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범 총장님께.

이상호입니다. 술자리에서 따뜻하게 논의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았음에도 단 한 번도 하지 않은 채 이렇게 결례를 범하게 되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잘 아시다시피 장애인계는 진보와 보수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찬반을 넘어 단결을 모색하고 그 성과를 이어 장애인차별금지법 제정에 장애인계가 하나가 되는 데 총장님의 정치력은 그 빛을 발했습니다. 그야말로 이권과 인권을 넘나드는 대의 정치를 실현했다 할 것입니다.

선수층이 상대적으로 얇은 장애인계로 볼 때 총장님의 정치력은 보석과 같다 할 것입니다. 어디 장차법 뿐이겠습니까? 각종 현안에서 필요성만 확인 된다면 총장님의 저돌적인 돌파력은 적어도 장판에서는 발견하기 힘들다 할 것입니다. 참으로 대단한 역량입니다.

장애인당사자주의에 대한 비판과 목표를 수행코자 하는 진정성입니다!!!

최근 총장님은 장애인당사자주의를 그 어느 때보다 강하게 주장하고 계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진정성을 떠나 뜨악하게 생각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만일 총장님의 주장이 장애인당사자만 장애인계의 자기대표권을 수행 할 수 있다고 해석 할 때 총장님의 물리적인 상황(총장님은 비장애인입니다)은 어찌 이해해야 합니까? 총장이라는 지위는 어느 조직을 막론하고 실질적인 권한을 행사하는 자리라고 할 때 총장님의 장애인당사자주의는 어찌 받아 들여야 합니까?

꽤 긴 시간 우리는 장애우라는 망령의 단어를 정리하기 위해서 노력해 왔습니다. 논의의 찬, 반을 떠나 현실은 장애우라는 단어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는 듯 합니다. 민주노동당은 과거 장애우라는 표현을 썼다가 저항을 받아 철회한 바 있습니다. 이명박 당시 서울시장은 공문을 통해 장애우라는 표현을 쓰지 말 것을 권고한 바 있습니다. 명확히 확인하기는 어려우나 진보와 보수 모두 장애우라는 표현을 쓰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입장인 듯 합니다. 진보와 보수! 모두 장애인 당사자가 장애인문제 해결에 주체임을 인정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오기까지 따뜻하게 어울려 살자 라는 좋은 뜻을 곡해하고 있다는 오해를 그것도 일부 시민사회단체 로부터 상당기간 감내해야 했습니다.

장애인당사자주의는 장애인복지전달체계를 둘러싼 불평등한 권력관계를 비판, 견제하고자 하는 장애인당사자 중심의 정치적 연대(이익섭 2002)라고 명명하고 있습니다.

의료모델에서 사회모델로의 전환을 지향하며 그것의 주요한 동력은 장애인당사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함축적으로 의미한다 할 것입니다.

아이러니 하게도 장애우의 표현은 사회전반에 만연한 채 그 불편한 똬리를 틀고 있습니다. 장애인당사자주의는 장애인복지학 개론에 언급될 정도로 성과를 다하고 있으나 과도한 이념성이 문제인지 유교문화권에서 나타나는 일시적인 현상인지 장애우라는 표현보다 그 힘의 수위는 나락을 걷고 있습니다.

애초에 장애인당사자주의가 이권과 인권을 명확히 나누는 것이 불가능한 것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다시 말하면 반대할 수도 있고 악용할 수도 있다는 반증이겠지요! 이러한 연유로 일각에서는 유사, 생물학적 당사자주의의 폐해를 예견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불평등한 권력관계는 해소되지 않았고 이권의 염증은 현재진행형입니다.

장애라는 의제가 당사자보다 대리인에 의해서 주장되다 보니 장애인당사자주의는 본질적으로 대리인과 주류사회에게는 불편한 것입니다. 그에 반해 장애우라는 표현은 장애의 의제에서 비장애인에 역할을 중심으로 하니 온정적 시각에 익숙한 주류사회에서는 반겨 맞을 표현이라 할 것입니다. 찬반을 떠나 총장님께서도 주요하게 언급하고 계시는 장애인당사자주의의 목표에 대해 환기할 필요가 있을 듯 합니다.

첫 번째, 장애인당사자주의는 비장애인을 배제하는 것을 결과로 하는 천박한 의미는 아닐 것입니다. 보호와 의료적 조치에서 머물러 있던 장애인당사자에게 비장애인과 동등한 삶을 지역에서 영위할 것을 목표로 하는 사회모델의 또 다른 표현입니다.

장애인가 비장애인가 하는 물리적 대입은 장애인당사자주의의 명확한 목표를 희석화합니다. 비 장애를 배제하는 배타성은 장애라는 의제가 희소성에서 벗어나 사회전반에 공론화하는데 있어 치명적인 약점으로 작용할 것입니다. 사상은 특정집단을 배제할 때 스스로 소멸하게 됩니다. 또한 총장님께서도 잘 아시다시피 장애인당사자 보다 더욱더 장애운동에 헌신하고 있는 비 장애 활동가들의 헌신과 우리는 마주하고 있습니다. 장애인당사자주의에 대해 집착에 가까운 논쟁을 하고 있는 저로서는 최대한 장애인당사자 입장에서 활동하려 하지만 장애인계가 비장애인을 배제할 정도로 도덕적인가에 대한 의문은 의구심을 넘어 자괴감마저 들게 합니다. 도덕적 우위를 확보하지 못한 사상은 그 생이 짧을 수밖에 없습니다.

장애인당사자주의를 둘러싼 기형적인 대입은 주류사회에서는 배타적인 담론으로 평가절하 될 수 있는 위험한 요인을 내재할 수밖에 없고 이는 역차별을 조장할 것입니다. 나아가 이권을 중심으로 한 기형적 대입을 가능케 합니다.

두 번째, 장애라는 의제에 대해 어떤 관점을 가지고 있는가에 대한 실천적인 질문입니다. 특정 유형이 그동안 다 해먹었으니 다른 유형에게 권한을 양도해야 한다는 논리는 복지 귀족에 접근할 생각조차 없는 다수의 헌신적인 활동가들의 얼굴에 먹칠을 하는 것입니다.

또 다른 차별이며, 불평등한 사회, 환경을 변화시켜야 하는 것이 주요 목적임을 각인하고 있는 장애인당사자주의자, 헌신적인 활동가들에 대한 모욕입니다. 표현을(변혁적 장애운동이든 장애인당사자주이든) 떠나 그 분들은 적어도 비장애인에 가깝게 신체활동을 극대화 시키고자 했던 재활의 목표보다 장애를 가지고 있는 장애사회가 변할 것을 준엄하게 명하고 있습니다.

물리적인 상태만을 가지고 논하는 것이 장애인당사자주의의 진정성이 아님을 강변하고 싶은 것입니다. 물리적인 상태가 귀결이 아닌 이권인지 인권인지를 명확히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 이제 장애인계를 들끓게 하고 있는 개발원 문제를 짚어 보겠습니다.

17대 국회에서 장애를 둘러싼 거의 모든 노력은 장차법으로 귀결되었습니다. 장복법 개정 활동은 거의 찬밥 신세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 할 것입니다. 장복법 개정에 매달린 이유는 이렇습니다. LPG가 때만 되면 축소니 폐지니 논쟁에 시달리는 것은 법적 근거가 없기 때문입니다. 조치제이다 보니 언제든 정권에 입장에 따라 사라질 위기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활동보조인 역시 조치에 따라 예산은 확보하고 있으나 법적 근거를 확보하지 못할 경우 언제든 사라질 수 있다는 반증입니다.

또 하나! 재활에 대한 전향적인 입장의 변화와 자립생활로의 전환 역시 그에 해당하는 전달체계를 확보하지 못하면 이 또한 언제든 사라시질 수 있다는 위기의식이었습니다. 근거를 마련하지 못한다면 탈 시설이고 뭐고 언제든 자립생활은 위기를 맞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습니다.

장차법이 아무리 훌륭하게 제정이 된다 해도 전국적인 장애인의 일상에서 권리의 싹이 틔워 져야 한다는 필요성입니다. 냉소적이기는 하나 현재의 장애인복지전달체계는 권리를 목표로 하고 있지 않는 듯 합니다. 대략 5000천만 정도의 연 예산으로 절대빈곤 선상에서 활동하고 있는 자립생활센터도 주요사업에서는 수어를 공격적으로 배치하고 있는 것과 반해 다른 전달체계에서는 이를 발견하기 힘들었습니다.

장애인당사자중심의 시스템이 전달체계 안에 배치되어야 장차법의 합목적성이 실현될 수 있을 것이라는 전략적인 판단입니다. 인권위에 수백 명의 장차법 관계자가 배치된다 해도 그들이 전국을 뛰어다니며 장애인차별에 맞서는 것은 기실 불가능한 일이라 생각했습니다. 지역의 곳곳에서 장애인차별의 감수성을 누구보다 월등하게 견지하고 있는 중증장애인당사자가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고 판단했습니다. 그것은 당연히 자립생활입니다. 물론 장차법 제정 노력에 찬물을 끼얹을 생각은 추호도 없음을 밝혀 둡니다.

장복법 개정의 의미와 상관없이 장차법 대비 서자 취급을 받았으니 싸움은 상당히 외로웠습니다. 20여일 넘게 단식을 하고 있어도 찾아오는 이들은 자립생활 진영을 빼 놓고는 거의 찾아 볼 수 없었습니다. 여의도 국회 앞에서 농성장을 마련했지만 여의도에 사무실을 두고 있는 메이저 조직들조차 방문은 없었습니다.

저는 장애인개발원이라는 명칭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장애인을 개발해야 하는지 장애사회를 변화시켜야 하는지에 대한 변별력도 없는 이들이 무슨 개혁을 논하는 것인지 참으로 우스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절대로 명칭이 장애인 개발원으로 정리되지 않을 것이라 예상했습니다. 착각이었습니다. 들끓는 자괴감에 술잔과 마주해야 했습니다.

해당 의원실 장복법 개정 T/F에 참여했던 지도그룹에게 묻고 싶습니다. 장애인당사자가 비장애인과 동등한 신체기능을 확보할 때까지 때 까지 해병대 캠프쯤에서 모진 훈련을 받아야 하는지요? 그것도 안 되면 보조공학의 도움을 받아 척수장애인이 쌀 한가마니를 들 때 까지 입소와 퇴소를 반복해야 하는지요? 또한 그것이 수십 년 걸린다고 해도 장애인당사자는 끊임없이 무능력을 의심받으며 인내해야 하는 지요?

자립생활의 이론적 배경을 집대성한 거번 데종(Gerben DeJong) 은 이렇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도움 없이 수행 할 수 있는 과제의 양이 아니라 도움을 받더라도 영위할 수 있는 삶의 질이 장애인당사자의 목표다! 장애인당사자의 신체기능을 극대화하는 것이 목표가 아닌 장애를 가진 장애사회의 변화 이어야 한다!"

개발원의 목표는 장애인을 개발하는 것이 아닌 이러한 장애인당사자의 욕구를 반영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복법 개정의 뒤안길에서 장애인개발원의 역할은 난도질 당하고 말았습니다.

총량을 늘리는 것이 목표가 아닌 장애를 판정하는 것이 이후 개발원의 목표라면 그나마 뻔한 자원에 접근하는 것도 검찰청에서 조사받는 것 보다 더한 측량을 모욕감을 무릅쓰고 장애인당사자는 감내해야 할 것입니다. (현장에서는 김치 한 포기 받는 것에도 장애인당사자의 주민번호까지 까발려야 합니다. 개인비밀보호 정책에서 장애인당사자는 누락되어 있습니다. 이에 원인은 장애인당사자가 도덕적 해이가 있을 것이라는 예측에 기인합니다. 주류사회가 장애인당사자에게 도덕성을 시비할 정도로 깨끗한지요?)

이 책임은 누가 져야 합니까? 장애라는 의제 자체가 희소성에 머물고 있으니 전문성이라는 미명아래 장애인당사자의 결코 불가능한 비장애인의 꿈을 향해 나락을 걷고 있습니다. 일부 인사는 우습게 듣겠지만 장애는 개성입니다. 예방되거나 폐기되어야 할 대상이 아닌 것입니다.

개발원이 장애인계의 의견수렴 없이 조직을 확대하고자 하는 의도에 맞서 '장애인개발원바로잡기공동대책위원회'(이하 공대위)를 꾸렸습니다. 불과 몇 개월 사이 아주 당황스런 상황을 목도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조직의 장은 비장애인입니다. 또한 당시에도 그의 유임 설은 꽤나 설득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공대위의 목표는 개발원 이사회를 강제하여 불필요한 공급자의 빵을 늘리는 것을 막기 위함입니다. 이 논의는 현재진행형이며 정리가 잘 되지 않을 경우 재앙으로 이어 질 것입니다.

허나 현재의 논의는 개혁방안은 뒤로 한 채 장이 누가 되는 가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묻고 싶습니다. 유임설에 대해 왜 공대위를 제외한 장애인계는 침묵한 것입니까? 당시 장애인계의 일부 조직은 현재의 장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정부에서 꽤 영향력을 갖고 있는 인사이니 장애인계가 잘 역할을 한다면 득이 될 것이라 했습니다. 불과 며칠 사이에 말을 바꿔 이제 장애인당사자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까? 개별조직의 주관적인 이해관계에 따라 상황을 호도하는 것은 아닙니까?

나아가 특정 장애유형이 그동안 권력을 다 했으니 이제 다른 유형이 되어야 한다는 논리가 있습니다. 한국사회에서 비장애인을 뛰어넘는 권한을 갖고 있는 장애유형이 있습니까? 아무리 후한 점수를 주려 해도 이는 유형 패권주의입니다.

이름만 대면 다 알 수 있는 조직들은 그동안 시설생활인에 문제, 나아가 지적, 정신장애인의 문제에 대해 성명서 하나 발표하지 않고 침묵 해 왔습니다. 나아가 장애가 중증이니 따뜻하게 시설에 있어야 하지 않나라는 망언 역시 서슴지 않았습니다. 제 보기에는 헌신을 다하고 있는 비 장애활동가, 자립생활 진영만이 이 외로운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정리해 보겠습니다.

첫 번째, 현재의 장은 비장애인입니다.

물론 이에 대해 반론은 그가 재임했던 처음부터 지금까지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허나 갑작스러운 것을 떠나 당혹감을 감추지 못할 정도로 논의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총장님에게 이 문제에 관해 어떠한 입장도 들은 바 없습니다.

두 번째, 유형 패권주의입니다. 특정유형에서 그동안의 권력을 독식했으니 다른 유형이 되어야 한다는 유형 패권주의를 말하고 있습니다. 나아가 특정인에 대한 지지를 암묵적으로 공론화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이 논의의 귀결이 장애인당사주의의 진정성을 호도한 채 기형적으로 흐를 경우 비장애인에 대한 역차별 역시 이후 상당기간 존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쯤 되면 장애인당사자주의는 적어도 개발원장을 인선하는 과정에서 빠질 때가 된 듯 합니다. 장애인당사자주의의 찬, 반을 떠나 그것을 신앙처럼 생각하고 생의 마지막 담론이며, 깃발임을 믿어 의심치 않고 활동하고 있는 수많은 장애인당사자주의자들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처가 된 것입니다.

탈 시설, 지적, 정신장애인의 자립생활을 향해 헌신을 다하고 있는 비 장애 활동가들에게 죄책감을 넘어 무릎을 꿇고 읍소를 다 해야 할 대목입니다.

또한 장애인당사자가 장애관련 기관의 장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에 전혀 이의가 없음을 밝혀 둡니다. 다만 지금까지의 선례에 대해 지적해 보겠습니다. 장애인고용촉진법은 직업재활을 포괄하게 되었습니다. 원인이 이에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보호 작업이라는 미명아래 월 10만원도 안 되는 급여를 장애인당사자는 받고 있습니다.

그것도 대기자가 많으니 언제 쫓겨날지 모르는 실존적 위기에 봉착하고 있습니다. 수입은 차지하더라도 그나마 시간이라도 때워주는 것이 고맙다는 것 이외에는 이렇다 할 반응은 없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것을 두려워하는 주위의 시선은 그 혹은 그녀가 시설로 갈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대리인들에게 떠도는 유행어로 시설로 유학을 가야 하는 것입니다. 당연히 그 혹은 그녀는 지역사회로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게 됩니다.

일단 장애인당사자로 기관의 장이 되면 주류사회로부터 상징성과 경륜을 인정받게 되니 다음은 정치입니다. 물론 기관의 장으로 복무할 때 장애인계의 요구는 뒤로 미뤄지게 됩니다. 인지도가 먼저이니 정부와 장애인계의 갈등을 수반하는 정책은 관심에서 멀어지게 됩니다. 장소 빌려주는 정도로 성의를 다 했다는 말을 위안으로 삼아야 합니다. 선배로 존경했던 분의 의도인지는 모르겠으나 장애인당사자가 기관의 장으로 있는 곳에서 저항은 삼가해야 합니다.

공권력에 의해 무수한 비명과 함께 끌려 나오는 참담함을 겪게 될 것입니다. 그들에게 장애라는 물리적인 실존은 있으나 장애인당자사자주의는 시간이 갈수록 발견하기 힘들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애인당사자가 기관의 장이 되기 위해 노력해야 갰지요! 다만 역차별과 유형패권주의 역시 동일한 비중으로 언급되어야 할 것입니다. 노력한다 해도 장애인당사자주의라는 말은 입에 담지 않을 것입니다.

총장님!!! 이 글을 쓰기에 앞서 많은 고민과 마주해야 했습니다. 그나마 있던 성과마저 침몰 시킬 수 있지 않을까? 열과 성을 다하고 있는 많은 장애인당사자에게 상처가 되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허나 상징보다 더욱 위력한 것은 대중적 토대와 궐기가 목표가 되어 상징으로 머무는 것이 아닌 장애인당사자의 의견개진의 확대와 욕구의 반영까지를 추동해야 한다 생각합니다. 그것은 중증장애인의 역량강화와 동시에 작동되어야 할 것입니다. 장기간에 걸친 것이라고 해도 주류사회에서 배제되어 왔던 중중장애인의 삶의 노정을 보았을 때 그 시간에 반비례는 이제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샛길에 머무는 것이 아닌 길목을 볼 줄 알아야 하지 않을까요? 무릇 총장님과 견주어 개뿔도 역량이 없는 제가 이렇듯 글을 빌리는 것은 총장님이 갖고 계신 예지와 실천의 담론에서 함께 하기 위함입니다. 총장님의 긍정적 자기전복을 기원합니다.

추서;

어제 지적 장애여성과 만남을 가졌습니다. 장애관련 강좌를 들으시기에 재미있으시냐? 물었습니다. 재미없다 하시기에 안 들으셔도 되지 않을까요, 라고 슬쩍 물어봤습니다. 순간 당황할 정도로 정색을 하시며 꼭 들어야 한다 하셨습니다. 그 분의 학대와 방치의 궤적들을 알기에 눈물이 앞을 가렸습니다. 권리에 눈 뜨고 계신 것이었습니다. 저야 건달이니 대충 술잔이나 기울이며 양아치 짓을 하고 있지만 어디에 복무해야 하는 지 눈앞이 선명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가슴이 먹먹해 집니다. 우리는 어디에 있어야 합니까?

이렇듯 싸구려 논의를 주장해야 하는 제가 한심스럽습니다. 아울러 장애운동의 역사와 이에 바탕한 개연성을 무시한 채 양비론에 집착하는 에이블뉴스도 마땅치 않습니다. 바라건대 댓글보다는 공개의 장에서 그것도 아니면 명예훼손으로 고발이라도 당했으면 영광이겠습니다.

별로 실현가능성은 없어 보이나 언급한다면 이후 개발원의 개혁과제는

1. 이룸센터가 왜 재정상황이 열악한 풀뿌리 조직은 들어 갈수 없도록 되었는지에 대해 밝혀야 합니다.

2. 이사진의 과반은 장애인계에서 선출된 대표로 인선되어야 합니다.

3. 임, 직원의 인적쇄신이 보장돼야 합니다.

4. 그동안 구태에 대해 침묵했던 관련 인사들에 대한 추적과 동시에 원인을 밝혀야 합니다.

5. 지적, 정신장애인의 참여를 보장할 수 있는 연구와 적용방안이 보장되어야 합니다.

[토론합시다]장애인개발원과 장애인당사자주의, 어떻게 보십니까?

장애운동을 한다는 것은 유전적으로 무척 훌륭한 DNA가 없다면 기실 불가능한 것이다. 자본주의는 항상 화려함을 강점으로 한다. 재벌을 비난하지만 재벌에 편입되고 싶은 욕망과 일치한다. 물론 loser(루저: 패배자, 손해 보는 사람)가 재벌로 편입되는 일은 통계학적으로 잡히지 않을 만큼 불가능하다. 자본의 입장에서 천박하거나 가난한 것은 화려한 조명아래 어두운 그늘이 된다. 물론 그것을 들여다보거나 살펴보려하는 용기를 가진 이는 드물다. 주위를 살펴 볼 만큼의 여유는 자본의 입장에서 허락되지 않는다. 하루하루 링거를 꽂은 채 연명치료를 하는 모양새로 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세월호 이후로 대한민국은 늘 울고 있다. 마치 타이게투스산(고대 스파르타인 들이 불구자 혹은 원치 않은 아이들을 버렸던 산의 이름)에 울려 퍼졌던 통곡처럼, 누군가는 타이게투스산에 울렸던 통곡을 대신해야 하지 않을까? 헛소리를 넘어서는 수준에서 통곡을 대신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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