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집에는 아내가 한국에서 소중하게 싸들고 온 책들이 있다. 비행기를 타며 1인당 2개로 제한된 가방에 넣어 가지고 올 수 있는 물건은 그 양이 얼마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내는 무게가 많이 나가는 책을 가지고 왔다. 직장생활하며 틈틈히 사모은 책들 중에서 정말 아끼는 놈들을 골라온 것이다.

10여년전부터는 내가 사는 동네의 도서관에 한국책 코너가 생겼고 더러 신간도 들어온다. 도서관에서는 3주동안 책을 빌릴 수 있고 필요하면 전화로 3주씩 연장도 가능하다. 그래서 난 그동안 돈을 주고 한국책을 사서 본 기억이 별로없다.

얼마전부터 아내의 책들을 읽고 있다. 요즘은 회사일도 다소 한가하기 때문에 주로 아침시간에 책을 읽는다. 아침에 출근해서 컴퓨터를 켜고 급한 이-메일을 처리한 후 아내가 보온병에 담아준 커피를 마시며 한 20-30분 가량 책을 읽는다.

아내가 선별해서 산 책 중에서 또 골라온 것이라 그런지 다들 내용이 충실하고 마음에 든다.

며칠전 이문구의 ‘줄반장 출신의 줄서기’ 라는 책에서 이런 구절을 읽게 되었다. ‘낡은 돗자리 위에서 살 따라 찟어진 부채로…’ 김광길 교수가 어머니를 그리며 쓴 ‘어머니’ 라는 시의 한부분이다.

이 글을 읽으며 나는 40년 가까운 시공을 넘어 잠시 관훈동 외가에 다녀왔다. 외가는 채 12평도 못되는 작은 공간이었는데 그래도 방이 세칸에 마루가 있고 손바닥만한 마당에는 반지하 창고와 그 위에 장독대까지 있었다.

멀쩡한 돗자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할머니는 굳이 낡아서 귀퉁이가 잘려나가고 실이 풀린 돗자리를 고집하셨다. 여름이 되면 돗자리 위에 누워 대나무 살에 종이를 붙여 만든 부채로 더위를 쫓곤 했었다.

날아드는 파리를 내리치다 살을 부러트리기도 하고 더러는 파리의 피를 뭍히기도 하여 여름이 끝나갈 무렵이면 살 따라 찟어진 부채가 생겨나곤 했다.

내가 따스한 아랫목에서 식혜나 수정과 혹은 고사떡 등의 밤참을 먹을 수 있는 겨울보다 더운 여름을 좋아했던 것은 해가 기울어 대문앞에 그늘이 지기 시작하면 의자를 내다놓고 앉아 세상구경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앉은 자리에서 오른쪽으로 10여미터 떨어진 곳이 큰길가였고, 길모퉁이에는 골목안 11가구집에 사는 꽈배기 장사의 리어커가 있었다. 고소한 기름냄새와 카바이트 불빛에 야간수업을 마치고 지나가던 학생들이 꽤나 모여들곤 했었다.

교복을 입고 깔깔거리며 거리를 지나가던 그들의 모습이 어찌나 부러웠는지 모른다.

어둠이 깔리면 긴하루를 보내고 봉지쌀이나 새끼줄에 매단 수박따위를 들고 집으로 돌아오는 이웃들이 지나가고 밤이 더 깊어가면 술에 취한 취객이나 화장품냄새가 물씬 풍기는 화류계 여성들이 지나갔다. 전신주에 달린 보안등이 켜지는 작은 공터에서는 밤늦도록 아이들이 뛰며 놀았다.

그 무렵 난 낮에는 책을 보고 밤에는 대문앞의 의자에 앉아 세상을 들여다보며 살았다. 세상의 한부분이 되어 살지 못하고 객석에 앉아 보낸 세월이다.

대나무 살에 종이를 발라 만든 부채가 플라스틱 소재로 바뀌기 시작하며 그나마 나의 세상바라보기도 끝이 났다. 집으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장애인이기 때문에 외롭게 살아야 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장애인이기 때문에 곁에서 바라만 보아야 하는 세상은 사라져야 마땅하다.

나의 기억 속에는 내가 한때나마 걸어 다녔다는 사실은 흔적조차 없습니다. 다만 낡은 사진첩에 남아있는 한 장의 흑백사진 이 한때는 나도 걸을 수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해 줄 뿐입니다. 세살에 소아마비를 앓았습니다. 81년에 미국에 와서 지금까지 살고 있습니다. 주정부 산재보험국에서 산재 근로자들에게 치료와 보상을 해주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저의 살아가는 이야기를 여러분들과 나누고 싶습니다. 누군가 이글을 읽고 잠시 즐거울 수 있다면 정말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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