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나의 유전인자가 아버지로부터 왔음을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한숨. 어느 날 문득 내 한숨소리가 아버지의 그것과 흡사함을 느끼면서 아버지와 나 그리고 아들 까지 이어지는 숙명을 보았다.

흐르는 세월을 피할 수는 없는 법인지, 아버지의 완연히 쇠락하심에 자식 된 자의 슬픔이 이루 말할 수 없다. 사랑은 어찌 그리 내리사랑 이어야만 하는지, 조부님 제사를 지낸 다음 늦은 저녁 아버지와 나 그리고 아들아이 삼대가 마주앉은 식탁에서 아버지는 쉴 새 없이 맛난 음식을 나와 아들아이에게 밀어 주셨고 눈치 없는 아들아이는 왕성한 식욕을 보였다.

할 수만 있다면 아들아이의 성장을 강제라도 억제시켜 아버지의 노화를 막고 싶었다. 아들아이의 성장이 아버지 노화의 직접원인이 될 수 없음은 잘 알고 있지만 하지만 마음은 자꾸 그쪽에 원인이 두어진다. 아들아이의 식욕이 미웠다고나 할까.

아버지. 따지고 보면 아버지는 독선으로 똘똘 뭉치신 분이셨다. 마음대로 펼쳐지지 않는 세상살이의 분노를 가슴에 담고서 막걸리 한 잔에 몽땅 풀어버린 가엾은 분. 그러나 아버지의 자식사랑은 지극했다고 할 수 있다. 어린 시절 가난한 생활 속에서도 나름, 비옥한 감정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의 다정다감함이 중요 원인이었다.

아버지. 문득 바라다보는 아버지는 이미 쪼그라질 대로 쪼그라진 볼품없는 노인네였지만, 나는 자꾸 그 품에서 어리광을 부리고 싶어진다. 아버지는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실 것이다. 타버린 재처럼 풀썩이며 주저앉을 것만 같은 아버지. 앙상하기 이를 데 없는 아버지의 뼈마디 마디.

“아버지. 어느새 이렇게 늙으셨어요. 이렇게 자꾸 늙어만 가시면 어쩌란 말 이예요. 아이들이 더 이상 자라지 못하게 가둬 놓을 수는 없잖아요.”

큰 기대를 가지셨던 장남의 장애에 깊은 한숨을 내 쉬는 아버지.

“아버지, 마음 아파하지 마세요, 그런대로 저 견딜 만해요.”

어머니. 지난겨울, 어머니는 몸이 아픈 부실한 아들을 위해 이틀 밤낮 동안 모과를 고아 민간처방약을 만들어 보내셨다. 장애가 생겼노라 차마 말씀 드리지 못하여 아직도 그저 사고 후유증으로만 아시는 어머니는 지치지도 않으시고 몸에 좋은 처방을 쉼 없이 구해 오신다.

하지만 나는 안다. 장애는 이미 현실이고 어머니의 수고는 결코 나를 일으켜 세우지 못한다는 것을. 어머니가 해 주신 시큼한 약을 마시면서 그 정성에 방울방울 눈물이 흘렀다. 잔소리대왕 아버지와 정확하게 대칭을 이루는 어머니는 흡사 정물화처럼 감정 변화의 폭이 없으신 조용한 분이시다.

그런데 나는 보았다. 자글자글한 어머니 눈가의 주름을 타고 번지는 눈물을. 식탁을 차리기 전 아무도 모르게 옆에 와서 앉으신 어머니는 형편없이 기력이 쇠한 아들의 손을 잡으시고 눈물을 흘리셨다. 많은 말을 하지는 않으셨지만 투박한 손을 통하여 어머니의 애틋한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져와 가슴이 미어지는 듯했다.

“내 몸에서 나올 때는 성한 모습이었는데 이게 몬 일이고…. 담에 올 때는 우야튼동 니 발로 걸어와야 한데이.”

“엄마, 울지마. 내 발로 다시 걸어 꼭 엄마 업어줄게. 정말 미안해요. 엄마.”

1958년 서울 출생. 초등학교 시절, 전후 베이비붐 1세대답게 오전반 오후반을 넘어 저녁 반까지 나뉠 정도로 유달리 많은 또래들과 부대끼며 살았다. 늘 그렇듯 살아간다는 것은 주연과 조연의 적절한 배치. 안타깝지만 그 많은 또래들과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주목받은 적이 없는 그림자 인생이었다. 많은 이들이 시대의 훈장으로 여기는 민주화 시절도 공중전화박스에 숨어 지켜보는 것으로 흘려보냈고, 그때의 투사들이 역사의 주인공으로 나섰던 참여정부의 시대도 내게 주어진 역은 노동과 식량을 바꾸는데 익숙한 도시노동자. 하지만 살아간다는 것이 결코 주연들만의 이야기가 될 수 없다는 것, 바로 그런 이야기를 쓰고 싶다. 내 글을 읽는 모든 분들에게 감사드리고 그들에게 글을 읽는 작은 재미를 드릴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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