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매장될 뻔하다가 반세기가 지나서야 심야극장에서 살아난 영화 <프릭스> ⓒMGM

영화에 대한 글을 쓸 때, 글을 쓰기 전부터 내내 설레는 경우가 있다. 별로 알려져있지 않은 영화를 소개할 때, 누군가 그 소개를 참고로 영화를 찾아볼 때, 그리하여 공감이든 이견이든 서로의 의견을 교환할 때, 그 과정은 순도 100%의 기쁨으로 다가온다. <인사이드 아임 댄싱>이 그렇고 이번 주에 소개할 <프릭스(Freaks)>가 그렇다.

혹시라도 어떤 영화인가 궁금해서 검색창에 ‘프릭스’라는 단어를 쳐보면 2002년에 개봉했던 거미영화가 나올 것이다. 오늘 소개할 영화는 그 영화가 아니다. 1932년에 만들어졌던 영화, 당시 극장에서 많은 관객들이 기절하여 실려나갔던 영화, 그리하여 영국에서는 30년 동안이나 상영이 금지되었던 수수께끼의 영화. 바로 토드 브라우닝 감독의 <프릭스>이다.

공중 그네를 타는 미녀 곡예사 클레오파트라와 그녀를 짝사랑하는 저신장장애인(왜소증 장애인) 한스. ⓒMGM

<프릭스>는 서커스를 배경으로, 공중 그네를 타는 미녀 곡예사 클레오파트라와 그녀를 짝사랑하는 저신장장애인(왜소증 장애인) 한스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한스를 비롯해 막간극을 하는 장애인들을 바보 취급하던 클레오파트라는 한스가 상당한 재산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서 결혼을 승낙한다. 그녀는 괴력을 가진 애인 헤라클레스와 공모하여 한스에게 조금씩 독을 먹이는 수법으로 살해할 음모를 꾸민다. 하지만 그 음모를 눈치 챈 한스는 동료 장애인들과 함께 폭풍우가 치는 밤 두 사람에게 반격을 가한다.

실제 당대를 풍미했던 서커스 스타들이 대거 출연했던 영화 <프릭스>. ⓒMGM

이 영화는 개봉 당시 세간의 혹독한 악평을 받았고 상영을 중지하는 영화관이 속출하면서 흥행에 실패했다. 샴 쌍둥이, 왜소증 장애인, 상반신만 있는 남자, 두 팔이 없는 여자, 양성인간 등이 실제로 출연했고 영화 속에서 비장애인들은 그들의 손에 난도질당한다. 비장애인 관객들은 구역질을 하며 극장 밖으로 뛰어나갔는데 그 후 30년 동안 영화는 완벽하게 외면당했다. 토드 브라우닝 감독은 소년 시절, 당시 유행에 따라 가출을 해서 서커스단 생활을 경험했다고 한다. 자신의 경험이 담긴 이 영화에서 토드 브라우닝감독은 장애인의 편에 선다.

클레오파트라와 헤라클레스는 금발에 멋진 미모, 괴력과 멋진 육체를 가졌지만 누구보다도 악마적이고 비열하다. 반면 장애인들은 약한 자를 돌보고 불의를 응징한다. 실제 당대를 풍미했던 서커스 스타들을 대거 출연시킨 이 영화 어디에서고 장애인에 대한 동정이나 호기심은 발견할 수 없다. 손이 없어 발로 식사하거나 다리가 없어 손으로 걷고 사지가 없어 꿈틀거리며 기어다니는 모습은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고 영화가 전개될수록 이 낯선 존재들에 대한 호감과 믿음이 생겨난다.

서커스쇼의 볼거리가 되어 비장애인들에게 안도감과 만족감을 느끼게 해주었던 <엘리펀트맨>의 존 메릭. ⓒ에스엠픽쳐스

영화 속 장애인들의 존재는 그동안 봐왔던 어느 영화들과도 다르다. 심각한 기형의 사생아로 태어나자마자 버려졌고 부모와 가족의 사랑은커녕 인간적인 대접이라고는 한번도 받아본 적이 없는 <엘리펀트맨>과도 다르고 과학자 아버지의 실험에 의해 태어난 <프랑켄슈타인>과도 다르다. <엘리펀트맨>에서 장애인은 서커스쇼의 볼거리가 되어 비장애인들에게 스스로를 ‘정상인’이라 여기며 안도감과 만족감을 느끼게 해주었고 <프랑켄슈타인>의 장애인은 ‘정상인’이 되고 싶은 열망을 드러냄으로써 동정과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이 영화의 장애인들은 즐겁고 당당하며 오히려 비장애인들에게 자신들의 세계에 동참하라고 촉구한다.

‘정상인’이 되고 싶은 열망을 드러냄으로써 동정과 공포의 대상이 되었던 프랑켄슈타인. ⓒ유니버설 픽쳐스

저신장장애인 한스와 클레오파트라의 피로연장면에서 이 입장은 명확히 드러난다. 두 사람의 결혼을 축하하는 동료 장애인들이 “We accept her. One of us(우리는 그녀를 우리의 일부로 받아들인다)”라는 노래를 부르면서 커다란 술잔을 돌릴 때 잔을 받아든 클레오파트라는 “이 더럽고 불쾌한 병신들”이라고 욕하며 자리를 뜬다. 그 장면은 굉장한 심리적 충격을 던진다. 즐거운 축제의 자리에서 장애인들이 클레오파트라에게 내민 손은 당당하다. 그들은 클레오파트라에게 함께 할 수 있는 권리, 선물을 전해준 것이다. 새로운 세계로 들어온 것을 축복해주는 환영회 자리를 더럽고 불쾌하게 깨뜨리는 존재는 클레오파트라와 헤라클레스이다. 여태껏 ‘정상’이라는 이름으로 당연시되었던 수많은 가치들은 그렇게 가볍게 깨져버린다.

환영회 자리를 더럽고 불쾌하게 깨뜨리는 존재는 클레오파트라와 헤라클레스이다. ⓒMGM

금발, 아름다운 얼굴, 관능적인 몸매와 같은 겉보기 아름다움은 장애인 공동체의 건강한 기운을 당해내지 못한다. 스스로 떳떳하고 당당하게 진실된 장애인들의 자신감은 우리를 낯선 매혹에 빠져들게 한다. 영화의 결말, 장애인공동체의 성원들은 손과 발, 입을 이용해 흉기로 클레오파트라를 새롭게 조각한다. 악마적 심성의 노예가 되었던 아름다운 육체를 훼손시킴으로써 자신들의 방식으로 클레오파트라를 해방시켜준다. <프릭스>의 주인공들은 당당하다. 영화는 그동안 ‘정상’이라는 이름에 눌려있던 낯선 매혹의 세계를 보여줌으로써 새로운 가치관을 보여준다. 그 충격은 무척이나 강렬하다.

영화 <프릭스>는 ‘정상’이라는 이름에 눌려있던 낯선 매혹의 세계를 보여준다. ⓒMGM

영화가 꿈이라는 사실은 이럴 때 중요하다. 영화에 푹 빠져든 관객은 영화 속 질서에 스스로를 맡기게 된다. 비장애인 중심의 현실에서 다른 몸을 가진 장애인은 낯선 존재지만 영화 속 세상이 구축한 질서에서 <프릭스>의 주인공들은 익숙하고 친근한 존재들이다. 그렇게 영화에 푹 빠져있는 관객들에게 “이 더럽고 불쾌한 병신들”이라는 클레오파트라의 일갈은 크나큰 폭력으로 다가온다. 러닝타임동안 <프릭스>의 주인공들에게서 ‘장애없음’을 공감한 관객들에게는 클레오파트라의 저 욕설이 너무도 이상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결국 한 사람의 자연인에게 ‘장애인’이라는 옷을 입힌 이 사회의 시선을 <프릭스>는 그 반대의 과정을 통해서 풀어헤쳐보인다.

한 사람의 자연인은 어떻게 ‘장애인’이라는 옷을 입게 되는가? ⓒMGM

76년 전의 영화를 지금 소개하는 건 최근의 고민과 맞닿아있기 때문이다. 그 고민은 ‘장애인’을 대신할 이름을 찾는다는 광고를 보면서 더 깊어지고있다. 장애란 무엇인가? 장애인이란 누구인가? 누군가를 ‘장애인’이라고 통칭하는 것은 바람직한 것인가? 2002년 <나는 행복하다3>을 접으며 더 이상 장애 관련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있지 못하고 있는 나는 여전히 이 문제를 붙들고 있다. 정리되지 못한 이 혼란 속에서 그나마 약간의 길잡이가 되어준 것은 인권운동가 김도현씨의 글이다.

“손상은 손상일 뿐이다. 특정한 관계 속에서 손상은 장애가 된다.” ⓒMGM

그는 장애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손상은 손상일 뿐이다. 특정한 관계 속에서 손상은 장애가 된다.” 그의 글을 좀더 가져와보면 “손상(Impairment)은 사지의 일부나 전부가 부재한 것, 또는 신체의 일부나 그 기능의 불완전한 상태로서 정의한다. 그리고 장애(Disability)는 육체적 손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 현재의 사회조직이 불완전하거나 그 어떤 고려도 하지 않음으로 인하여 발생하는 사회적 불리와 활동의 제약이며, 그것으로 인해 사회활동의 주류적 참여로부터 배제되는 것을 말한다.” 그리하여 그는 말한다, “결국 장애인은 장애인이기 때문에 차별받는다기보다는, 오히려 차별받기 때문에 장애인이 되는 것이다.” (『당신은 장애를 아는가』 메이데이 刊 중에서)

영화 <프릭스>는 장애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만든다. ⓒMGM

이 명쾌한 시선을 글쓰기나 영화만들기와 같은 실천 속에서 구체화하는 일은 여전히 쉽지 않다. 다만 저 풀어헤침, 한 사람의 자연인에게 ‘장애인’이라는 옷을 입힌 이 사회의 시선을 섬세하게 고발하는 토드 브라우닝의 <프릭스>를 통해 문화실천의 한 방향을 가늠해볼 뿐이다. 함께 보고 이야기 나누기 바라며 <프릭스>를 추천한다.

‘유토피아’는 2007년 장애인영화 전문칼럼니스트 강좌 수료생들의 모임입니다. 저희들은 영화를 사랑하고 장애현실을 살아가는 눈과 감수성으로 세상의 모든 영화들을 읽어내려고 합니다. 저희들은 육체의 장애가 영혼의 상처로 이어지지 않는 세상, 장애 때문에 가난해지지 않는 세상, 차이와 다름이 인정되는 세상, 바로 그런 세상이 담긴 영화를 기다립니다. 우리들의 유토피아를 위해 이제 영화읽기를 시작합니다. 有.討.皮.我. 당신(皮)과 나(我) 사이에 존재할(有) 새로운 이야기(討)를 기다리며.
저작권자 © 에이블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