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형집행장면 / 전국정님 조선엽서

"너거들 중에서 새총을 가진 아아가 누고?"

아무도 나서는 아이는 없었습니다.

"다시 한분 묻겠다. 너거들 중에서 새총을 가진 아가 누고 말이다?"

사또는 언성을 높였지만 아이들은 꼼짝도 하지 않았습니다. 앞에선 정학이는 밑구녕에 똥낀 놈처럼 안절부절 어쩔 줄을 몰라하는데, 다른 아이들은 눈 만 껌뻑껌뻑하면서 서로서로 눈치만 살피고 있었습니다.

이 마을에서 새총을 가진 아이는 과연 누구일까요. 우선 배정학이 이미 새총을 가지고 자기집 마름의 머리 위에 있는 사과를 맞췄으니 배정학이 가졌고 그리고는 김진사네 손자, 박부자네 아들이 있었는데 김진사네 손자는 서울로 과거공부 하러 가서 집에 없고, 박부자네 아들은 새총을 가지고만 있었지 쏠 줄도 모르는 아이였습니다. 결국 새총을 가지고 그것을 제대로 쏠 줄 아이는 배정이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형방은 듣거라. 심학규 양반의 눈을 다치게 한 범인이 안나오믄 이 아아들 모다 1)태형 10대씩을 치도 록 하라"

포졸들은 형틀을 준비하고 아이들은 무서움에 떨었습니다.

"그 날 저 어르신자테 새총 쏜 아아는 정학임니더"

무서움에 떨던 한 아이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나서자 정학이는 그 아이에게 눈을 부라렸습니다.

"맞심더. 정학이가 쏘았심니더"

"정학이가 마자예. 지가 다 봤심더."

항상 처음이 어렵지 한 아이가 나서자 못물이 터지듯 너도나도 배정학이를 지목했습니다.

"정학이 네 이놈, 이래도 아이라 할끼가?"

"잘못했심더. 지가 그랬심니더. 저 양반 어르신이 우리들 노는 거를 기경하고 있길래 쪼매이 놀리 줄라

꼬 한긴데 그기 고마... 한분만 용서해 주이소"

배정학이는 사또 앞에 무릎을 꿇고 두 손을 싹싹 비비며 눈물로 애원을 했습니다.

"에헴 에헴 그참 양반의 약값이라..."

사또는 흡족한 마소를 띠며 연방 헛기침을 해댔습니다.

"그라믄 인자부터 판결을 하겠다. 경자생 배정학이는 갑인년 시월 초아흐렛날 김진사댁 선산 자테서 임오생 심학규 양반에게 새총을 쏘아 심학규 양반의 눈에 상채를 내어 심학규 양반의 눈을 멀게 하여 심학규 양반은 이제 과거도 볼 수 없게 되었다. 그 양반이 과거에 급제하여 수령이라도 한자리 얻게 되마 그 수입이 몇 천냥에 이를 것이나 아직은 미입사 양반이므로 배정학의 아비 배갑진이는 심학규 양반에게 양반의 눈을 멀게 한 죄로 약값 백냥을 지불하고..."

사또의 연설은 이어졌으나 배정학이에게는 백냥이라는 말 밖에 들리지 않았습니다. 백냥쯤이라면 아버지가 순순히 주실거라 생각하며 정학이는 별거 아니라고 안심을 했던 것입니다.

"여기 있는 다른 아아들도 같이 놀았으이 책임이 없다할 수 없을 끼고, 더군다나 양반댁 선산을 어지럽 힌 죄가 막중하므로 닷냥씩의 벌금을 내도록 하고, 배정학이는 심학규 양반의 눈을 멀게 한 죄에다가 오늘 송사를 열게 한 책임도 있으므로 벌금 삼백냥을 더 내도록 하라. 닷새간의 말미를 줄끼니께 한사람도 빠짐없이 벌금을 갖다 내도록 하라"

결국 사또와 책방이 노린 것은 돈이었습니다. 곽씨 부인이 처음 찾아왔을 때 돌팔매나 새총에 맞았을것으로 추측하였고, 설사 추측이 틀리더라도 배선주네 큰아들이 개구쟁이인 것은 동네가 다 아는 사실 이므로 책방이 그 사실을 모를 리가 없었던 것입니다. 잘 하면 사오백냥쯤 벌 수 있겠다고 책방이 사또

에게 귀띔을 해 주었던 것입니다. 과연 책방의 추측은 백발백중 족집게처럼 맞았던 것입니다.

약값 백냥을 심학규에게 주더라도 스물 두 ?명에 닷냥씩이면 백열냥에다 배정학의 벌금 삼백냥이면 사백열냥의 수입이 생기는데 열냥은 책방에게 주고 다른 아전들에게도 닷냥씩은 주어야 할 것입니다. 배선주가 속으로 반발은 하겠지만 그가 이 바닥에서 살아 갈려면 사또에게는 꼼짝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사백냥이라, 좀 더 부를걸 그랬나 싶어 사또는 후회도 되었지만 한번에 너무 많이 먹으면 채 할 수도 있으니까 다음을 기약하기로 했습니다.

"고맙심더. 참말로 고맙심더. 우리 사또는 참말로 훌륭한 양반임더."

닷세 후에 책방에게서 약값 백냥을 전해 받은 곽씨 부인은 너무나 감격하여 코가 땅에 닿도록 동헌마당에 코수십번도 더 절을 하였습니다.

"그 보소 내가 머라 카던기요. 보리숭년에 백냥이 어덴기요."

아무 것도 가진 것 없어 얻을 것도 잃을 것도 없는 봉화네가 자기 일처럼 기뻐하였습니다.

"그렇기. 우리 같은 상놈이라믄 택도 없을 낀데 양반이 다르기는 다르구마"

귀덕어미는 잘됐다하면서도 벨이 꼴리는 것은 어쩔 수가 없는 모양입니다.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 이 말은 예나 지금이나 만고불변의 진리니까요. 말이 나온 김에 한마디 더 보태자면 '기쁨은 나누면 배가되고 슬픔은 나누면 줄어듭니다.' 어디서 많이 들어 본 말이지요. 참말처럼 들려서 사람들이

깜빡 속아넘어가는 99퍼센트의 순도 높은 거짓말이 바로 이 말입니다. 왜 99퍼센트냐 하면은 1퍼센트쯤의 진실도 있기는 있을 테니까요. 그 1퍼센트가 누구냐 하면 바로 자식의 기쁨을 나누는 부모 마음이지요. 형제 자매는 물론이고 때로는 부모의 기쁨을 시샘하는 자식도 더러 있습디다.

정말 1퍼센트의 아름다운 마음을 예외로 하고 99퍼센트의 보통사람들은 기쁨은 절대로 못 나눕니다.

니 기쁨이 내 기쁨이 될 수 없고, 내 기쁨이 결코 네 기쁨이 될 수 없을 뿐더러, 까딱하면 내 기쁨은 당신의 슬픔을 넘어 분노와 증오로 이어 질 수도 있습니다.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픈 것도 바로 그 때문이죠. 더구나 겉으로는 기쁜 척이라도 해야 할 때는 더더구나 죽을 맛이죠.

그리고 슬픔은 나누면 줄어 든다고요. 천만에, 기쁨은 나눌 수가 없지만 그와 반대로 슬픔은 잘 나누어 질 뿐더러 나누면 나눌수록 슬픔은 배가되고 전염까지 됩니다. 그래서 슬픈 소식은 소문도 빠르고 니 슬픔에 내 슬픔이 보태지고 범벅이 되어서 모두가 다 슬퍼지는 거죠. 남의 초상집에 가서 목을 놓아 우

는 사람도 알고 보면 죽은 사람, 그리고 남은 사람들의 슬픔에다 자신의 슬픔을 보태서 그리 슬피 운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아마 없겠지요.

그렇거나 말거나 '기쁨은 나누면 배가되고 슬픔은 나누면 줄어듭니다.'는 99퍼센트의 순도 높은 거짓말에 우리 다같이 속아 줍니다. 참말로 아름다운 거짓말이니까요.

각설하고 귀덕어미는 그래도 좋은 이웃이라 비록 배는 아팠지만 상놈의 설움을 혼자서 삭히며 곽씨 부인에게는 내색하지 않았습니다.

곽씨 부인은 백냥만 있으면 당장이라도 남편 심학규의 눈이 깨끗이 나을 것 것만 같아서 가슴을 두근거리며 집으로 향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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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태(笞) : 조선시대 죄인의 볼기를 치는 형구 또는 형벌로 경범죄에 사용하였음. 조선시대 형구는 태. 장. 곤장이 있었는데 태(笞)는 작은 가시나무 회초리이고 장(杖)은 큰 가시나무 회초리이며, 곤장(棍杖)은 장(杖)보다 훨씬 길고 두꺼운 버드나무로 넓적하게 만들었으며 그 종류는 중곤(重棍)·대곤·중곤(中棍)·소곤 및 치도곤(治盜棍)이 있었다.

*일반적으로 죄인을 때리는 형구라하면 곤장으로 알고 있는데 곤장은 군무에만 사용되었기에 지방 수 령은 곤장을 사용할 수 없었다고 함.

조선시대 형벌제도

조선시대의 형벌은 고려와 마찬가지로 태형, 장형, 도형, 유형, 사형의 5형을 기본으로 하였으나, 도형, 유형과 같은 자유형이 확대되고 刑具의 규격과 사용방법, 절차 등이 경국대전에 명시하였다.

지방의 군, 현의 수령은 장형이하, 관찰사는 유형이하의 사건만을 처리하게 하고, 사형은 삼복제(三覆制)를 시행하여 국왕의 재결에 의해서만 집행할 수 있게 하였다.

1) 태형(苔刑)

태형은 가장 가벼운 형벌이고 10대에서 50대까지 5등급이 있다.

태형을 집행할 때에는 "매의 가는 편 끝으로 볼기를 친다"고 하였다. 태형의 집행은 죄수를 형대에 묶은 다음 하의를 내리고 둔부를 노출시켜 대수를 세어가면서 집행하는데 부녀자의 경우에는 옷을 벗기지 않으나 간음한 여자에 대해서는 옷을 벗기고 집행하였다. 나이가 70세이상이거나 15세이하인 자와 폐질

에 걸린 자는 태형을 집행하지 않고 대신 속전을 받았으며, 임신한 여자도 70세이상인 자에 준하여 처리하였다. 태형은 조선말 장형이 폐지된 뒤에도 오랫동안 존속되다가 1920년에 가서야 완전히 폐지되었다.

2) 장형(杖刑)

장형은 태형보다 중한 벌로서 60대에서 100대까지 5등급이 있고 장의 법정규격은 대두경 3분 2리, 소두경 2분 2리로 길이 3척 5촌되는 큰 회초리로 만든다.

장형의 집행방법은 태형과 대체로 같고 매의 규격만 달리할 뿐이다. 갑오경장 이듬해인 1895년 행형제도를 개혁하면서 장형은 폐지되었다.

3) 도형(徒刑)

도형은 오늘날의 징역형에 해당하는 것으로 도형 기간동안 관아에 구금하여 두고 일정한 노역에 종사시키는 자유형의 일종이다. 도형대신 군역에 복무시키는 충군이라는 제도가 있었는데 이는 주로 군인이나 군관계의 범죄에 대하여 적용하였다.

도형의 기간은 최단기 1년에서 최장기 3년까지인데 도형에는 반드시 장형이 부과되었다. 도형에 처하게 되면 노역에 종사하게 되는데, 대명률직해에는 소금을 굽거나 쇠를 불리게 하는 작업을 부과시키며 염장에 보내진 자는 매일 소금 3근을 굽고, 야철장에 보내진 자는 매일 철 3근을 불려서 그 몫을 싸서 각각 상납한다고 규정하고 있으나, 실제 염장이나 철장이 없는 관아에서는 제지, 제와 또는 관청의 잡역, 역체 등의 노역을 부과시켰다.

4) 유형(流刑)

유형은 중죄를 범한 자에 대하여 먼 지방으로 귀양보내어 죽을 때까지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게 하는 형벌이다. 유형은 황무지와 해변의 고을에 보내어 배치시키는 것이며, 도형과 같이 노역을 과하지는 않았다. 유형은 도형과 함께 자유형에 속하여 조선시대 전반에 걸쳐 널리 행하여지던 형벌로서 도형과는 달리 기간이 정하여 지지 않았다. 그러므로 임금의 사령, 또는 소결 등의 왕명에 의해서만 특별히 석방

될 수 있었다. 특히 조선시대 정치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전개된 당쟁은 많은 정치범을 낳게 하였는데 사형을 면한 대부분의 정치범들은 유형으로 처벌되었다.

유형수 중 정치범에게는 식량 등 생활필수품을 관에서 공급해 주었다. 유형지에 처와 첩은 따라 가도록 하였다.

5) 사형(死刑)

사형은 형벌 중에서 극형에 해당하는 것으로 조선시대에는 대명률의 규정에 의하여 교형(絞刑)과 참형(斬刑)의 2종으로 정하였다. 교형은 신체를 온전한 상태로 두고 목을 졸라 죽이는 것이며, 참형은 보통 신체에서 머리를 잘라 죽이는 것이다. 그렇지만 죄질에 따라 사형의 방법을 달리하여 능지처사하는 경우도 있었다. 사형을 집행한 다음 위협의 효과를 거두기 위해 죄수의 머리나 시체를 매달아 공중에게 전시하는 것을 효수 기수라고 하였다.

사형은 삼복제에 의하여 3차례의 재판을 거쳐 신중을 기하도록 하였고, 사형의 확정은 반드시 임금의 재결을 받아야만 하였다.

그 외에도 사사(賜死), 부관참시(剖棺斬屍)가 있었다. 사사는 왕명으로 독약을 마시게 하여 죽게 하는 것으로 왕족이나 현직자로서 역모에 관련되었을 때 주로 행하여졌다. 부관참시는 이미 죽은 자의 무덤

을 파헤쳐 시체를 꺼내 참형 또는 능지처사를 행하는 것이다. 연산군 시대 무오사화, 갑자사화에 연루된 자 등에 대하여 부관참시형이 시행되었다.

사형을 집행한 다음 죄수의 머리를 매달아 일반 민중에게 보이거나 시체를 길거리에 내버려 사람들로 하여금 참혹한 죽음을 볼 수 있도록 하여 일반예방의 효과를 거두고자 하기도 했는데, 이를 효수(梟首)

혹은 기시(棄市)라고 하였다.

6) 속전(贖錢)

조선에서는 특별히 정한 범죄를 제외하고는 형 대신 금전으로 납부할 수 있는 제도가 있었는데 이것이 바로 속전제도였다. 속전은 오늘날 벌금과도 유사하다. 그렇지만 벌금은 재산형인데 비해 속전은 신체

형(태 장), 자유형(도 유), 생명형을 선고받은 후 본형을 재산형으로 대신한다는 점에서 구별된다.

속전제도에는 조선시대의 신분에 의한 차별, 유교국가적 통치이념이 잘 드러나고 있다. 속전의 유형은 크게 신분에 의한 것, 특수직업에 대한 것, 부녀 노약자 병자에 대한 것, 상을 당했을 경우나 부모의 봉

양에 관계된 것, 그리고 휼형으로서의 속전 등으로 구분되었다.

7) 法外의 예

법에 규정한 형벌 외에 관습법으로 시행 한 것으로

주리, 태배, 압슬, 난장, 낙형, 의비, 월형, 비공입회수, 고족 등이 있었다.

이복남 원장은 내 이웃이 행복하지 않는 한 나는 결코 온전히 행복할 수 없으며 '모두 함께 하는 마음'이 없는 한 공동체의 건강한 발전이란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에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평등하게 공유할 수 있는 열린사회를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원장은 또 서로 사랑하고 용서하고 화합하여 사랑을 나눔으로 실천하는 아름다운 마음 밭을 가꿀 수 있다고 강조한다. 이 같은 일성은 이 원장이 부산장애인총연합회 사무총장을 역임하면서 장애인이 받고 있는 불이익을 현장에서 몸으로 뛰며 실천하면서 얻은 교훈이다. 이복남 원장은 현재 장애인 상담넷 하늘사랑가족<하사가>를 운영하고 있다. ■하사가 홈페이지: http://www.988-7373.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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