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술 후 이틀 만에 깨어났다던데 처음엔 너무 아파서 정신이 없었어요.” 사람들이 왜 이렇게 많지. 내가 왜 여기에 있을까. 도대체 무슨 일일까. 겨우 정신을 차리고 그가 처음 한 말은 “엄마 내 팔이 어디 갔어?” 팔이 너무 허전하더라는 것이다.

아름다운 ‘베체헬공동체’ 전경. ⓒ이복남

“중학교 2학년이었는데도 너무 철이 없었어요. 처음에는 팔도 손톱처럼 자라 날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엄마한테 내 팔이 언제 자라서 퇴원할거냐고 물었어요. 소식을 들은 친척들은 울고 불며 병실에 들어섰다가 제가 너무 멀쩡하니까 오히려 그 사람들이 이상해 할 정도였어요.” 처음에는 아무 생각도 없었고 그냥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그리고 너무 아파서 다른 생각은 할 겨를도 없었다.

여름이 오고 있었다. 허벅지 살을 떼어서 봉합수술을 했는데 날씨는 덥고 이식한 자리는 헐어서 진물이 흘렀다. 부모님은 부산에서 장사를 해야 했기에 간병은 외할머니가 했다. 외할머니는 먹여주고 입혀주고 모든 뒷바라지를 다 했고, 진물이 흐르는 자리를 머리 드라이기로 말려 주셨다.

수술 등 병원비는 어떻게 했을까. 처음 철도청에서는 본인과실이라고 했다. 부모님은 치료에 전념해야 했으므로 빚을 내서 병원비를 부담했었다. 그리고 퇴원 후에야 아버지는 역사의 사진을 찍는 등 자료를 준비해서 소송을 제기했고 마침내 승소를 했다. 그가 밀양역에 도착한 시간에 부산행 열차는 연착으로 도착하지 않았고, 플랫홈에는 서울행

열차가 들어와 있었기에 착각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었다.

‘베체헬공동체’의 전체모임. ⓒ이복남

지긋지긋한 병원생활을 마치고 의수를 하고 2학기부터 학교에 갔다. 학교생활은 누가 도와주었을까.

“언니가 같은 반에 있었어요.” 언니와는 쌍둥이란다. 보통의 쌍둥이는 몇 분 먼저인데 언니와는 8시간이란다. 어떻게 그런 일이. 어머니는 임신 중에 한 번도 병원엘 가보지 않았던 것이다. 어머니는 해산도 집에서 했는데 첫아이를 낳고 몇 시간이 지나도 배가 꺼지지 않았고 시간이 지날수록 배가 너무 아파서 하는 수없이 병원에 갔더니 또 한 아이 즉 그가 있었는데 첫아이를 낳고 8시간 만에 둘째를 낳았다는 것이다.

병원에서는 외할머니를 비롯하여 모든 사람들이 다 도와주었는데 집에 오니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밥도 먹을 수도 없고, 옷도 입을 수가 없고, 화장실을 갈 수도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두 손이 없다는 사실이 절실하게 다가왔다.

독일북부 ‘바시스공동체’ 방문 ⓒ이복남

그의 장래희망은 피아니스트였다. 부모님의 희망이기도 했다. 어릴 때는 언니와 같이 피아노를 배웠으나 중학생이 되면서 언니는 피아노를 그만두었었다. 장래 희망이 무너진 것이다. 아버지는 “니를 피아니스트로 만들고 싶었는데…” 하시며 눈물짓곤 하셨다. 피아노를 치는 꿈을 자주 꾸었다. 잠이 깨어 눈을 뜨면 가슴이 저리도록 눈물이 났다. 나중에는 한손으로 피아노를 치는 꿈을 꾸기도 했는데 깨어보면 한손도 없는 게 아닌가. 울고 또 울었다. 정말 이렇게 살아야 하나. 내 인생이 왜 이러냐. 억울했다. 원망과 분노가 가슴을 쳤다.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하나.

그런데 사고 나기 전에는 학교에서도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하고 얌전한 아이었는데 사고 이후 학교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만큼 관심이 대상이 되었다. 선생님이나 친구들도 따뜻하게 대해주었다. 혼자 있을 땐 많이 울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마음이 풀리기 시작했다. 부모님을 비롯하여 언니 동생 선생님 친구들 모두가 그를 아껴주고 위해주었던 것이다. 이렇게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바시스’에서 내한 부부와 운문사 나들이 ⓒ이복남

어머니는 처음 사고가 났을 때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하라고 했다. 어머니는 기도하면서 기차 바퀴 밑에서도 살아서 돌아온 것에 감사한다고 했다. 뇌를 다치지 않아서 감사한다고 했다. 성경책을 펼쳐 들었다.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 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욥기 1장21절)

욥의 생애를 보면서 내 인생을 내가 어떻게 할 것이 아니었구나. 내 인생이 끝날 때까지 하나님이 도와주신다는 믿음이 들었다. 아픈 만큼 성숙해 진다했던가.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생각하자 그 다음에는 무엇을 할 것인가가 문제였다. 비록 손은 없지만 말은 할 수 있다. 말로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최종 결론은 통역이었다. *백은영씨 이야기는 3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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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웃이 행복하지 않는 한 나 또한 온전히 행복할 수 없으며 모두 함께 하는 마음이 없는 한 공동체의 건강한 발전은 기대하기 어렵다. 우리는 함께 살아가야 할 운명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아름답고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가진 자와 못 가진자,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평등하게 공유할 수 있는 열린사회를 건설해야 한다. 쓸모 없음을 쓸모 있음으로 가꾸어 함께 어우러져 나아갈 수 있도록 서로 사랑으로 용서하고 화합하여 사랑을 나눔으로 실천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복남 원장은 부산장애인총연합회 사무총장을 역임하였으며 현재 하늘사랑가족상담실을 운영하고 있다.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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