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도 가방 들어주던 친구가 있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줄곧 친구들의 도움을 받으며 학교 생활을 했다. 그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친구가 순덕이다. 초등학교 1-2학년 때는 할아버지 등에 업혀 등하교를 했고, 3학년 때부터 순덕이가 내 단짝이 되어주었다.

순덕이는 내가 살던 동네에서 유일하게 소를 키우던 집 딸이었다. 서울 변두리였던 우리 동네에는 아직도 농사짓는 사람들이 있었고, 순덕이의 아버지는 소를 데리고 다니며 남의 논밭을 갈아주는 일을 하셨던 듯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순덕이네를 '소집'이라 불렀고, 그집 막내딸이었던 순덕이를 가리켜 '소집 딸'이라고들 했다. 순덕이 자신은 이렇게 불리는 걸 무척 싫어했지만. 순덕이네 집은 커다란 밭(호박밭으로 기억된다)을 하나 사이에 둔 길 건너편에 있었다. 잘만 하면 큰소리를 지르거나 손짓을 해서 서로를 부를 수 있을 정도의 거리였다. 어떤 동기로 순덕이가 내 가방을 들어주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질 않지만, 아무튼 마음씨 착한 순덕이가 어느날 내 가방을 들어주겠다고 자청하면서부터 시작되었던 듯하다. 그리고 다음날부터 등교 길마다 꼭 우리집에 들러 내 가방을 들어주게 되었다.

순덕이는 늘 그림자처럼 나와 함께 다녔다. 학교에서는 물론이고 집에 돌아와서도 어두워질 때까지 우리집에서 지내곤 했다. 그리 흔한 경우는 아니었지만 어쩌다 내게 떨어지는 잔심부름이 있을 때면 그애가 나 대신 재빨리 해주기도 했다. 어둑어둑해질 무렵 가끔 저녁을 먹고 가라고 우리 엄마가 권할 때면 "집에서 엄마가 기다리셔요." 하면서 뿌리치고 돌아가곤 했다. 그리고 저녁을 먹고 나서 텔레비전을 같이 보러 다시 오는 적도 많았다. 순덕이는 막내딸이라 부모님이 무척 연로하신 편이라 부모님을 끔찍하게 여기곤 했다. 특히 그애 아버지가 홍수가 크게 났던 어느 여름에 소와 함께 동네 다리를 건너다 물에 빠져 세상을 떠나신 뒤로는 더더욱 자기 엄마를 애틋하게 생각했다. 순덕이는 어린 나이답지 않게 엄청 효녀였다. 늙으신 엄마가 혹시 아프기라도 하면 밥도 안 먹고 엄마 곁을 지키곤 했다. 학교에 다녀온 후 며칠씩 우리집에 얼굴을 비치지 않을 때면 그애 엄마가 편찮으신가 여기고 우리 식구 모두 걱정을 할 정도였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자기 엄마가 나이가 많은

걸 안타까워 하면서 "우리 엄마가 너희 엄마처럼 젊으시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입버릇처럼 얘기하기도 했다.

나는 웃음 많고 정 많은 순덕이에게 그리 살갑게 구는 편이 아니었다. 그애를 귀찮아 한 적도 많았다. 나는 책을 읽거나 무언가 만지락거리면서 만들기를 좋아했는데, 순덕이는 나와 함께하기는 커녕 옆에서 자꾸만 말을 시키면서 방해를 하곤 했기 때문이었다. 거의 수다에 가깝다고 여겨지는 이야기들을 그애는 지치지도 않고 했다. 가령 학기초가 되 '우리 선생님이 누가 되실까, 무섭지 않은 선생님이어야 할 텐데' 하고 수도 없이 걱정을 하는가 하면 '우리 엄마가 빨리 돌아가실까 봐 걱정이야' 하면서 어느새 눈물을 글썽이기도 했다. 미리 걱정해서 될 일도 아닌 일에 그토록 집착하는 그애가 이해가 안가는 데다 같은 말을 여러번

반복하는 것이 싫어 내가 호응을 해주지 않으면 순덕이는 이내 삐져서 뽀르르 제집으로 가버리곤 했다. 그리곤 다음날에는 우리집에 발길을 끊는 것이었다.

또 순덕이는 "우리 이 다음에 커서도 꼭 만나자"고 하면서 몇번이고 손가락을 걸라고 강요하기도 했다. 처음 몇 번은 응해주었지만 이내 그런 짓이 무슨 소용인가 싶어져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면 순덕이는 영락없이 삐져서 "그래, 나 같은 거 만날 필요도 없단 말이지?" 하면서 '팩' 하고 돌아서는 식이었다. 나는 그럴 때마다 어이가 없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했다. 순덕이의 진심을 알면서도 무조건 장단을 맞춰주기에는 그리 넉넉한 성품이 못되었던 탓이다.

하지만 순덕이는 입을 굳게 다물고 말을 안하는 한이 있어도 가방만은 꼭 들어주었다. 이 점이 그애가 갖고 있는 놀라운 장점이었다. 내 가방 들어주는 일을 자기 일로 여기고 자신으로 인해 차질이 생기는 걸 바라지 않는 우직함… 아무런 대가도 없지만 그애는 한번도 가방 들어준다는 이유로 내게 조금의 위력이라도 부려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아무리 크게 마음을 상했어도 그애는 하루나 이틀을 못 넘기고 다시 나를 찾곤 했다. 어쩌면 순덕이는 쌀쌀맞은 나보다 우리 형제들, 부모님들이 더 좋아 우리집에 드나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4학년 때도 같은 반이 되었다. 일년 넘도록 나와 붙어다녔으면 지겨워질 법도 한데, 그애는 우리가 한반이 된 걸 나보다 더 좋아했다. 아마도 5학년 때부터는 다른 반으로 배정되는 바람에 등하교를 같이 하지는 않게 되었지만, 그래도 그애는 학교가 끝나면 거의 우리집에서 살다시피 했었다. 우리 부모님은 늘 입버릇처럼 말씀하시곤 했다. "이 다음에 순덕이 시집 갈 때는 우리가 장롱을 사줘야지. 순덕이는 우리 딸들보다 더 좋은 것으로 사줘야 해." 혼수품 중에서 가장 비중이 큰 것이 장롱이니 순덕이에 대한 고마움의 표현이었던 셈이다.

또 이런 말씀도 자주 하셨다. "순덕이 졸업식 때는 선행상 받아야 해." 부모님은 순덕이를 딸처럼 아꼈기에 진심으로 그렇게 마음먹고 계셨을 것으로 믿는다. 하지만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부터 아버지의 사업이 기울기 시작하면서 그 뜻은 이뤄지지 못했다. 어떻게든 부도를 막아보려고 안간힘 쓰던 아버지, 이미 기울어진 가세를 어떻게든 흔들림 없이 유지하기 위해 혼신을 다했던 엄마로서는 미처 거기까지 신경쓸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지금 가만히 돌아보면 순덕이와 나 사이에 대해 학교 선생님들은 모두 알고 계셨는데, 왜 선생님들의 배려가 없었을까 의아스럽다. 만일 순덕이가 공부를 썩 잘하는 아이였어도 여전히 같은 결과였을까? 아마도 성적도 우수한데다 선행까지 한 훌륭한 학생으로 칭송받았음에 틀림없다는 생각이 이제 와서 드니 씁쓸하다.

시집 갈 때 장롱을 사주겠다고 하신 아버지의 약속도 결국 지켜지지 못했다. 아버지는 사업 실패 이후 뇌졸중까지 겹쳐 결국 중풍으로 고생하다 세상을 떠나셨기 때문이다. 나 역시 대학을 졸업하고 안정된 직장을 잡기까지 10년 넘은 세월을 보내야 했기에 서른 중반이 되어 늦은 결혼을 한 순덕이에게 고작 전자렌지를 사주었을 뿐이었다. 그래도 그애는 너무 큰 선물이라면서 진심으로 기뻐했다. 나보다 몇 배는 넉넉한 내 친구 순덕이는 아들 하나 낳고 잘 살고 있다. 가끔 연락 하고 지내고 있으니 절대 헤어지지 말자는 약속은 그래도 지킨 셈인가?

김효진씨는 현재 한국장애인연맹 기획실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녀는 지체 3급의 장애여성이다. 그녀는 자신을 '자기결정권'이라는 한마디 때문에 깨달음을 얻은 바 있어 DPI에 입문한 대책없는 센티멘탈리스트라고 소개했다. 또 그녀는 섹시하지 않다느니 의존적이라느니 무능력하다느니 하는 허위의식을 유포해 장애여성을 화형(?)시켜버리는 폭력적인 세상에 도전하는 백발마녀(일명 흰머리소녀)라고 덧붙였다. 그녀의 특기는 독설이며, 특히 편두통이 심할 때는 굉장한 마녀로도 변신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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