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토피아라는 말은 이상 국가를 의미한다. 좀 더 상세히 설명하기 위하여 네이버의 지식인을 잠시 인용해보면 다음의 정보가 검색이 된다.

Utopia는 그리스말의 Outopos에서 유래한다. Ou는 not, topos는 Place이다. 그러니까 유토피아는 바로 not Place(어디에도 없는 곳), 다시 말하면 이상의 나라이다. '유토피아' 의 원제목은 '사회생활의 최선의 상태에 대한, 그리고 유토피아라고 불리는 새로운 섬에 대한 유익하고 즐거운 저작' 이다. [네이버 지식인 인용]

토마스 모어가 이 책을 쓰게 된 동기는 당시 영국의 정치경제의 모순을 풍자하고 비판하려는 데 있었다. 요컨대 사유 재산의 부정, 계획적인 생산과 소비, 인구 배분의 합리화, 사회적 노동의 계획화, 노동 조건의 개선, 소비의 사회화가 실현되는 새로운 사회 실현을 모어는 염원하고 있는 것이다. 모어의 최초 의도는 풍자, 또는 비판이었지만 현대로 넘어오면서 유토피아의 의미는 보다 포괄적인 개념으로 발전하게 된다.

재활. 나에게 있어서 재활은 삶을 지탱하는 거의 전부와도 같다. 몸이 아프고 나서 새벽잠이 많이 없어졌다. 살고 있는 곳이 경기도 변두리의 수령이 꽤 지난 아파트단지 이기때문인지 입주 당시 심었던 나무들이 제법 울창하게 숲을 이뤘고 동틀 무렵 아파트 숲 정원에서는 새소리가 끊이지 않고 들려온다. 하지만 나는 베란다 창문을 열지 못하고 창밖의 새소리를 누워서 듣기만 한다. 혼자 힘으로 움직일 수 있는 행동반경이 이미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나의 유토피아는 모어가 언급했던 이상 국가처럼 거창하지 않다. 창문을 열고 싶을 때 창문을 열고, 커튼을 닫을 때 커튼을 닫히는 정도. 화장실 가고 싶을 때 화장실 가고, TV, 음악을 듣고 싶을 때 내의사로 음악을 듣는 정도. 몸의 장애는 그 정도의 희망마저 송두리째 앗아가 버렸다.

재활에 생활의 많은 의미를 부여했기 때문에 재활 이라는 이름이 들어간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는 것이 중요한 일과가 된 이즈음. 내가 꿈꾸던 그런 유토피아의 가능성을 경기도 재활공학 서비스 연구 지원센터에서 발견하게 되었다. 센터 내에 마련되어 있는 이른바 체험 룸 코너에서 내 작은 소망을 현실로 만나면 된 것이다.

시설을 잠시 살펴보면 먼저 전동침대. 전후좌우 상하의 조절이 가능해서 와상장애인들에게 필수적인 적절한 자세변환이 가능하고, 욕창을 방지하는 공기 순환식 에어매트가 있다. 장애당사자가 침대에 누워 창문, 커튼, TV, 전화 등 일상의 많은 것들을 원터치로 통제 가능하게 되어있다. 천장에는 이동용 리프트가 달려있어 레일을 타고 움직일 수 있어 중증장애인도 일상생활을 어느 정도 영위할 수 있다. 이 모든 것 들이 컴퓨터 조작만으로 가능하게 이미 프로그램화 되어 있었던 것이다.

나는 이정도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할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역시 돈이다. 이정도의 시스템을 갖추려면 적지 않은 비용이 들어간다는 점이다. 이미 노동을 상실한 장애인에게 수입창출의 기회는 거의 없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즉, 체험 룸의 시스템이 탐나고 갖고 싶기는 하지만 내 몫이 될 가능성은 현 시점에 서 전혀 없어 보인다.

결국, 모어에게든 나에게든, 역시 유토피아는 꿈속에서나 가능한 어디에도 없는 곳(not Place)인가….

1958년 서울 출생. 초등학교 시절, 전후 베이비붐 1세대답게 오전반 오후반을 넘어 저녁 반까지 나뉠 정도로 유달리 많은 또래들과 부대끼며 살았다. 늘 그렇듯 살아간다는 것은 주연과 조연의 적절한 배치. 안타깝지만 그 많은 또래들과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주목받은 적이 없는 그림자 인생이었다. 많은 이들이 시대의 훈장으로 여기는 민주화 시절도 공중전화박스에 숨어 지켜보는 것으로 흘려보냈고, 그때의 투사들이 역사의 주인공으로 나섰던 참여정부의 시대도 내게 주어진 역은 노동과 식량을 바꾸는데 익숙한 도시노동자. 하지만 살아간다는 것이 결코 주연들만의 이야기가 될 수 없다는 것, 바로 그런 이야기를 쓰고 싶다. 내 글을 읽는 모든 분들에게 감사드리고 그들에게 글을 읽는 작은 재미를 드릴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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