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해 여름 한 아저씨가 딸애를 데리고 와서 자장면을 시켰다. 그런데 손님을 앉혀놓고 면을 뽑는데 축축 쳐지고 끊어지고 면발이 나오지가 않았다. “어라 이게 왜 이러지. 그동안 짜장면을 제법 잘 뽑았는데...” 땀을 뻘뻘 흘리면서 어쩔 줄 몰라 애를 먹고 있으려니 손님 아저씨가 주방으로 들어 왔다. “내가 좀 해 보면 안 될까” 아저씨에게 자리를 내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반죽이 아저씨 손에 들어가자 요술처럼 면발이 나오는 게 아닌가. 여름에는 반죽이 부풀어서 면발이 잘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 아저씨는 정씨였는데 중국집 주방장이었고 그날은 중국집이 쉬는 날이었다는 것이다.

그로부터 정씨 아저씨는 가끔씩 들렀는데 “진짜 짜장면을 배워 볼 생각 없느냐”고 물었다. 몇 달 후 정씨 아저씨가 그를 데려간 곳은 충무동에 있는 4층짜리 중국집이었다. 주인도 주방장도 다 중국 사람이었다. 부산에서 제일 큰 중국집이라고 했는데 그에게는 어마어마한 집이었다.

중국집에 취직이 되었으니 그동안 말로만 들었던 탕수육, 팔보채, 나조기 등 중국음식을 먹어볼 수 있겠구나, 어린 소년은 꿈에 부풀었다. 그러나 그 꿈을 이룬 것은 오랜 시간이 지난 뒤였다. 처음에는 주방에서 허드렛일을 했고 아침은 아무것도 없는 빵, 점심은 돼지비계와 야채로 만든 우동이고 저녁은 누룽지가 전부였다.

몇 달인가 지난 후에 3층에서 홀 서빙을 하게 되었고 3층은 주로 단체손님을 받았기에 손님들이 먹다 남긴 탕수육이나 난자완스 등을 맛볼 수 있었는데 생전 처음 먹어보는 그 요리들이 어찌나 맛있든지. 그러나 자장면을 배우러 중국집에 취직을 했고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죽어라 일을 했고 1년이 지나도록 기술 근처에는 가보지도 못했다.

그러자 정씨가 자신이 일하는 중국집에 자리가 났다며 데려갔다. 정씨가 일하는 중국집은 조그만 가게였기에 보직이 따로 없어 설거지도 하고 홀 서빙을 하다가 배달을 나가기도 했다. 그리고 틈만 나면 정씨가 면 뽑는 법을 비롯하여 칼질이랑 요리를 가르쳐 주었고 한가 할 때는 자장면을 직접 만들어 먹을 수 있게 해 주었다.

3년쯤 지나니까 어느 정도 기술도 익히게 되었으나 당시만 해도 먹고 자고 기술을 배운다고 월급은 거의 없었다. 그 바닥에서 몇 년을 살다보니 자리를 옮기면 월급이 조금씩 많아진다는 것을 알고는 다른 중국집으로 갔다. 새로 옮긴 중국집에서는 라면장이라고 해서 주방장 보조를 맡았다. 그러나 월급을 더 받기 위해서 1년쯤 있다가 또 다른 집으로 옮겼는데 옮길 때마다 월급도 오르고 기술도 늘었다. 그러다가 다시 정씨를 만나서 함께 일을 하기도 했다.

부민동 어느 중국집에서 주방장으로 있을 때 형수에게서 전화가 왔다. “삼촌아 형님이 죽었다.”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노가다를 하던 형이 밤늦게 술을 마시고 집으로 가다가 개천에 빠진 것이었다. 어머니가 살아계실 때 아랫방에 세를 든 아가씨가 있었는데 형과 눈이 맞았던 모양이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자연스레 그 아가씨가 형수가 되어 집안 살림을 돌보았던 것이다.

형은 그렇게 가고 아버지와 누나 둘, 남동생 둘에다 형 없는 형수와 조카가 넷이나 되었다. 중국집 주방장 월급으로는 열 식구 먹고 살길이 막연했다. 중국집을 그만두고 단무지 배달을 시작했다. 자전거에다 단무지를 싣고 괴정에서 대티고개을 넘어 하단까지 중국집을 찾아 다녔다. 신평 고개를 넘어갈 때는 그래도 의욕에 차 있었으나 단무지를 팔지 못해 무거운 자전거를 다시 끌고 돌아올 때면 어찌나 무겁고 서럽든지 눈물이 났다.

카페사장시절. ⓒ이복남

1년쯤 지나자 중고 오토바이를 하나 샀는데 날아갈 것 같았다. 장사도 제법 잘 되어 착실한 청년이라고 여기저기서 중매가 들어 왔는데 보는 족족 퇴짜를 맞았다. 누나 둘은 시집을 갔지만 홀시아버지에다 형수와 네 명의 조카, 그리고 남동생이 둘씩이나 있었으니 모두가 고개를 저었던 것이다.

한 중국집 아줌마가 김해 아가씨를 소개했고 장모 될 사람이 그를 마음에 들어 했다. 1983년 1월 1일 김경화(50)씨와 결혼을 했다. 하필 1월 1일에 결혼식을. 1월 1일은 1년에 단하루 중국집이 노는 날이었던 것이다. 본가 근처에 방을 하나 얻어서 살림을 시작했다.

단무지 장사는 그런대로 괜찮았지만 장모가 오토바이 타는 게 위험하다고 불안해했다. 마침 신평에 중국집 하나가 헐값에 나온 것을 알고 이리저리 돈을 끌어다가 개업을 했다. 장사가 썩 잘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식구들 먹는 것 걱정을 안 하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아버지가 탕수육이나 팔보채 같은 것을 잡숫고 싶다하면 즉각 만들어서 배달해 줄 수 있다는 것은 정말 신나고 기분 좋은 일이었다. 그러나 배달하는 종업원이 수금을 해서 도망을 가는 등 종업원들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 것을 보자 한 친구가 제안을 했다.

“술장사 한번 안 해볼래, 자장면 4~500그릇 파는 것 보다는 나을 거다.”

조만호씨 이야기는 3편에 계속.

* 이 내용은 문화저널21(www.mhj21.com)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내 이웃이 행복하지 않는 한 나 또한 온전히 행복할 수 없으며 모두 함께 하는 마음이 없는 한 공동체의 건강한 발전은 기대하기 어렵다. 우리는 함께 살아가야 할 운명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아름답고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가진 자와 못 가진자,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평등하게 공유할 수 있는 열린사회를 건설해야 한다. 쓸모 없음을 쓸모 있음으로 가꾸어 함께 어우러져 나아갈 수 있도록 서로 사랑으로 용서하고 화합하여 사랑을 나눔으로 실천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복남 원장은 부산장애인총연합회 사무총장을 역임하였으며 현재 하늘사랑가족상담실을 운영하고 있다.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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