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는 연대생이고 사회복지학과 86학번이었다. 사실 사회복지에 관심이 있어서 였다기 보다 그냥 점수에 맞춰서 학과를 골랐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워낙에 한량 기질이 다분했던 데다가 과와는 상관없이 나름 알아주는 학교였으니 한판 놀아 주기에는 좋은 환경이었다. 대충 다니다가 부모님의 계략대로 돈 되는 쪽으로 과만 옮겨 졸업 하면 먹고 사는 것은 지장이 없으니 당분간 술과 연애를 넘나들며 내재되어 있던 한량 기를 온몸으로 발산할 요량이었다.

놀기 좋은 환경을 고스란히 망쳐 놓는 이들이 있었으니 이른바, 학생회 놈들이었다. 학원은 오로지 데모 질에 한길을 걸었다. 참여치 않은 이들에게 학생회 놈들을 중심으로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냈고 애써 외면하기에는 학내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당연히 k는 학교에 가기보다 주변을 맴 돌며 당시 먹고 사는데 지장이 없었던 지인들과 함께 신촌 주변 카페 순례를 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신촌 주변만 해도 물경 1000여 곳의 카페가 존재했으니 놀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햇살이 눈부신 날에도 데모는 계속 되었으니 마땅치 않은 데모 질을 피해 잠시 쉬기도 하고 뜻이 맞는 한량들과 함께 술잔을 기울이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카페 순례를 하던 어느 날! k는 우연히도 이름이 같은 동명이인을 만나게 됐다. 같은 학교 인데다가 꽤 돈이 많은 이였다. 만나는 날마다 술값은 그가 거의 내다시피 했고 연애질만 뜻이 달랐을 뿐 워낙 술을 좋아하니 어울려 놀기에는 더 할 나위 없는 이였다. 이러저런 애기를 나누던 중 동아리 얘기가 나오게 됐다. 술자리는 이어져 어디 연애질하기에 용이한 동아리를 소개 받을 심산으로 k는 궁금증을 풀어 놓기 시작했다. 의외로 그는 탈 패 출신이었다. 술 좋아하고 수업 빼먹기를 밥 먹듯 하는 이와는 왠지 어울리지 않았다.

데모 질에 관심이 없을 뿐만 아니라 적대시 했던 k는 학내 광장을 지나던 중 공연장을 기웃 거리는 그를 발견한다. 대충 민중의 적……가난하고 소외된 이들과 함께 해야……시대의 양심과 아픔……박수……등 신파조의 양심의 호소와 교문 앞 진출……백골단과 전경……짱돌, 지랄탄……연행…….

다음 날 또다시 연행 학우 석방 투쟁 등으로 이어지는 뻔한 순서를 그는 앞에 두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이제 그와 슬슬 거리를 두어야 한다는 생각과 함께 k는 교문을 나섰다.

시위가 계속되던 어느 날 이었다. 마침 교문 앞 싸움은 전 같지 않았다. 적당히 교문을 중심으로 일전을 나누던 경찰과 학우들 사이에 전 같지 않은 기류가 감지되었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었다. 일전을 불사하고야 말겠다는 굳은 결의가 학원을 감싸 안았다. 분노와 증오, 숨이 막힐 것 같은 슬픔 또한 공존하고 있었다. 상여와 죽은 이에 영정을 앞에 두고 눈물을 흘리는 이들이 많았다. 교문 앞 공방이 거칠어 질 무렵, 웅성 웅성대는 목소리가 뒤 까지 이어졌다. 학내 학우 한 명이 최루탄에 맞아 쓰러 진 것이다.

지랄탄에 발목이 나갔느니, 사과 탄을 뒤 집어 써 얼굴에 수포가 생겼다느니 등을 아무렇지 않게 영웅담 삼아 뒤풀이 자리에서 안주거리 삼던 것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한 달 여쯤이 지나 세브란스 병원에서 전해지는 소리는 학우의 사망 소식이었다. 길고 지루한 여름을 예고하고 있었다. 분노와 증오, 죽음의 어두움이 짙게 학원을 감싸고 있었다. 수업은 폐강이 줄을 이었고 데모에 참여하는 학우들을 제외하고는 이렇다 할 활동은 어디에서도 보기 힘들었다. 무언가 큰 싸움이 벌어 질것을 예고하고 있었다.

학원은 학우들의 것이 아닌 시민 모두의 공간으로 탈바꿈하고 있었다. 탈 패 친구 역시 술자리에서는 보기 힘들었다. 카페 순례를 하는 곳곳에서도 마냥 웃음을 띠며, 술잔을 즐기던 그의 모습은 발견하기 힘들었다. 어디서나 어두웠고 어디서나 시대는 통곡하고 있었다.

대 낮부터 카페 한 구석에 쳐 박혀 술잔을 기울이던 k는 더 이상 술자리가 재미가 없어 집으로 가기 위해 거리로 나왔다. 거리는 최루탄 가루가 길에 쌓일 정도였고 경찰과 시민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교문공방을 멀리서 술 취한 정신으로 보던 중 탈 패 친구가 눈에 띠였다. 그 순간이었다. 갑자기 괴성과 함께 대오를 벗어나 그는 뛰기 시작했다. 대오에 벗어났으니 경찰의 표적이 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고 폭행과 함께 그는 끌려가고 있었다. 폭력이 난무하는 그 자리에서 누구하나 그를 구 해줄 이는 없었다. k 역시 그 자리에서 얼어붙고 말았다.

그 자리에서 왜 멈춰 섰는지 이유를 찾지 못했다. 괴성과 눈물, 통곡의 시선만이 거리에 모든 상황을 멈춘 채 한 청년의 죽음을 목도하고 있었다.

며칠 후 훈방 조치를 받은 그는 카페에서 k와 마주 앉았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희미한 웃음으로 k를 쳐다보는 그와 나눌 수 있는 유일한 즐거움은 몽환적인 그의 분위기가 술맛을 더 해주는 것 이외에는 없었다. 그날 도와주지 못했던 죄책감만이 k에게 중압감으로 다가왔다. k에게 학원생활은 그야 말로 죽을 맛이었다. 수업이 진행되지 않으니 전과도 당분간 생각치 못 할 일이고 불감증에 걸린 학원은 낭만이니 뭐니 하는 것들은 고스란히 죄책감을 요구했다.

술로 세월을 보내던 어느 날! 그가 없는 카페 한 구석에서 k는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동안 들락거린 것만 해도 꽤 긴 시간이었으니 어느 덧 k는 단골 취급을 받고 있었다. 술집 주인과 이런 저런 단골들의 신상을 안주 삼아 곱씹고 있던 순간 술집 주인에게 그의 과거를 어렵사리 들을 수 있었다. 의대 출신이며, 있는 집 자손이고 공부를 잘 해 장학금을 도맡아 타 냈던 이였다고 했다. 있는 집 자손이니 장학금은 고스란히 술값으로 치러냈고 당연히 그를 따르던 이가 많았다고 했다. 별 신통치 않은 신파조의 과거여서 한 귀로 흘리던 중 k는 어느 순간 술집 주인의 얘기에 귀를 기울이게 됐다.

놀기 좋아 한 그에게 동아리 활동이 시작됐고 그것은 마침 탈 패였다고 했다. 당시 탈 패가 놀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나름 운동권의 아성이었으니 그의 행보는 자연스럽게 시대의 길로 접어들게 했다. 학내 조직사건이 터지고 그의 선배는 연행에 대비해 비공개 조직의 이름들을 들고 다녔다고 했다. 그것은 조직을 감추기 위한 위장이었다. 별 탈이 없으리라 여겼던 선배는 그의 이름을 조직 표에 올렸다고 했다. 안전가옥에 끌려간 그는 취조와 심문 사이에서 며칠을 보내고 나왔다.

그 후 그는 정신병원을 오고 갔다. 워낙에 심성이 맑은 이였으니 경찰에 의해 자행됐던 고문은 그에게 고스란히 넘기 힘든 고통으로 다가왔다. 고문은 이런 것이었다. 눈을 가리고 시간에 관계없이 무엇가로 때리고는 했다. 인격살인에 준하는 욕설도 함께 말이다.

마침 그는 연애를 하고 있었다. 그녀의 이름을 들먹이며, 잠은 같이 잤냐? 선배들에 이름을 대지 않으면 피해가 갈 것이라는…. 여동생은 어느 학교 다니던데 학교생활은 잘 하고 있냐?, 아버님의 사업은 지장이 없겠느냐? 등등.

눈을 가리고 있던 것을 풀고 보니 그것은 공중전화부 책이었다. 눈을 가리고 맞을 때는 거의 망치로 맞는 느낌이었다.

협박과 폭언, 시차를 알 수 없는 폭행 사이에서 그는 그만 정신을 놓고 말았다. 선배가 들고 있던 조직도의 그의 이름은 어차피 위장이었으니 그는 토설 할 것이 없었다.

야! 얘 가라(핵심이 아니라는)야, 풀어 줘!

재수 없이 가라한테 시간만 죽였다는 형사의 냉소를 끝으로 그는 풀려났다.

참으로 영혼이 맑은 이였다. 선배를 원망했을 만도 한데 오히려 그는 선배를 걱정했다고 했다.

다만 여동생, 아버지의 사업, 가족의 안위가 보장돼지 않을 것이라는 두려움 덕에 공포에 시달리고는 했다. 조조와 조울이 동반되기 시작하니 인간관계도 그 끝을 달리고 있었다.

백양로 사이를 거닐며 연정을 다 했던 애증의 너울거림도 그 생을 다하고 말았다.

학교와 병원을 오가며 그는 점점 여위어 갔다고 했다. 학내 활동을 다 하지 못했던 죄책감은 고스란히 남아 집회 현장을 기웃거리기는 했으나 경찰 만 보면 고문의 기억이 그의 숨통을 조여 왔다. 대오를 벗어나 냅다 뛰어 다니고 백골단의 표적이 되어 폭행과 연행을 반복 하곤 했다. 경찰서에서는 이 미친놈 또 왔다 하며 이 사람, 저 사람에게 걷어 채이고 그는 늘 오가던 카페로 돌아오곤 했다고 한다.

대낮 카페 한 귀퉁이에서 그는 항상 술에 절어 있었다.

관계가 다하고 사람이 그리웠던 차에 k를 만난 것이다.

사연을 알게 된 k는 그에게 알량한 동정심이 발동했다.

"형씨! 정신장애가 계신데 술 그렇게 먹으면 머리 안 아파요?"

"형씨도 술 많이 먹으면 머리 아프지요? 정신장애인도 똑 같아요!"

"형씨! 그래도 술 많이 먹으면 조조나 조울증이 와서 정신적으로 가라앉지 않나요?"

"형씨! 형씨도 지랄 같은 놈하고 술 먹으면 기분 더럽지요? 시대가 이렇게 지랄 같은데 기분 좋게 술 먹는 사람이 비정상 아닌가요?"

꼴에 사회복지학과 출신이라고 아는 척 했다가 k만 멋 적게 돼 버렸다. 술집 주인은 k를 이상하게 바라보았다. 술장사 잘하고 있고 나름 주요 고객인데 너는 왜 지랄이니! 라는 물음이 술집 주인의 얼굴에서 뚝뚝 그 허물을 벗고 있었다.

그는 슬퍼하기도 했고 분노하기도 했다. 저항의 미덕 또한 성실했다. 집회 때 마다 수많은 만류를 뿌리치고 현장에 있었고 그 때 마다 백골단의 폭행은 피해 가지 않았다. 고문의 암울한 기억과 공포 덕에 집회 끝자락 가투(가두투쟁) 때 그는 항상 대오를 벗어났었고 곧 표적이 되었으니 심할 정도의 폭행은 항상 따라다녔다. 응급실을 들러 상처를 꽤 메고 정신과를 찾는 것이 그의 병원 정규 코스가 되고 말았다.

연행 끝마다 미친놈 또 왔다! 는 인격살인과 함께 말이다. 아이러니 하게도 그를 돕고 있는 이는 술집 주인이었다. 술값은 오로지 그만 51% 할인 이었고 경찰서를 찾아가 보호자 동의서를 써 주던 이도 그녀였다. 카페 골목에서 그녀는 입지전적 인물이었다. 광주 금남로 충무다방에서 일을 하던 그녀는 어렵사리 돈을 모아 신촌에 카페를 낸 것이다. 광주에서 시위대를 숨겨 주던 일은 거의 일상과 같았으니 그의 안식처를 마련해주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고문의 끝자락에서 일상의 안위를 찾지 못해 아파하던 그에게 진심으로 위안과 위로, 지지를 보내주었던 것이다.

그에게 탈 패는 안식처와 같은 것이었다. 다만 정신장애로 인해 집중하거나 감정에 몰입하는 것이 불편을 낳게 했다. 마땅히 탈 패에서 할일을 찾지 못했던 그는 시간을 내어 철거촌 공부방을 드나들기 시작했다.

학교와 가까웠던 서대문 냉천동이었다. 대부분의 가옥은 철거깡패들에게 뜯겼고 몇 채 안남은 집들이 생존을 이어가고 있었다. 건달 기질은 다분했어도 나름 의협심이 있었던 k는 소일 삼아 그를 따라나섰다. 어느 날이었다. 철거가 다시 강행되고 동네 할머니 한분이 가스통을 틀고 깡패들과 맞서고 있었다. 할머니에게 이년 저년 하는 것을 참지 못했던 그는 앞에 나서 훈계조의 말들을 이어 갈 쯤 깡패들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폭언과 폭행, 연행, 미친놈 운운, 훈방, 응급실, 정신과….

k는 다른 세상을 보았다. 아이들을 맡겨 놓을 때가 없으니 철거촌 가장들이 일을 나설 때 마다 아이들은 밖에서 문이 잠겨 진체 부모가 돌아올 때까지 감금된 체 하루를 보내기가 일쑤였다. k가 과자 등을 들고 동네 어귀에 들어서면 노점을 하시던 할머니에게 키를 넘겨받아 아이들을 탈출시키고는 했다.

몇 시간 만에 햇살을 보던 아이들은 철거가 임박해 위험하기만 한 동네를 거리낌 없이 뛰어 다니고는 했다. 아이들은 k가 가르쳤던 공부가 좋았던 것이 아니라 사람이 그리운 것이었다. k와 그의 곁을 아이들은 떠날 줄을 몰랐다. 싸움은 날이 갈수록 격해져 화염병과 쇠 파이프, 포크fp인, 욕설과 함성이 난무하고 있었다.

이러다가 누군가 죽을 수도 있겠구나! 라는 생각이 k의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학원을 피해 사람 냄새를 찾고자 했던 k의 앞에 시대는 통곡하고 있었다.

최루탄에 죽은 학우, 하루 종일 방안에 갇혀 있는 아이들, 가스통을 들고 같이 죽자! 라고 외치던 할머니, 고문 끝에 정신장애를 얻게 된 그.

다만 정신장애를 갖고 있던 그만이 다소곳이 미소를 띠며 세상을 살아 내고 있었다. 거의 매일 폭행을 당하면서도 집회를 떠나지 않았고 가난하고 억울한 사람들을 찾아 다녔다. 그는 정신장애가 있다고 말하지 않았다. 마음이 아프다고 했다. 그런 그를 받아들이고 사랑하기 까지 한 이들 역시 아프고 상처 받은 사람들이었다. k가 보기에 장애는 시대였다. 오히려 힘겨운 삶을 웃음 지며 살아내고 있는 이들은 가난하고 상처받은 사람들이었다. 장애는 오히려 그들을 세상과 격리시키고자 했던 가진 자의 세상이었다. 마치 세상과의 수용을 거부하는 수용시설과 많이도 닮아 있었다.

그에게 장애를 안겨 주었던 선배는 죄책감에 사로잡혀 그를 따라 다녔다. 선배는 공부방 원장이 됐다. 철거깡패와 가스통을 들고 맞섰던 할머니는 돌아 가셨다. 철거싸움을 거칠게 싸워냈던 덕에 임대아파트를 얻어낸 것으로 마무리 되었다. 최루탄에 맞아 사망했던 학우는 열사가 되었다. 아이들은 방안에 갇혀 있기만 했던 하루의 일상이 끝을 맺게 되었다. 그는 학교를 정리하고 부모님의 목숨을 건 반대(?)를 무릅쓰고 카페 여주인과 결혼을 했다.

“야! 이! 개자식아 다방 레지하고 결혼하라고 의대 보낸 줄 아니!!!”

“아버지, 미친놈하고 결혼해주는 것만 해도 고맙지요!!!”

그의 어머니는 아예 땅바닥에 주저앉아 울음을 터트렸고 k와 그는 낄낄 데며 웃기만 했다. 만삭의 카페 여주인은 겸연쩍게 웃기만 했다.

“어머니 잘 살게요!”

“야! 이년아! 누가 허락 한데니!”

“에이! 말씀이 심하시네요.”(k)

"어머니! 집안 도움 안 받고 잘 살면 되지요 뭐! 제가 보기에는 천생연분인데요 뭐!"

그의 결혼식은 그에게 정신장애를 안겨 주었던 선배의 주례와 k의 사회, 철거 촌사람들의 진심어린 축복, 배속의 아이, 부모님의 저주(?), 어두운 시대를 살아나갈 희망이 한데 어우러져 있었다. 단 한 사람도 부자는 없었지만 k가 보기에는 모두 부자였다. 그의 부모를 빼고 말이다.

그의 장애는 그의 부모에게만 존재했었다.

k 역시 부모의 저주(?)를 무릅쓰고 사회복지학과를 졸업했다. 후원문화가 거의 없던 상황에서 k는 건달기와 한량 기, 사기행각들을 모두 모아 그의 아버지를 설득해 후원재단을 만들었다. k는 오늘도 수많은 가난과 마주하고 있다.

공부방에 보일러를 놓아 달라는 기획안을 보고 있다. 아이들이 추위에 떨고 있는 사진과 수 십 군데의 보일러 회사를 뒤져 견적서를 달아놓은 기획안이었다. 기획안은 한 페이지인데 공부방 원장님의 가슴 절절한 사연을 담은 편지는 끝을 모르고 보일러를 원하고 있었다. k의 뇌리에는 벌써부터 아이들의 추위가 가셔질 공부방이 떠오르고 있었다.

살 맛 나는 세상이다.

에필로그 [epilogue 혹은 뒷 담화문]

<착한 사마리아 사람> 조르다노(Luca Giordano, 1632-1705) 1685년경, 유화, 123~250cm, 루앙 미술관, 프랑스. ⓒ조르다노

작가는 이 작품을 연극의 한 장면처럼 극적으로 묘사하였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당한 사람의 상처에 기름을 바르며 온갖 정성으로 돌보고 있다. [출처] 착한 사마리아 사람(루가 10.29-37)작성자 가암스

웬 뚱딴지같은 성경 이야기인지 의아해 계신 분이 계시겠다. 더구나 나를 알고 계신 분들은 더더욱 그러할 것이다. 저 놈이 맛이 갔구나! 생각하시겠다. 사마리아인은 이러저러한 배경 끝에 유대인들 사이에서 왕따를 당했다. 박해 끝에 중동 한 구석에 짱 박혀 300명 정도가 남아 있다고 한다.

예수님이 사마리아인에게 보여 주셨던 의지에 대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복음은 고통 앞에서 수동성을 부정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당신은 특별히 고통 앞에서 능동적이었습니다. 그는 사명의 구원계획을 성취하셨습니다. 그리고 말씀 하셨습니다. 고통과 슬픔 앞에 멈추어 서서 함께하라!!!!!!"

사람들은 메시아가 하느님인 줄 알고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온전히 사람의 모습이었던 예수님(k는 사석에서는 예수 엉아라 부른다)이다. 앉은뱅이를 일으키고, 소경을 눈 뜨게 하며, 한 개의 빵으로 수백 명을 먹이셨던 예수의 역사(성경에서 장애의 문제는 요한복음 9장에서 함축하고 있다, 다만 본질적인 의도가 호도된 측면이 있으니 잘 읽어야 할 듯)는 그의 초능력을 얘기하고자 했던 것은 아닌 것 같다.

어찌 보면 한심한 이로 보일 수도 있겠다. 그 정도의 능력으로 마귀 같은 로마인들에게 십자가에 못 박혀 같은 고문 끝에 돌아가시다니…. 참으로 허망하다. 람보나 터미네이터, 슈퍼맨보다 출중하신 초능력은 어디다 두고 그리 허망하게 가시다니…. 성경은 다른 곳에서 이렇게 얘기한다.

가지는 올릴 것이나 곁가지는 올리지 않을 것이다. 요한 계시록 중에서. 다시 말하면 심판의 그날에 의인은 천국으로 보낼 것이나 양아치는 올리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이다. 기도 할 때가 아니라 실천 할 때이다.

고통 앞에 멈추어 서서 말이다. 하나님을 칭송하는 재단을 높이 쌓아 올리는 것이 아닌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

장애운동을 한다는 것은 유전적으로 무척 훌륭한 DNA가 없다면 기실 불가능한 것이다. 자본주의는 항상 화려함을 강점으로 한다. 재벌을 비난하지만 재벌에 편입되고 싶은 욕망과 일치한다. 물론 loser(루저: 패배자, 손해 보는 사람)가 재벌로 편입되는 일은 통계학적으로 잡히지 않을 만큼 불가능하다. 자본의 입장에서 천박하거나 가난한 것은 화려한 조명아래 어두운 그늘이 된다. 물론 그것을 들여다보거나 살펴보려하는 용기를 가진 이는 드물다. 주위를 살펴 볼 만큼의 여유는 자본의 입장에서 허락되지 않는다. 하루하루 링거를 꽂은 채 연명치료를 하는 모양새로 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세월호 이후로 대한민국은 늘 울고 있다. 마치 타이게투스산(고대 스파르타인 들이 불구자 혹은 원치 않은 아이들을 버렸던 산의 이름)에 울려 퍼졌던 통곡처럼, 누군가는 타이게투스산에 울렸던 통곡을 대신해야 하지 않을까? 헛소리를 넘어서는 수준에서 통곡을 대신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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