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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발마녀전(5)

등과 가슴 사이

에이블뉴스, 기사작성일 : 2003-03-22 1:01
 어렸을 적 어머니, 형제들과 함께 찍은 사진. 에이블포토로 보기 어렸을 적 어머니, 형제들과 함께 찍은 사진.
엄마의 등은 따뜻했다. 그러나 엄마의 등은 너무 가냘퍼서 금방이라도 피식 쓰러질 것만 같아 불안했다. 나는 무척 작은 아이였지만 누군가의 등에 업힐 나이는 훌쩍 지나버렸기에 엄마는 나를 업을 때마다 꽤나 힘들어했다.

언제부터인가 엄마가 업자고 해도 괜찮다며 내쪽에서 피하게 되었다. 한번도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등과 가슴이 맞닿으면 상대방의 느낌이 너무도 잘 전달되기 때문에 난 엄마가 나를 업기에는 힘이 부친다는 것, 나를 등에 업고 장애딸을 둔 자신의 불행을 되새기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다른 어른의 등에 업혀도 마찬가지였다. 가끔씩 내가 목발을 짚고 힘겹게 걷는 모습을 본 주변 사람들이 업어주겠다고 자청하는 경우가 있었다. 나는 누군가의 등에 업힐 때 상대방과 조금치의 거리도 없이 밀착되는 상황에 처하는 것이 그리 달갑지 않았다. 그리고 상대방의 등에 가슴을 맞대고 상대방이 나 때문에 힘들어하고 있음을 고스란히 느껴야 하는 것도 썩 유쾌한 경험은 아니었다.

내가 '괜찮아요'라고 말해도 사람들은 그걸 거절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저 부끄러워서 그러는 줄로 여겼다. 아니 장애를 가진 나는 처음부터 그들의 제의를 거절할 자격이 없는 것처럼 행동했다. 결국 나는 억지로 그들의 등에 업혀서 이 사람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지 않는 내가 혹시 착한 아이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자책에 빠지곤 했다.

아버지의 등은 달랐다. 넓적하고 탄탄해서 편안하고 듬직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언제나 바빴다. 밖으로만 돌던 아버지가 일 년에 한 두번씩 가족들을 위로하는 기회를 마련할 때에야(이것도 거의 엄마의 강요 때문이었지만) 비로소 나는 학교와(학교에 다닐 수 있는 것도 중증장애인에 비하면 대단한 혜택임을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집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날 수 있었다.

집안형편이 그나마 좋았던 초등학교 때 나는 팔당유원지, 속리산, 용문사, 대천해수욕장 등에 가보았다(그러고보니 어린시절 꽤나 호사한 셈이다). 그러나 그때만해도 나는 보행이 자유롭지 못했기 때문에 누군가의 등에 업혀야 했고, 그런 이유로 여행이 그리 즐겁지 못했다. 아버지의 넓고 탄탄한 등도 길고 험난한(그땐 정말 그랬다) 여행지를 커버할 수는 없었다. 난 힘들어하는 아버지가 안쓰러워 언제나 얼른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만 간절했다.

처음 장애운동을 시작할 무렵 나는 휠체어도 스스로 작동할 수 없을 만큼 중증인 장애인이 그런 조건 때문에 마흔이 가깝도록 일상에서 조금도 자기결정권을 누릴 수 없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충격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는 누군가의 등에 업혀 학교에 다녀야 했는데, 매사를 자신을 돌보아주는 사람의 일정과 스타일에 맞추어야 했기에 작은 선택도 할 수 없었다고 했다.

가령 자신을 집에다 데려다주고 돌아가야 할 개호인이 있기에 수업을 마치고 친구와 시간을 보내거나 도서관에서 느긋하게 책을 보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다는 것이다. 심지어 대학시절 마음에 드는 여학생이 있었지만 개호인의 일정 때문에 한번도 마음놓고 데이트를 즐긴 적이 없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는 마흔 살이 될 무렵 미국에서 처음으로 전동휠체어를 장만하고는 기쁨을 주체할 수 없었노라고 고백했다. 남의 등에 업혀서 다니는 것과 전동휠체어를 손수 작동하면서 다니는 것에는 가히 혁명적인 차이가 존재할 것임에 틀림없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전동휠체어를 갖게 된 그때 그의 심정이 절절하게 전해져오는 느낌을 받았다. 내가 남의 등에 업혀서 조금도 편안하지 않았던 심정과는 비교도 안될 테지만...

사람들은 흔히 무조건 도와주기만 하면 우리들 장애인에게 당연히 도움이 될 것으로 믿거나 무조건 고마워할 줄 아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그건 잘못된 생각이다. 도움은 반드시 필요하지만(장애인뿐 아니라 세상 모든 사람들은 서로 돕고 산다) 어떤 도움은 불필요하거나 심지어 해를 끼치기까지 한다.

가령 내 경우 버스에 올라탈 때 누군가가 도와주기 위해 양 겨드랑이나 허리를 잡아주려고 하는데, 그건 오히려 버스에 올라타지 못하도록 방해만 될 뿐이다. 따라서 남자들의 그런 도움이 고마울 리 없으며 여성으로서 수치심까지 느끼게 만들곤 한다. 그들의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야 소중하지만, 먼저 내게 도와줘도 좋은지 물어보고, 내가 괜찮다고 하면 도와주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장애인들은 착한 사람들의 도움에 의지하기보다 전동휠체어를 타고 버스나 지하철을 타고 마음껏 세상밖으로 나가고 싶어한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김효진 (a848@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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