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함께 일하는 부하직원 중에 ‘제럴드’ 라는 이름의 필리핀계 이민자가 있다. 그에게는 21살 된 아들이 있는데 자폐증을 앓고 있다.

미국에서는 대부분의 아이들이 16세만 되면 운전을 하는데 그 아이는 아직도 운전을 못해 어디에 가려면 늘 부모가 데리고 다닌다. 친구도 없어 늘 집에서 컴퓨터 게임만 한다.

얼마전 제럴드가 함께 점심을 먹던 동료들에게 의견을 물어왔다. 아들문제를 아내와 의논했는데 아무래도 필리핀에 가서 며느리감을 골라와야겠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한다.

이야기인즉, 아들아이가 이성을 알만한 나이가 되었는데 이곳에서는 여자를 만나서 사귀는 일이 힘들것 같다는 것이다. 형편이 어려운 필리핀 농촌에서 얌전한 색시감을 골라와 아들과 결혼을 시키면 그 아가씨가 아들을 보살펴 줄 것이 아니냐는 것이었다. 친척 중에 일을 주선해 줄만한 사람이 있다고 했다.

난 그에게 그건 별로 좋은 생각이 아니라고 말해 주었다. 우선 아이의 나이가 너무 어리고, 또한 힘든 현실을 탈출하여 미국에 오는 방편으로 결혼에 응한 여자가 정말 평생 그를 보살피고 사랑하며 살 수 있겠는가 깊이 생각해 볼 문제라고 지적해 주었다.

나의 부친도 비슷한 생각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언젠가 아버지도 내가 나이가 들면 얌전한 시골 아가씨와 결혼을 시켜 살게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집에 놀러온 5촌 당숙과 나누는 것을 들은 기억이 있다.

난 제럴드에게 장애인은 연애결혼을 하는 것이 더 좋을 수도 있다고 말해 주었다. 세상 어딘가에는 그 아이의 장애 뒤에 숨어 있는 순수한 영혼을 발견하고 사랑에 빠질 누군가가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도 해 주었다.

며칠후 그는 내게 아내와 다시 의논한 결과 아들의 결혼문제는 일단 보류해 두기로 결정했노라고 말했다.

‘나 죽고나면 누가 이 아이를 돌보아 줄 것인가?’ 장애인 자녀를 둔 부모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생각해 보았을 고민거리일 것이다.

비장애인 배우자가 장애인을 거두며 살아야 한다는 생각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어떤 사람을 사랑하다보니 그 사람에게 장애가 있는 것이지 처음부터 장애인을 돌보자고 사랑에 빠지는 사람이 있겠는가 말이다. 아마도 장애 자체를 사랑하는 비장애인 배우자는 없을 것이다. (장애인인) 나 자신도 나의 장애를 사랑할 수 없는데…

남자와 여자가 만나 사랑을 하고 결혼을 하여 가정을 이루고자함은 삶을 함께 하고자 하는 마음때문일 것이다. 헤어지면 보고싶고, 함께 있으면 좋고, 맛있는 것은 나누어 먹고싶고, 뭐 그런 마음들이 모여 사랑이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사랑함이란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베풀고 희생하는 일이 아니라 서로 주고받는 것이 균형이 맞을 때 이루어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듯 싶다. 이성간의 사랑에는 알파와 오메가적인 요소가 있어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커풀이 행복하게 잘 사는 것을 볼 수 있다.

장애인이기 때문에 사랑을 못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을 접할 기회가 없기 때문에 연애도 할 수 없다면 이는 슬픈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 아닌가 싶다.

나의 아내는 한때 사회복지를 공부하던 사람이다. 난 요즘도 그녀에게 가끔 이야기한다. 전공을 잘 살렸노라고. 장애인 한사람의 (나의) 복지는 확실히 챙기고 있으니 말이다.

나의 기억 속에는 내가 한때나마 걸어 다녔다는 사실은 흔적조차 없습니다. 다만 낡은 사진첩에 남아있는 한 장의 흑백사진 이 한때는 나도 걸을 수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해 줄 뿐입니다. 세살에 소아마비를 앓았습니다. 81년에 미국에 와서 지금까지 살고 있습니다. 주정부 산재보험국에서 산재 근로자들에게 치료와 보상을 해주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저의 살아가는 이야기를 여러분들과 나누고 싶습니다. 누군가 이글을 읽고 잠시 즐거울 수 있다면 정말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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