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 나타난 장애차별이야기③

30년전 이야기입니다. 병원전도를 하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갑자기 전도했던 중에 어느 병실에서 나에게 달려왔습니다. 나는 돌연히 그 병실을 찾아갔습니다. 그 병실 입구에는 40대 중반이 된 남자가 하반신이 절단된 채 침대에 앉아있었습니다. 40여년 간 활력 있게 살아왔던 그가 하반신을 상실하면서 직장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진정 잃어버릴까봐 염려했던 것은 가족이었습니다. 두 발을 가지고 가족을 책임지고 있었던 자신과 가족의 돌봄을 받아야 하는 자신의 모습을 비교하면서, 가족들이 자신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 대하여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자신의 몸에 나타난 상실(Loss)보다 더 안타까운 것은 ‘자신이 할 일을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이미 그의 의식 속에는 장애로 인하여 자신을 무능력으로 몰아가고 있었습니다.

모세(Moses). 그는 이스라엘의 지도자(Leader)입니다. 모세는 어렸을 때, 자기의 가정에서 벗어나 이집트(Egypt) 공주의 품에서 자라났습니다. 그의 몸에는 히브리(Hebrew)의 피가 흐르고 있었지만, 정신은 이집트의 철학과 가치관이 깊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그가 40세가 되었을 때, 모세는 자신의 히브리인의 정체성(Identity)이 발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집트에 살면서 히브리인으로 살려는 순간의 노력으로 그는 살인사건을 저지르고 맙니다. 하지만 그가 행한 행위는 히브리인에게도 이집트인에게도 환영받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결국 모세는 이집트 땅을 떠나야만 했습니다. 이후 40년간 그는 미디안 광야에서 목동으로, 목자로 살아가면서 자신의 삶을 초야(草野)에 묻었습니다.

모세가 80세가 되었을 때, 하나님은 모세에게 찾아왔습니다. 모세는 그가 누구인지 몰랐습니다. 아마 모르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찾아와서 "히브리 백성이 고통 중에 신음하고 있으니 네가 가서 이끌어내라"고 지시했습니다.

모세는 그 지시를 거부하고 싶었습니다. 모세가 지도자의 위치에 올라간다는 것은 모세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어불성설(語不成說)에 해당되었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도망자(逃亡者)요, 살인자(殺人者)요, 배신자(背信者)였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나이는 80이 된 노인(老人)이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의 지시를 거부하는 조건으로 이러한 자신의 상황을 정확하게 고백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모세가 인정한 것은 "나는 언어장애인(言語障碍人)이기에 할 수 없습니다"라는 이유입니다. 나이 80에 언어장애가 있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누구의 잘못도 아닙니다. 노화(aging)과정에 언어 장애는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자신의 언어문제를 자신의 무능력과 직결시켰습니다.

어떤 기자가 저에게 물었습니다. "어떤 목표를 가지고 오셨기에 오늘의 당신이 되셨습니까?" 나는 이리 대답했습니다. "70년대 나의 장애는 어떤 꿈을 가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과연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내가 이 사회에서 필요한 어떤 일을 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 속에서 방황했던 시기였습니다. 아마 지금 중도에 장애를 갖게 된 사람들 역시 당분간은 할 수 없슴에 좌절하고 있을 것입니다. 장애 때문에….

종종 장애아동을 양육하는 부모들 자신도 장애자녀를 바라볼 때,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는 시각을 가지고 포기의 삶을 살고 있을 지도 모릅니다. 아니 일반아동과 동일하게 할 수 없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고 간주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장애(障碍)를 치료해보고자 동분서주하고 있는 것이겠죠.

최근에 치료 바우처(Therapy Vouvher) 제도 역시 그러한 맥락이 아닐까요? 우리 자녀에게 어떤 서비스가 필요한 것인지를 누가 결정합니까? 다다익선(多多益善)의 기준에 따라 많은 치료서비스를 받으면 되는 것일까요? 그리고 그 서비스를 누가 주는 것일까요? 치료사(Therapist)라고 하면 누구에게나 받으면 되는 것일까요?

장애아동에게 제공되는 치료서비스가 장애를 치료하려는 것이 아니라 장애자녀가 가진 능력을 극대화시키는 방향으로 나가야 하는 것이 아닐까? 장애자녀 나름대로 할 수 있는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요?

장애인이 살아가는 사회를 변화시켜야 합니다. 제도도 환경도 바꾸어야 합니다. 그리고 바꿔지고 있지요. 물론 이 또한 장애인 당사자들의 피맺힌 절규와 처절함을 한데 묶어 전개한 운동의 결과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러나 이와 아울러 중요한 것은 장애를 자신의 무능력으로 간주하려는 자세가 우리 안에 있지 않는가를 성찰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향해서는 장애를 차별하지 말라, 우리도 일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자신을 바라볼 때, 과연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어떠한 대답을 가지고 있는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모세처럼, 자신의 장애를 빌미로 자신의 무능력을 정당화하려는 모습은 없었을까요? 있었다면 바로 그것이 우리 안에 있는 차별입니다. 장애를 무능력으로 바라보고 "Help me! Help Me!"라고 외치지도 않는 자신 안에 좌절감이 바로 차별입니다. 자신을 한 인간으로 인정하지 않는 부분이 차별입니다. 자신을 일반인과 함께 살아야 할 동등한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는 것이 차별입니다.

차별을 없애는 일은 장애인 외부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장애인 내면에서도 일어나야 합니다. 나의 무의식 안에 깊게 깔려있는 ‘없음’과 ‘상실’에 대하여 집착하여 일어나는 좌절감, 포기의식에서 벗어나는 일이 차별에서 해방되는 첫 발걸음입니다.

모세는 자신을 할 수 없다고 강변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너를 내가 만들었다.(I am the Creator of you.) 너는 할 수 있다.(You are able to do everything.)". 하나님은 모세의 내면에 있는 불가능, 포기, 좌절의식을 부수고, 가능(해냄)의 인간으로 모세를 세우려고 했습니다. 모세가 자기 자신을 포기가 아니라 시도(try)하는 인간으로 알기를 바랐습니다. 모세 자신이 좌절이 아니라 자신만의 성공(Success)을 일구어내는 사람으로 인정하기 바랐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말씀했습니다. "말을 잘 못한다고? 네 형 아론이 옆에 있지 않느냐?" 하나님은 인생의 동반자, 협력자를 알게 했습니다. 부족한 부분을 가지고 혼자 하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너의 주변에 있는 사람을 너의 동반자(Partnet)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모세로 하여금 알게 한 것은 장애로 인하여 네가 잃은 것은 한 부분(a part)이지 전부(all)가 아니라는 점이었습니다. 부족한 부분은 인생의 동반자를 통해서 채워나가면 되는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깨우침을 받아들였습니다. 자신의 장애가 자신의 전부가 아니라 작은 부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지도자의 길을 기꺼이 걸어갔습니다.

장애를 경험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차별의 조건은 자신 안의 장애를 인생전체의 무능력으로 간주했던 편견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에서 벗어났을 때, 오히려 그것이 기회(Opportunity)가 되었을 때, 그는 장애인이 아니라 지도자로 세상을 살아간 것입니다.

이계윤 목사는 장로회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숭실대학교 철학과 졸업과 사회사업학과 대학원에서 석·박사과정을 수료하였다. 한국밀알선교단과 세계밀알연합회에서 장애인선교현장경험을 가졌고 장애아전담보육시설 혜림어린이집 원장과 전국장애아보육시설협의회장으로 장애아보육에 전념하고 있다. 저서로는 예수와 장애인, 장애인선교의 이론과 실제, 이삭에서 헨델까지, 재활복지실천의 이론과 실제, 재활복지실천프로그램의 실제, 장애를 통한 하나님의 역사를 펴내어 재활복지실천으로 통한 선교에 이론적 작업을 확충해 나가고 있다. 이 칼럼난을 통하여 재활복지선교와 장애아 보육 그리고 장애인가족의 이야기를 나누면서 독자와 함께 세상을 새롭게 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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