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1943년 3월 4일생"의 가수 이용복의 노래는 나의 마음을 늘 울리곤 했다. 가사 중 "어머니 왜 나를 낳으셨나요?"는 아직도 내 마음 한 구석에 깊이 자리 잡고 있다. 장애자녀를 양육하는 부모님들이 "내가 죽을 때 너도 같이 죽자!"라는 원망 섞인 푸념을 함께 하듯, 장애인 당사자들은 "왜 나를 낳으셨나요?'라고 함께 절규한다. 늘 학자들은 장애인 문제는 사회문제라고 하면서 여전히 장애인과 그 가족들은 모든 부담을 스스로 져야 하는가?

탈시설화, 사회통합이란 말을 반대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시설에서 생활하는 장애인들은 장애인 등록자 중 1%에 미치지 못한다. 즉 99%이상의 장애인들이 지역사회에 살고 있다. 즉 통합된 사회에 살고 있다. WHO의 통계대로 10%의 장애인들이 현존하다면 시설에서 생활하는 장애인은 0.25%이하에 불과하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어쩌면 우리나라는 탈시설화보다는 시설의 현대화와 아울러 더많은 시설을 증축해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 있을 것이다. 그 이유는 성인발달장애인이나 중증 장애인 자녀를 둔 가정은 "우리 아이 맡길 시설이 있나요?"라고 마치 죄지은 것 같이 묻는다.

어차피 가정에서 장애인 자녀와 함께 사는 일을 적극적으로 지원을 하고 있지 않다면 장애아 자녀 양육의 모든 책임을 부모에게 지우는 어설픈 탈시설화와 사회통합의 주장보다는 가정 보다 더 나은 시설을 지어서 그곳에 인간답게 살아가는 장애인을 바라 보면서 행복해하는 장애인 가족을 만들어내는 것이 더 시급하다.

"아빠 살고싶어요?" 중증 장애자녀의 생명줄을 연결하고 있는 호흡기를 플러그에서 빼버린 아버지는 "아내와 아들에게 해 줄 수 있는 최선의 일이 중증 장애자녀를 저 세상으로 보내는 것"이라고 말했다.

회복되지 않는 자녀의 장애, 늘어나는 빚, 매스컴도 타고 그로 인하여 주변의 도움을 받기도 하였지만, 이는 해결책이 되지 못했다. 여전히 "아빠 살고 싶어요?"라고 가느다란 목소리로 절규하는 자녀의 모습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심정은 무엇을 표현될 수 있을까?

자녀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은 빚을 얻어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빚을 갚을 수는 없었다. 1주일에 250만원 되는 병원비를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까? 병원도 감당하지 않았고, 정부도 책임지지 않았고, 모든 부담은 전적으로 가족의 몫이었다.

시설에서 지역사회로 내몰린 장애인의 삶! 그러나 사회가 책임지지 않는 현실에서 그 모든 것을 가족이 부담해야 했다. 결국 아버지는 자녀를 살해한 비정한 살인자로 남았다. 어머니는 집을 나가버린 자녀를 무책임하게 버린 가출인이 되었다. 아들은 이러한 과정에서 가족 구성원을 미워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지지할 수도 없는 입장이 되고 말았다.

누가 이렇게 만들었을까? 결국 사회전체가 책임져야하지 않는가? 이 사회는 살인방조죄를 저지르고도 후안무치의 당당한 모습을 가진 악의 화신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차라리 요양시설이나 생활시설에서 그를 책임질 수 있었다면, 또한 의료보험에서 그를 돌볼 수 있었다면 이렇게는 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모 아니면 도의 흑백논리식의 주장으로 인하여 혼동속에 빠져있다. 탈시설화를 주장하면 마치 시설 자체가 무의미한 것 처럼, 통합을 주장하면서 재활적 장애인 전담시설이 문제가 있는 것 처럼 주장하는 이 현실 속에서 여전히 장애인과 그 가족은 괴리감 속에서 흔들리고 있다.

결국 장애인 당사자들이 일어서고 주장해야 한다. 그러나 여기에 맹점이 있다. 장애인 당사자들도 자기보다 어렵고 중증의 장애인 가진 장애인을 생각하여야 한다. 이 세상의 어떤 주장과 이론도 절대적으로 옳은 것은 없다. 오히려 다양한 욕구를 가진 장애인과 그 가족을 생각하면 모든 장애인들의 상황과 형편에 따라서 다양한 서비스가 제공될 수 있는 기반이 조성되어야 한다.

"아빠 살고싶어요?" 물론 아빠도 고통스럽지만 그래도 자녀가 살아있는 것을 바라보고 싶어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단지 희미한 음성으로 외쳐지다가 사라져버린, 다시는 들을 수 없는 음성으로 남겨지고, 나머지 식구들은 큰 죄인으로 이 세상을 끝까지 살아가게 되는 이 극적인 상황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

유로 노인시설 처럼, 좋은 환경을 가진 장애인 생활시설들이 더 지어져냐 한다. 그룹홈을 4-5개만 가지고도 사회복지법인을 만들 수 있고 이에 따른 정부지원이 이루어져야 한다. 다양한 주단기보호시설들이 세웢지고, 장애아전담보육시설에 대한 전적인 지원이 이루어져야 한다. 호주는 장애아동이 발견되었을 때 장애아동 가족에게 장애아동양육수당이 지급이되며, 18세가 되면 장애인 자신에게 그 비용이 지급되다가 65세가 되면 노령수당으로 전화되어 세상을 떠날 때가 사회가 책임을 진다.

우리는 언제쯤 이렇게 될까? 분명한 것은 예산 문제가 아니라 의식과 마인드의 문제라는 사실이다. 이것 때문에 의지가 없는 것이다. 정치자금으로 100억씩 턱턱 내주고 받는 사회에서 치료비가 없어서 살인자가 되고, 집을 나가고 멍한 눈초리로 세상을 바라보아야 하는 이 비극은 빨리 종식되어야 한다.

이계윤 목사는 장로회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숭실대학교 철학과 졸업과 사회사업학과 대학원에서 석·박사과정을 수료하였다. 한국밀알선교단과 세계밀알연합회에서 장애인선교현장경험을 가졌고 장애아전담보육시설 혜림어린이집 원장과 전국장애아보육시설협의회장으로 장애아보육에 전념하고 있다. 저서로는 예수와 장애인, 장애인선교의 이론과 실제, 이삭에서 헨델까지, 재활복지실천의 이론과 실제, 재활복지실천프로그램의 실제, 장애를 통한 하나님의 역사를 펴내어 재활복지실천으로 통한 선교에 이론적 작업을 확충해 나가고 있다. 이 칼럼난을 통하여 재활복지선교와 장애아 보육 그리고 장애인가족의 이야기를 나누면서 독자와 함께 세상을 새롭게 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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