년말이 가까와 오면서 차가운 추위가 살같을 스며들고 있다. 정치가 혼란스러운 것은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경제 역시 어렵다고들 한다. 그러나 유락시설에 가면 어려운 경제 분위기는 맛볼 수 없고, 무료급식소에 가 보면 우리나라가 방글라데쉬가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극과 극을 달리는 사람들. 이라크 파병문제, 부안의 핵폐기장 설치문제, 대선자금 문제, 이러저러한 문제를 토론하는 모든 자리에 타협은 없다. 오직 흑과 백만이 존재할 뿐이다. 모두가 자신의 주장의 당당함을 설파할 뿐 상대방 주장의 타당성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이것의 우리의 현실이다.

이렇게 거창한 주제들이 우리의 삶의 주변머리를 가득 채우고 있을 즈음, 우리는 가슴 아픈 사건들을 스쳐지나간다. 도저히 스쳐지나갈 수 없는 이웃의 고통, 그러나 또 지나가고 있다. 무엇일까?

한 할머니가 정신지체 장애인 손녀를 살해했다. 왜 그랬을까? 아니 할머니가 손녀를 살해하다니!

한 소년이 6개월간 어머니 주검을 지키면서 살았다. 3년간 부모의 무덤을 지키는 것이 전통적인 효라면 아직도 2년 반이나 남았다. 도대체 그 지독한 시체 냄새를 어떻게 참아냈는가!

정신지체 장애인 어머니가 아들을 마구 물어댔다. 아니 누가 정신지체 장애여성과 결혼을 한 거야!

우리는 이렇게 쉽게 말하고 해프닝 처럼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남의 일이니까.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사건을 바라보면서 참으로 씁쓸한 우리의 자화상을 읽을 수 밖에 없다. 아파트에 살면서 옆집에 누가 사는 지도 모르는 우리가 누구에게 돌을 던질 수 있단 말인가? 엘리베이터 안에서 만난 이웃을 향해 두려움의 눈길로 응시하는 우리가 누구를 탓할 수 있단 말인가? 그 상대가 장애인이든 비장애인이든 무관하다. 우리는 이러한 사회에 살고 있기 때문에 앞의 사건을 자연스럽게 일어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통합된 사회가 무엇일까요? 사회안전망이 무엇일까요? 결국 할머니는 자신의 자녀가 직접 돌보지 않는 정신지체 손녀를 돌보아야 했습니다. 힘이 부치고, 어찌할 줄을 모르고, 결국에 할머니는 자신의 목숨을 끊는 심정으로 손녀의 목숨을 끊어야만 했습니다. 장애자녀의 부모는 어디에 있습니까? 이 할머니는 무인도에 살고 있었던 것입니까?

6개월간 어머니의 주검을 지켰던 소년은 "마음은 편했다"고 대답했다. 그렇다. 차라리 아무도 안만나는 것이 편할지 모른다. 그러나 국민의 세금으로 학생을 맡은 선생님도, 월세를 받아야 할 집주인도 무관심했다. 게다가 그의 학교 친구들은 더욱더 무관심했다. 이웃이 없기에 편하다는 이 비극적인 고백은 바로 우리의 자화상이 어떠한 지를 말한다. 지금도 부모가 출타한 가정의 자녀들 역시 돈으로 맺어진 관계 속에서 이 곳 저 곳을 맴돌 뿐이다. 그들에게 진정한 관심을 가져다 주는 곳은 가정도, 학교도 학원도, 게다가 친구도 아니다. 무관심이 행복이다.

정신지체 어머니는 아들을 물었다. 아버지는 어디에 갔을까? 가족과 친지는 어디에 있을까? 그렇게 한 생명이 어머니로 부터 물리는 이 현실에서 이웃은 모두 어디에 갔는가? 역시 이웃과의 단절은 이러한 비극을 만들어낼 수 밖에 없다.

아버지는 외국에 나가서 일하고, 어머니는 국내에서 일하러 나가고, 집안 살림은 파출부가 감당하고, 하나 밖에 없는 딸은 많은 돈으로 아이들을 매수하여 날마다 누군가를 왕따시키며 인생을 즐기고 있었다. 알고보니 그녀에게는 참다운 친구가 필요했었다. 그 친구는 다름아닌 부모였다. 그러나 그에게는 친구가 없었다.

우리는 사회안전망(Social Security Network)을 지나칠 정도로 제도적인 관점에서 보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1차적인 안전망을 소홀히 여기고 사회로부터 모든 것을 기대하려고 한다. 여기에 우리의 비극이 있다. 우선 가족과 친족이 최고의 안전망이 되어야 한다. 국가와 사회는 이러한 역할을 가족과 친족이 잘 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 2차적 안전망인 이웃과의 관계가 돈독해 질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 국가와 사회의 책무이다.

따라서 우리는 가까운 곳에서 이웃을 발견해야 한다. 내가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이웃은 어디에 있는가? 내가 도울 수 있는 이웃은 어디에 있는가? 그 이웃이 바로 가족이요, 친족이요, 친구이며, 그리고 옆집 사람이다.

이웃을 잃어버린 사람들. 이는 모든 것을 상실한 사람들이다. 사회와 국가는 이러한 것을 대체할 만한 능력이 없다. 단지 보충적인 기능만을 감당할 뿐이다.

바로 나, 바로 우리가 그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추운 겨울도 따뜻하게 보낼 수 있다. 이웃이 있는 그 곳에 내가 있을 때.

이계윤 목사는 장로회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숭실대학교 철학과 졸업과 사회사업학과 대학원에서 석·박사과정을 수료하였다. 한국밀알선교단과 세계밀알연합회에서 장애인선교현장경험을 가졌고 장애아전담보육시설 혜림어린이집 원장과 전국장애아보육시설협의회장으로 장애아보육에 전념하고 있다. 저서로는 예수와 장애인, 장애인선교의 이론과 실제, 이삭에서 헨델까지, 재활복지실천의 이론과 실제, 재활복지실천프로그램의 실제, 장애를 통한 하나님의 역사를 펴내어 재활복지실천으로 통한 선교에 이론적 작업을 확충해 나가고 있다. 이 칼럼난을 통하여 재활복지선교와 장애아 보육 그리고 장애인가족의 이야기를 나누면서 독자와 함께 세상을 새롭게 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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