어주고 옷도 만들어입히곤 했다. 초등학교 5-6학년 무렵엔 우리집에 세들어 살고 있는 새댁아줌마 덕분에 그럴듯한 헝겊인형을 가질 수 있었다. 시골에서 갓 시집온 새댁아줌마가 바느질 솜씨가 좋았던 탓에 헝겊인형을 만들어서는 검정 실로 머리도 만들어 붙여주고 한복도 만들어 입혀주었던 것이다. 게다가 색동이불과 베개까지 만들어주었기에 나는 요즘 아이들이 갖고 있는 '미미의 집' 부럽지 않게 한살림(?) 장만할 수 있었다. 새댁아줌마는 아마도 다른 아이들과는 달리 집안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내가 안쓰러워서 특별히 나를 배려했던 듯하다. 새댁아줌마 곁에서 인형 만드는 과정을 눈여겨보아 두었던 나는 할머니를 졸라 오색 헝겊을 얻어가지고 직접 인형 옷을 만들어 입혔다. 새댁아줌마의 솜씨와는 비교도 안 되었지만 얼추 흉내는 내었던 듯하다.

만화는 보는 데만 만족하지 않고 직접 그려보기도 했다. 순정만화의 주인공이 내 만화의 단골 주인공이었지만 김삼이란 만화가가 그린 007 만화도 무척 좋아해서 그의 만화를 비슷하게 옮겨 그리는 연습을 하기도 했다. 한때는 이 다음에 커서 만화가가 되어야 할지 추리소설 작가가 되어야 할지 고민을 한 적도 있었다.

어른들은 집안에서 혼자 곧잘 놀기도 하고 꽤 학구열도 있어 보이는 나를 보고 격려를 잊지 않았다.
"그래, 다리가 불편해도 앉아서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든지 있단다."
"바느질을 곧잘 하는구나, 이 다음에 커서 자수를 하거나 한복점을 내면 되겠네!"

조금 자라서 기대치가 좀 높아지고 난 뒤에는 꼭 한의사나 약사가 되라는 말들을 했다. 나는 다른 아이들처럼 주변 사람들에게 "이 다음에 커서 뭐가 될래?"라는 흔한 질문을 별로 들어본 기억이 없다. 그저 학교에서 학년초에 가정조사표를 작성해오라는 과제를 받았을 때 의무적으로 소설가나 만화가라고 써냈을 뿐이다. 어른들은 내가 무얼 잘하는지 무얼 좋아하는지 잘 알아보려고 하지 않고 단지 장애라는 조건만을 앞세워 약사를 하는 게 좋겠다, 한복점을 하면 돈 많이 벌 수 있다며 앞질러갔던 것이다.

한동안 난 당연히 이 다음에 커서 앉아서 하는 일에 종사해야 한다고 여겼었다. 그런데 동네 약국을 유심히 관찰해보니 앉아있기는커녕 하루 종일 일어났다 앉았다 하는 품이 구멍가게 아줌마만큼 노동강도가 세어보였다. 하루종일 약국을 지키려면 꽤 답답하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약국은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한복이나 자수는 더더욱 아니었다. 인형놀이를 좋아하기는 했지만 그건 놀이였기 때문이었지 하루종일 혼자서 바느질하는 것을 직업으로 삼는 것과는 다른 문제였다. 난 장애에도 불구하고 고립되길 결코 원치 않았으며 세상 밖으로 나가 마음껏 날개를 펴고 싶었다. 더구나 아무리 돈을 많이 벌 수 있다고 해도 한의사라는 직업 역시 왠지 나와 어울릴 것 같지 않았다. 나는 산수와 과학에 통 흥미가 없었기에 의사가 되기에는 자질이 없었던 것이다.

무엇보다 난 장애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 격리되어 고립된 채로 묵묵히 혼자서만 일해야 하는 상황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듯하다. 훌륭한 사람이 아니더라도, 돈을 많이 벌지 못하더라도 많은 사람들 속에 섞여 울고 웃으며, 때론 싸우기도 하면서 역동적인 삶을 살고 싶었다. 혼자서는 너무 외롭다는 사실을 어린 나이에 이미 알아버렸기 때문이었는지 모르겠다.

김효진 (a848@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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