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별(Discrimination)의 현실은 계속이어져 오고 있다. 역사가 진행되어 왔던 긴 시간 중에 차별이 없었던 순간이 있었는가? 그 대답은 "결코 아니었다(Of course not!)"이다. 차별의 현장은 언제 어디에서나 쉽게 발견되어진다.

2008년도. 장애인차별금지 및 구제에 관한 법률이 통과된 해에서 차별은 쉬지 않는다. 차별이란 놈은 지치지도 않는다. 그 생명력이 대단히 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차별은 누가하는가?

바로 사람이다. 차별을 없앤다고 하였지만, 차별을 야기시키는 장벽은 여전히 존재한다. 그런데 차별을 하면서도 차별을 하지 않은 것처럼 오해할 수 있는 또하나의 현장이 있다.

누가복음을 살펴보면 18년간 귀신들려서 허리를 펴지 못하는 여인이 등장한다. 그녀가 귀신들린 것과 아울러 척추장애인으로 살아온 지 18년이나 되었다. 그런데 이 여인이 발견되어지는 현장은 바로 회당(會堂, Synagogue)이다.

유대인들에게는 '정결에 관한 법률'이 있다. 불결한 것을 가까이 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들은 이러한 법를 굳게 지키기 위해서 제사를 지낼 때, 흠이 있는 동물은 바치지 말라고 하였다.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Good Samaritan's Tale)에서 제사장이나 레위인이 강도 만난 사람을 피해 간 것도 바로 정결의 법을 준수하기 위해서였다.

제사를 주관해야 할 사람이 강도만난 사람을 만나 그의 피를 손에 묻히게 되면, 이는 정결의 법을 지키지 않는 것이란 주장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지만 18년간 귀신들려 척추장애인이 된 여인은 회당 안에서 발견되어지고, 만나게 된다. 분명히 정결의 법을 지키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면 이는 심각한 문제가 아닌가? 아마도 몇가지를 추측해 볼 수 있다. 한가지는 정결의 법을 지킨다고 하였지만, 회당 안에 들어온 여인을 내쫓지는 않았다는 것이요, 다른 한가지는 비록 회당 안이었지만, 불결한 여인에게 다가가서 나가라고 하는 것은 또 하나의 불결을 자행하는 것이어서, 가까지 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중요한 사실은 회당 안에 일반인과 이 여인은 함께 있었다는 사실이다. 보여지는 현상만을 살펴보면 분명히 '통합(Integration)'이라고 할 수 있다 함께 있다는 것, 그것은 확실히 통합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는 장애인 차별의 대상이었고, 회당 안에 있었지만 그녀는 여전히 차별을 받고 있었다. 통합현장에 있었지만 그녀는 심각한 차별을 받고 있었다. 그녀가 진짜 차별을 받고 있었을까? 그것은 예수님과 주변 사람들이 나눈 이 여인에 관한 대화 내용에서 미루어 알 수 있다.

회당 안에 있었던 사람들 중 어느 누구도 이 여인에게 다가간 사람은 없었다. 이 여인을 내쫓지 않은 것은 가까이 하기 싫기 때문이지 사랑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들은 예수님이 이 여인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에 대하여 촉각을 세우고 있었다. 게다가 이 날은 유대인들이 아무 것도 하지 않는 날로 정한 안식일이었다. 만일 예수님이 안식일에 이 여인과 함께 한다면 정결의 법과 안식일 법 두개 다 위반하는 것이 된다.

이에 예수님은 이들의 생각을 알고 이렇게 반문한다. "안식일에 생명을 구하는 것이 옳으냐 생명을 죽게 하는 것이 옳으냐?" 답은 무엇일까? 당연히 생명을 구하는 것이다. 안식일 법에는 생명을 구하는 일을 해도 좋은 것이라고 예외규정을 두고 있었다.

이 보다 더 충격적인 선언을 예수님을 공개적으로 하였다. "아브라함의 딸이 귀신으로 부터 해방되는 것이 잘못되었는가?" 예수님은 귀신들려 허리를 펴지 못하는 여인을 "아브라함의 딸, 즉 믿음의 딸"이라고 선언했다. 너무나 큰 충격이었다. 예수님은 충격을 주는 분이다.

예수님은 회당 안에서 함께한 그 여인을 같은 공간에 있는 여인이 아니라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갖고, 더불어 살아가야 할 인간으로 인정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을 둘러싸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은 그 여인과 같은 공간에 있었지만 함께 하지는 않았다. 사람들은 통합된 현장에 있었지만, 실제로는 차별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종종 장애인을 이렇게 부른다. 장애(障碍)라고 표기하는 한, 막을 障, 거리낄 碍의 뜻은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을 의미하는 것 뿐이다. 이렇게 불리어지는 것이 장애(障碍)의 뜻이기에, 이는 용어 그 자체로만으로도 물리적인 공간에 같이 있다하여도 차별을 조장하는 용어가 되기 때문이다.

함께 한다고 하여 차별이 없는 것이 아니다. 함께 있지만 그를 소외시키면 그것이 진짜 차별이다. 물론 함께 하는 것 조차 거부하려는 사람도 존재하지만, 함께 한다는 것만으로 차별을 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넌센스이다.

18년간 고통당했던 여인에게 가해진 가장 큰 고통은 함께 하지 않는 사회가 주는 고통이었다. 때로는 함께 한다고 하면서 더욱 소외시킨 부분이 더 큰 고통으로 다가왔다. 성경에 나타난 차별은 지금도 현존한다. 이러한 차별이 사라질 때 비로서 차별없는 세상이 될 것이다.

이계윤 목사는 장로회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숭실대학교 철학과 졸업과 사회사업학과 대학원에서 석·박사과정을 수료하였다. 한국밀알선교단과 세계밀알연합회에서 장애인선교현장경험을 가졌고 장애아전담보육시설 혜림어린이집 원장과 전국장애아보육시설협의회장으로 장애아보육에 전념하고 있다. 저서로는 예수와 장애인, 장애인선교의 이론과 실제, 이삭에서 헨델까지, 재활복지실천의 이론과 실제, 재활복지실천프로그램의 실제, 장애를 통한 하나님의 역사를 펴내어 재활복지실천으로 통한 선교에 이론적 작업을 확충해 나가고 있다. 이 칼럼난을 통하여 재활복지선교와 장애아 보육 그리고 장애인가족의 이야기를 나누면서 독자와 함께 세상을 새롭게 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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