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별명은 '떼부'였다. 떼를 잘 써서가 아니라 내가 어릴적 '포도'를 '떼부'라 했기 때문에 식구들이 포도와는 아무 연관성 없어 보이는 '떼부'라는 말의 어감이 재미있어 나를 가리켜 그렇게 불렀다. 여름철에 아버지가 포도를 잔뜩(식구가 많았기에) 사오셔서는 "자, 우리 떼부, 떼부 먹어라!" 하셨던 장면이 지금도 눈앞에 생생하다.

다른 형제들도 물론이지만 나는 아버지 사랑을 듬뿍 받았다. 아버진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까지 나를 당신 무릎에 앉히곤 볼과 손을 어루만지거나 거친 수염을 내 볼에 들이대며 내가 인상을 찌푸리는 모습을 재미있어 하셨다. 아버지 앞에서 나는 영원히 자라지 않는 어린아이로 남아 있었다.

가족들 말고 학교나 동네 아이들에게는 유난히 튀어나오고 널찍한 내 '짱구이마'가 꽤나 놀림거리였다. 아이들은 남자도 아닌 여자아이 이마가 왜 그렇게 넓고 튀어나왔냐며 이마가 넓으면 팔자가 세다나 어쩐다나 하는 어른들의 말을 전하며 내 짱구이마를 흉보았다.

'짱구'라는 별명도 모자라 심지어 '대머리'라고 놀리는 남자아이들도 있었다. 정말 커서 어른이 되어 대머리가 되면 어쩌나 싶어 집에 가서 이르면 언니들이 여자 대머리는 없으니 걱정 말라며 나를 안심시켰다.

나한테 이마는 늘 부끄러움의 대상이었다. 그래도 이마를 가리고 다닐 수는 없었다. 이마가 튀어나왔기 때문에 앞머리를 내리면 이마가 더 넓어보일 뿐 아니라 골치가 지끈지끈 아프곤 했다. 나중에는 에라 모르겠다, 흉볼 테면 봐라 하는 심정으로 내놓고 다녔다.

그런데 정말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내가 어른이 되었을 무렵 세태가 바뀌어 너도나도 널찍한 이마를 선호하게 되는 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여자들이 저마다 조금이라도 넓은 이마를 만들어보려고 이마와 머리 사이 잔털을 뽑아내기에 혈안이 될 지경이었으니….

어느덧 내 이마는 흉이 아니라 자랑으로 바뀌어 있었다. '어머, 어쩜 그렇게 이마가 예쁘니? 부럽다, 얘.' 이런 소리를 듣게 되는 순간이 올 줄이야. 여자는 이마가 좁아야 하고, 남자는 훤해야 한다는 남녀의 구분 자체가 없어지게 된 탓이었다.

덧니도 창피했다. 유난히 겁이 많았던 탓에 나는 이빨 빼는 일이 무엇보다 두려웠다. 그래서 부모님께 이가 흔들린다는 얘기를 하지 않고 숨긴 탓에 나중에는 이가 저절로 빠질 만큼 시간이 지나고야 말았다.

덕분에 아프지 않고 이빨을 뺄 수는 있었지만 이가 들쭉날쭉하게 자리를 잡은 것이 문제였다. 엄마가 뒤늦게 이 사실을 알고 야단을 쳤지만 후회해 봤자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덧니쯤 있기로서니 대수인가 싶은 마음이 더 컸다.

정작 나 자신은 덧니가 그리 밉지 않았기에 별 문제로 여기지 않았건만 주변의 반응은 달랐다. '여자애가 이빨이 왜 그 모양이냐' '엄마는 뭐했길래 이렇게 덧니가 나게 내버려두었단 말이냐' '아니, 아이를 병신으로 만들어놓고도 모자라 덧니까지?' '그러면 그렇지. 아이가 잘못되는 건 모두 엄마 탓이라니까' 이런 반응들이었다. 졸지에 우리 엄마는 자녀에게 무관심한 엄마가 되고 말았다.

모두 내 잘못이었다. 사태가 이렇게 두고두고 심각할 줄은 몰랐다. 하지만 두고두고 우리 부모를 욕 먹였던 내 덧니도 어느덧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져갔다. 그리고 굳이 감추어야 할 흉(감출 수도 없었지만)이라기보다는 나를 구성하는 요소 중 하나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다.

내가 이렇듯 초연할 수 있었던 이유는 세월이 흐르고 바뀌어, 일본에서는 덧니가 매력 포인트 중 하나 라더라, 일부러 덧니를 만들어서 귀엽게 보이려는 연예인도 있다더라, 하면서 가지런한 이만을 칭송하던 분위기가 달라진 것과도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나한테 또 하나의 콤플렉스는 못생긴 발가락이었다. 오른쪽 마비가 된 다리의 네 번째 발가락이 유난히 작고 찌그러져 있는 것이다. 그 발가락 역시 내 스스로 못견뎌 하기 보다는 주변 분위기 탓이 컸다.

특히 우리 큰언니가 넷째 발가락을 자꾸만 놀림거리로 삼았다. 악의가 있어서는 아니고 나에 대한 친근함의 표시로 내 신체 일부분에 대해 관심을 보인 것이었건만 어린 마음에는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다.

큰언니는 자주 내 발가락을 건드리며, "야, 이 발가락은 어쩌면 이렇게 못생겼냐? 참 희한하게도 생겼다, 그치?" 하였다. 내가 얼굴을 찡그리며 "왜 그래? 건드리지 마."라면서 싫은 내색을 하여도 언니는 이내 그만두는 법이 없었다. 내 발가락을 건드리고, 만져보고, 툭툭 쳐보기도 하면서 신기해했다.

그러다 급기야 내 분노가 폭발하고야 만 사건이 일어났다. 아마도 여름방학으로 기억되는데, 온 식구가 팔당인가 어디로 물놀이를 가고 큰언니와 나만 남았었다. 당시 중학생이었던 큰언니는 식구들과 함께 나들이하기보다 혼자 있는 시간을 즐길 나이였기에 집에 남겠다고 자청하였지만 나는 사정이 달랐다. 식구들과 함께 나들이를 하고 싶었지만 따라나설 분위기가 아니어서 뒤쳐졌던 것이다.

기분도 그렇지 않고 해서 낮잠을 실컷 잤었나 보다. 발치에서 큰언니의 기척이 느껴졌다. 언니는 모처럼 둘만의 호젓한 분위기도 있고 해서 장난기가 발동했었나 보다. 또 내 발가락을 건드리며 장난을 거는 게 아닌가? 가뜩이나 좋지 않았던 기분이 엉망이 되는 순간이었다. 나는 그만 소리내어 엉엉 울어버리고 말았다.

언니는 뜻밖의 반응에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했다. '미안해. 놀리는 거 아니야.' 언니가 사과를 하며 달랬지만 원래 울음 끝이 긴 나는 울만큼 실컷 울고 나서야 눈물을 그칠 수 있었다. 그 뒤론 큰언니도 내 발가락에 대해 더 이상 놀리지 않았다.

한동안 나는 가족 외엔 누구에게도 내 못생긴 발가락을 보여주지 않았다. 서른이 다 되어서 여수병원에서 수술을 받느라고 다른 장애인들을 처음 만났을 때 나와 똑같지는 않지만 모두들 조금씩 이상한(?)의 발가락을 갖고 있음을 알고 깜짝 놀랐었다. 그때까지 난 비장애인들과 비교해서 그들과 다른 내 발가락을 부끄럽게 여겨왔던 것이었다. 나와 비슷한 장애인들 앞에서 나는 더 이상 내 발가락이 부끄럽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장애라는 조건 외에도 난 참으로 많은 콤플렉스를 갖고 살았던 듯하다. 하지만 누구나 갖고 있는 콤플렉스처럼 장애도 마음먹기 달렸다는 식의 진부한 교훈은 내가 진정 하고 싶은 얘기와는 거리가 멀다. 그런 교훈은 장애를 갖고 세상을 살아가기가 얼마나 힘이든지 짐작으로만 아는 사람들이 할 수 있는 말이다. 따라서 어느 정도 틀린 말은 아닐지언정 우리들의 삶에 별다른 도움이 되질 않는다.

나는, 내 짱구이마와 덧니가 흉이 아니라 자랑 또는 애교가 될 수 있었던 건 저절로 이루어진 현상이 아니라 사람들이 개성을 존중하고 다양성을 인정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썼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본다. 그러므로 장애도 아무 문제가 되지 않을 세상 역시 저절로 오지는 않을 것이라는 게 내 믿음이다. 나의 다름을 인정하고 소중히 여기며 남의 다름과 다양성을 존중하려는 적극적인 의지가 없다면 나처럼 콤플렉스가 많은 사람이 살아가기에 세상이 얼마나 삭막할까.

김효진씨는 현재 한국장애인연맹 기획실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녀는 지체 3급의 장애여성이다. 그녀는 자신을 '자기결정권'이라는 한마디 때문에 깨달음을 얻은 바 있어 DPI에 입문한 대책없는 센티멘탈리스트라고 소개했다. 또 그녀는 섹시하지 않다느니 의존적이라느니 무능력하다느니 하는 허위의식을 유포해 장애여성을 화형(?)시켜버리는 폭력적인 세상에 도전하는 백발마녀(일명 흰머리소녀)라고 덧붙였다. 그녀의 특기는 독설이며, 특히 편두통이 심할 때는 굉장한 마녀로도 변신한다고 한다.
저작권자 © 에이블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