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초가집에서 태어났다. 한 켠엔 넓은 호박밭도 있고(우리 밭은 아니었다) 동네 우물도 있어서 늘 사람들로 북적였다.

우리 집 앞마당엔 커다란 대추나무가 있어서 해마다 달디단 대추를 먹었던 기억이 난다. 장독대 밑에는 펌프가 있어 온 식구가 거기에서 세수를 하였으며, 엄마는 음식장만이나 빨래 등 물과 관련된 일을 그곳에서 했었다.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에 그 초가집을 허물고 새집을 짓게 되면서 임시로 마련한 거처가 아래채였다. 기와집이 완성되고 나서 아래채에는 자연스럽게 세를 들이게 되었다. 아래채는 가건물처럼 생겼지만 방이 두 개이고 각기 살림을 할 수 있는 구조로 되어 있었다. 거기에 꽤나 많은 세입자들이 들고 났다. 그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집이 기만이네이다.

기만이네는 식구가 엄청 많았다. 엄마, 아빠, 그리고 다섯 아들까지 모두 일곱 식구가 한방에서 살았다. 아래채로 이사올 무렵 제일 큰아들이 이미 중학생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야말로 말만한 자식들이 한방에서 우글거렸으니 숨이 막힐 법도 한데, 그 집에서는 늘 웃음꽃이 폈다. 자그마한 체구에 늘 부지런했던 아빠, 부업으로 봉투를 부치며 늘 알뜰하게 살림을 꾸려나갔던 엄마, 다섯 아들들은 저녁이면 둘러앉아 서로 학교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하느라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방이 하나밖에 없었고 텔레비전도 없으니 달리 흩어질 곳도 없고 정신을 빼앗길 무언가가 없으니 당연할 수도 있지만, 그 집이 화목한 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늘 어딘가가 아프다며 눕는 일이 잦았고 엄격하기만 했던 엄마, 사업 때문에 바빠서 밤늦게야 돌아오시느라 우리완 놀아줄 시간이 없었던 아버지… 기만이네는 썰렁했던 우리집 분위기와는 다른 무언가가 있었다.

기만이네 다섯 아들은 우리집 다섯 아이들(네 딸과 한 아들)과 나이가 거의 같았다. 그 중 셋째인 기만이가 우리집 셋째딸인 나와 같은 학년이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학교를 늦게 들어가서 실제 나이는 나보다 한두살 위라고 늘 주장하긴 했었지만….

키만 훤칠하게 크고 마른 체구였던 기만이는 딸이 없는 아랫집에서 딸 노릇을 톡톡히 했다. 그애는 바깥에서 친구들과 놀기보다는 늘 자기 엄마 곁에서 부업을 거들며 설거지를 도맡아 하는가 하면 방청소, 연탄 갈기, 심지어 요리까지 척척 해냈다. 가끔 우리집 딸들과 고무줄 놀이를 즐기고 공기놀이도 아주 잘 했으며, 노래할 때나 여자아이들 말투를 곧잘 흉내내는 폼을 보면 영락없는 계집애였다.

우리집 딸들은 기만이의 그런 점을 재미있어하면서도 가끔 놀림감으로 삼기도 했다. 기만이에게 '기숙이'란 별명을 붙여주고는 “넌 이 다음에 장가가긴 틀렸다. 시집이라면 몰라도…”하며 놀렸었다. 하지만 정작 기만이는 “그럼 시집가지 뭐”하며 별로 기분 나쁜 기색이 아니었다. 기만이 엄마 역시 "우리 집엔 딸이 없는데 기만이가 딸 노릇을 하니 참 좋다"시며 남들의 시선 따위엔 초연했다.

우리집 딸들은 저녁마다 기만이네 놀러가서 밤이 깊어가는 줄도 모르고 시간을 보냈다. 그때 한창 유행하던 라디오 드라마에 귀를 기울이면서 내일을 기약하며 끝나버린 드라마를 아쉬워하며 다음 줄거리를 서로 예측해보기도 하고, 함께 퀴즈를 풀기도 했다. 그때 성우들의 재미있는 말투를 흉내내서 온식구를 즐겁게 해준 장본인은 늘 기만이었다. 한창 유행하는 뽕짝을 간드러지게 불러 제끼던 아이도 기만이었다. 그야말로 아랫집에서 없어서는 안될 감초 같은 존재였다고나 할까.

그때 기만이 엄마가 내주던 간식의 맛이라니… 넉넉지 못한 살림이라 어쩌다 한번씩이긴 했지만 고구마나 무, 고급스러울 때는 도토리묵, 찹쌀떡까지 얼마나 꿀맛이었던지…. 언제나 동치미나 겨울김치가 곁들여지기도 했지만, 우리집 딸들까지 자그마치 열명이 넘게 갈라먹자니 늘 감질이 날 수밖에 없었기에 더욱 맛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기만이 형제들이 학교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하나씩 풀어놓으면 늘 기만이 아빠가 결론을 내려주는 것으로 마무리가 되었다. 배꼽을 잡을 만큼 우스운 이야기도 있었지만 때로는 가난한 집 자식이기에 겪어야만 했던 서럽고 억울한 이야기도 튀어나왔었다. 그럴 때마다 기만이 아빠는 가난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며, 가난한 사람을 핍박하는 사람들이 잘못임을 지적하고 어떤 상황에서도 의롭지 못한 일을 해서는 안되고, 희망을 잃지 않고 열심히 살아간다면 언젠가는 좋은 날이 온다는 말씀을 해주셨던 듯하다.

막내인 남동생을 빼고 우리집 네 딸들은 거의 매일 밤 기만이네 집에 놀러갔다. 그리고 네 딸 중에서 넷째인 내 여동생이 기만이네 식구들에게 인기가 가장 좋았다. 우리집에서 나와 남동생 사이에서 치여 사랑을 제대로 받아보지 못한 여동생은 싹싹하고 붙임성이 있는 성격 덕분에 기만이 엄마의 귀여움을 듬뿍 받으면서 어느덧 그 집의 막내딸처럼 대접받았다. 우리집에 있어봤자 엄마와 언니들 심부름만 해야 했던 여동생으로서는 그처럼 좋은 탈출구가 없었다. 그런 이유로 여동생이 기만이네가 이사가기 전까지 네 딸 중 가장 오랫동안 기만이네와 친하게 지냈다. 엄마는 매일밤 마실을 가는 막내딸에게‘계집애가 집에 있지 못하고 짤짤거리며 다닌다’며 못마땅해 하셨다.

기만이네와 조금씩 멀어지면서 밤이면 엄마의 팔다리를 도맡아 주물러야 했던 내게 어느날 엄마가 물으셨다. "왜 요즘은 기만이네 놀러가지 않니?" 갑자기 할말이 없어진 나는 무심결에 이렇게 대답하고야 말았다. "냄새가 나서요" "무슨 냄새?" "발꼬랑내…"

일곱식구가 한방에서 우글거리는데다 한창 자랄 나이의 사내애들에게 냄새가 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사실 우리집 딸들에게는 그 발냄새마저도 정겨움의 대상이었건만, 내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나는 그 한마디로 내가 그렇게 좋아했고 나를 기꺼이 받아들여주었던 기만이네 가족을 한순간에 배반하고야 말았다. 사실은 우리집에서와는 달리 나보다 여동생이 더 사랑받는 게 못마땅해서 어느 사이 발길이 멀어진 것이었건만….

어느쪽이 먼저인지는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기만이네가 좀더 넓은 집으로 이사를 갔고 우리집에 텔레비전이 생기면서 밤풍경은 사뭇 달라졌다. 텔레비전이 생기고부터 썰렁했던 우리집 안방이 동네 사랑방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사람들로 북적여도 기만이네집 같은 분위기와는 상당히 거리가 있었다. 지금 생각해봐도, 기만이네 집에서 늘 웃음꽃이 사라지지 않았던 데는 분명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음에 틀림없다. 특히 계집애라는 놀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늘 웃으면서 주변사람을 기쁘게 해주었던 기만이. 여자일, 남자일 가리지 않고 기꺼이 엄마를 도왔던 기만이라는 보석 같은 존재의 의미가 새삼 사랑스럽게 다가온다.

김효진씨는 현재 한국장애인연맹 기획실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녀는 지체 3급의 장애여성이다. 그녀는 자신을 '자기결정권'이라는 한마디 때문에 깨달음을 얻은 바 있어 DPI에 입문한 대책없는 센티멘탈리스트라고 소개했다. 또 그녀는 섹시하지 않다느니 의존적이라느니 무능력하다느니 하는 허위의식을 유포해 장애여성을 화형(?)시켜버리는 폭력적인 세상에 도전하는 백발마녀(일명 흰머리소녀)라고 덧붙였다. 그녀의 특기는 독설이며, 특히 편두통이 심할 때는 굉장한 마녀로도 변신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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