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초가집에서 태어났다. 호박밭도 있고 우물도 있고 대추나무도 있는…. 지금은 서울의 중심가로 변했지만 그때 내가 살던 동네에는 초가집이 꽤 많았다. 초등학교 1-2학년 무렵 초가집은 근사한 현대식 가옥으로 바뀌었다. 마루도 넓직하고 방도 네 개나 되며, 목욕탕에다 실내 화장실(재래식이었지만)까지 갖춘 근사한 집이었다.

그 집 안방과 부엌 사이에 작은 창이 하나 있었다. 현대식이라고는 하지만 여전히 부엌이 마루나 방의 높이보다 낮은 곳에 있어서 밥상을 차려 방으로 갖고 들어오기가 여간 고역이 아니었는데, 그 작은 창이 불편함을 많이 덜어주었다.

나는 식사 때마다 그 창을 통해 국그릇이나 반찬그릇이 전해지는 게 신기했다. '오늘은 무슨 반찬일까?' 궁금해하며 작은 창문을 열고 분주한 엄마의 손을 쳐다보는 것은 색다른 재미였다. 창문을 통해 음식 냄새를 맡다 보면 언제나 참을 수 없을 만큼 배가 고파지곤 했다.

"자, 다 되었다!"

엄마가 음식이 담긴 그릇을 창문에 달린 선반 위에 올려놓으면 누군가 그것을 밥상으로 옮기기만 하면 되었다. 나는 무슨 반찬일까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어 그 그릇들을 좀더 가까이에서 들여다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엄마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넌, 저리 비켜! 뜨거운 국그릇을 들러엎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러니?"

"왜 그렇게 걸리적거리는 거냐? 밥상머리에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지 않구?"

예나 지금이나 난 얌전하거나 찬찬한 것과는 거리가 있는 아이였다. 실제로 국그릇인지 반찬그릇인지를 내가 옮기겠다고 나섰다가 들러엎은 적도 있었다.

"그러게 내가 뭐랬니? 가만히 좀 있으라니까!"

거듭 엄마에게 야단을 맞고 나서 식사 때 설치던 버릇은 없어졌다. 그렇다고 갑자기 얌전한 아이로 변한 것은 아니고, 아마도 관심이 다른 곳으로 옮겨졌으리라.

목발을 짚어도 걸음걸이가 서툴렀던 내 무릎은 언제나 상처투성이였다.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에 다치고 또 다치고... 그런 나를 바라보며 엄마의 가슴은 거듭 무너져내렸다.

"또 넘어졌어? 그러게 집에 있으라니까…."

나를 데리고 나들이를 다녀오고 나면 다른 아이들보다 몇 배 신경을 곤두세우며 나를 지켜야 했던 엄마는 늘 파김치가 되곤 했다. 지나가는 자전거나 자동차를 미처 피하지 못해 다치지나 않을까 보통 엄마보다 몇 배는 고심해야 했으며, 신기한 듯 목발 짚은 나와 엄마를 힐끗거리는 사람들의 시선을 애써 외면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나 어릴 적만 해도 아이의 장애는 부모가 전생에 지은 죄 때문이라는 얼토당토 않은 편견이 팽배했었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엄마는 되도록 내가 소풍이나 나들이에 나서지 않기를 바랐다.

"넌 집에 있는 게 낫지?"

집에 있으라는 뜻인 줄 뻔히 알면서 나도 같이 가겠다고 고집피울 수는 없었다.

"넌 소풍 안가고 집에서 엄마랑 있는 게 낫지? 많이 걸어야 하고 얼마나 힘드니? 엄마가 맛있는 거 사줄게."

장애가 없는 친구들과 어느 정도 보조를 맞추려면 아무리 엄마와 동행한다고 해도 소풍은 사실 내게 힘겨웠다. 담임선생님도 내가 따라나서면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을 수 없기에 나로선 눈치가 보이는 일이기도 했다. 나 어릴 적만 해도 보통 한반이 70명이 넘는 과밀학급이었기 때문에 평소에도 선생님의 부담은 이만저만 큰 것이 아니었다.

아마도 엄마는 내가 선생님이나 친구들에게 짐이 될까봐 포기하는 쪽이 낫다고 판단하셨던 듯하다. 나는 내가 양보만 하면 모두를 편안하게 해주는 길이라고 생각해 초등학교 내내 거의 소풍이나 운동회를 포기했었다. 한두 번의 예외는 특별했던 선생님 덕분에 가능했다. 좀 신경을 쓰이더라도 감수하고 나를 꼭 소풍에 데려가고 싶다는 선생님의 요청이 있을 경우 소풍을 따라나설 수 있었던 것이다.

참 이상했다. 가만히 집에만 있으면 아무 문제가 생기지 않는데, 어디론가 움직여야 할 일이 생기기만 하면 내 의사와는 관계없이 갑자기 뭔가 복잡하게 꼬이는 듯하고 내 주변 사람들 모두에게 부담을 주는 골치 아픈 존재가 되곤 했다. 그래서 나는 차라리 움직이지 않는 쪽을 택했다.

마치 처음부터 활동적이기보다 가만히 있는 것을 좋아하는 얌전한 아이인 것처럼…. 하지만 겉으로만 그랬을 뿐 난 조금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가만히 있기에는 세상에 신기한 것도 많고 재미있는 일도 많았기 때문이다. 나는 닥치는 대로 책을 읽으며 무한하게 세상 밖으로 관심과 호기심의 대상을 넓혀나갔다.

김효진씨는 현재 한국장애인연맹 기획실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녀는 지체 3급의 장애여성이다. 그녀는 자신을 '자기결정권'이라는 한마디 때문에 깨달음을 얻은 바 있어 DPI에 입문한 대책없는 센티멘탈리스트라고 소개했다. 또 그녀는 섹시하지 않다느니 의존적이라느니 무능력하다느니 하는 허위의식을 유포해 장애여성을 화형(?)시켜버리는 폭력적인 세상에 도전하는 백발마녀(일명 흰머리소녀)라고 덧붙였다. 그녀의 특기는 독설이며, 특히 편두통이 심할 때는 굉장한 마녀로도 변신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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