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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발마녀전(6)

무섬증

에이블뉴스, 기사작성일 : 2003-03-31 13:3
한참을 잤나 보다. 나는 안방에 홀로 누워 있다. 건넌방에서 엄마와 언니들의 웃음소리가 들린다. 나만 빼고 모두 행복해보인다. 아까는 아무도 없었는데…. 모두들 어디론가 나가버리고 나 혼자서 동화책을 보다 잠이 들어버렸던 것이다.

일어나 엄마와 언니들이 있는 곳으로 가야겠다고 마음먹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갑자기 무서워진다. 덩그러니 커다란 방안에 나 혼자인 것이다. 방안에 있는 모든 사물들이 낯설어진다. 동그란 시계, 매일매일 찢게 되어있는 달력, 화장대에 달려 있는 커다란 거울….

거울 속에서 누군가 나를 쳐다보고 있는 것만 같다. 그리고 '뚝' 하는 소리…. 화장대 서랍에서 간헐적으로 들려온다. 뚝, 뚝, 뚝 하는 소리…. 누군가 화장대 서랍 안에서 가느다란 소리로, '나 여기 있어요' 하고 말하는 듯하다. 답답하다. 내가 화장대 서랍 안에 갇힌 것처럼…. 나는 손 하나 까딱하지 못하는 상태로 극도의 공포에 시달린다.

"엄마."

울음 섞인 목소리로 가만히 불러본다. 그러나 입안에서만 맴돌 뿐 목소리가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여러번 시도하지만 마찬가지이다. 무섭다. 이대로 나 혼자서 죽어갈 것만 같다. 눈물이 쏟아진다. 점점 설움이 복받쳐 소리내어 엉엉 운다. 어! 소리가 나오네! 이제 살았다! 내 울음소리를 듣고 엄마와 언니들이 달려온다.

"왜 그래? 무서운 꿈 꿨니?"

나는 그냥 울기만 한다. 모두들 내가 무서운 꿈을 꾼 줄 안다. 내가 무서운 꿈보다 혼자라는 사실을 더 무서워하는 줄 아무도 모른다.

나는 유독 무섬증이 심했다. 지금 생각하면 아마도 그게 혼자서는 어찌할 수 없는 여러 상황들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어찌 됐든 나는 낮에도 밤에도 늘 무서웠다. 심지어 나는 초등학교를 졸업하도록 화장실에도 혼자 가지 못했다. 시골 화장실처럼 옥외에 있는 무서운 화장실도 아니었는데 화장실에 가면 온갖 무서운 이야기들이 생각나고 사방에서 나를 지켜보는 눈이 있는 것 같아 볼일을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내 밑의 여동생은 나보다 두 살이 어리지만 꽤 씩씩했다. 아마도 장애가 있는 언니의 그늘에 가려져 주목을 받지 못하면서 자라다보니 일찌감치 독립심이 길러졌던 모양이다. 나는 화장실에 갈 때마다 동생에게 같이 가달라고 했고, 동생은 대체로 내 곤혹스런 부탁을 잘 들어주었다. 가끔 동생이 놀러 나가고 없을 땐 언니들이 가주기도 했다. 동생은 참 착했다. 냄새나는 화장실 문을 조금 열어두고 언제나 나를 기다려주었다.

"언니, 멀었어?"
"응, 조금만…."

나는 동생이 지루해할까 봐 이 얘기 저 얘기 수다를 떨곤 했다. 동생도 지루함을 덜려고 친구들 얘기며 학교에서 일어난 이야기 등 곧잘 수다를 떨었다. 어느 날 동생이 물었다.

"언니, 언니는 엄마가 좋아?"
"그럼, 좋지. 우리 엄만데…."

나는 그런 질문을 하는 동생이 이상했다. 엄마는 언제나 우리에게 절대적 사랑을 퍼붓는 존재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내게는 무조건의 사랑을 주시는 분이기에 나는 엄마를 싫어할 수 있다고 한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면서도 나는 이제까지 막연히 가져왔던 믿음이 흔들리는 느낌이었다. '과연 나는 엄마를 좋아하고 있는 걸까?'

사실 우리 엄마는 예민하고 엄격한 분이라 아이들에게 다정다감한 편은 아니었다. 내게 엄마는 존경할 만한 분, 훌륭한 분, 내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이기는 했지만 내가 마음 속 깊이 엄마를 좋아하고 있었는지 생각해보니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긴 했다. 좋아하는 것과 존경하는 것은 다르니까….

"너는?"
"난, 엄마가 조금 싫어."

충격이었다. 감히 엄마가 싫다고 말할 수 있다니…. 그리고 곧 마음이 저미는 것처럼 아파왔다. 엄마는 나와 동생을 다르게 대했다. 동생은 언제나 엄마한테 꾸중을 들었다. 동생이 꼭 잘못해서만은 아니었다. 위로는 장애가 있는 언니, 아래로는 우리 집안 대를 이을 유일한 아들인 남동생 사이에서 동생은 엄마의 화풀이 대상이었던 셈이다. 나는 동생이 야단맞을 때마다 그 애가 나 대신 꾸중을 듣고 있는 것 같아 맘이 편치 않았다. 그래서 내 딴에는 동생을 위한답시고 쫓아다니며 잔소리를 했다.

"야, 얼른 집으로 가자. 엄마한테 혼나겠어."
"숙제 좀 빨리 해. 그래야 엄마가 화 안내지."

동생은 애늙은이인 언니가 얼마나 지겨웠을까? 난 맘씨 고운 언니도 아니었다. 화장실에 같이 가달라, 가게에서 사탕 좀 사다달라, 친구 집에서 책 좀 대신 빌려와 달라 등등 온갖 심부름을 시켜대면서 동생을 괴롭혔다. 내가 동생을 하녀처럼 부릴 수 있었던 건 순전히 엄마의 권력 덕분이었다. 엄마가 알게 모르게 장애가 있는 언니를 위해 착한 동생이 되어야 한다고 강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생도 만만치 않았다.

동생은 아무리 엄마한테 야단을 맞아도, 나한테 잔소리를 들어도 친구들과 어울려 어두워질 때까지 밖으로만 돌았다. 동생은 이미 내 권한 밖이었고, 난 서서히 동생에게도 자신만의 영역이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고학년이 되면서 활동범위가 조금씩 늘어나기 시작하자 나한테도 하나둘 친구들이 생겼으며, 혼자 지내는 데도 제법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화장실만큼은 혼자서 해결하기까지는 좀더 시간이 걸렸지만….

나는 지금도 막내딸로 태어나서 장애가 있는 언니의 그늘에 가려 엄마의 사랑을 제대로 받아보지 못하고 자란 여동생에게 미안하다. 하지만 우리 가족 중 누구도 여동생만큼 장애여성으로 살아가야 하는 내 아픔과 슬픔을 잘 이해해주는 사람은 없다. 어린 시절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장애가 있는 언니의 삶에 밀착해있었으며, 서른 둘에 결혼하기까지 나와 함께 살았기 때문이겠지만, 무엇보다 그녀의 심성이 곱고도 맑은 탓이라고 나는 믿는다.

김효진 (a848@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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