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보러가기로 했으면 어디서 저녁을 먹고 무슨 영화를 볼 것인지 다 계획을 세워 왔기에 저는 그냥 따라가기만 하면 되었어요. 하루는 롯데호텔 앞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했는데 차가 너무 밀려서 가 버리고 없으면 어쩌나 싶었는데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 때 ‘20분 기다려 보기는 처음이다’는 말이 오히려 감동이었어요”

박태호 지도교수와 함께. ⓒ이복남

임보혁 씨는 그녀가 갖지 못했던 많은 것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결혼을 하기로 했다.

“처음으로 집에 인사를 갔을 때 아버님이 더 좋아 하셨어요”

미정씨 집에서는 어떠했을까. 아버지나 언니 동생 등 가족들이 특별히 반대는 하지 않았으나 아버지가 “집에 울고 오지는 마라”고 했다. 오히려 교회 등 주변 친구들이 “다시 한 번 생각해 봐라”면서 말렸었다.

임보혁씨는 주미정씨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을까.

“수화를 배우는데 아주 열심이었어요. 착하고 웃는 모습이 참 예뻤어요”

어느 날 수업을 마치고 데이트를 신청했고 그들의 연애는 시작되었던 것이다.

금메달 상장. ⓒ이복남

결혼을 하고 광고전문회사인 한글그라픽스로 옮겼다. 한일월드컵, 아시아경기대회, 아태장애인경기대회, 세계합창올림픽 등의 광고물을 제작하면서 각종 대회에 참가하여 수상하기 시작했다. 2003년 부산장애인기능대회에서 전자출판부분에서 금메달을 땄고 전국대회에서도 금메달을 수상하여 세계대회에 나갈 수 있는 자격을 확보했다.

그리고 2006년에는 시각디자인부분으로 전국대회에서 금메달을 수상했다. 전자출판과 시각디자인 둘 다 출전 자격을 땄지만 하나 밖에 나갈 수 없기에 고심하다가 결국 시각디자인 쪽을 택했다.

2007년 11월 일본에서 열리는 국제장애인기능대회를 앞두고 서울에서 3개월간의 합숙 훈련이 있었다. 한글그라픽스(사장 서정봉)에 3개월간의 휴직계를 냈다. 사장은 잘 갔다 오라고 했다.

임보혁씨 가족. ⓒ이복남

장애인기능올림픽은 유엔이 정한 세계장애인의 해(1981)에 시작되었는데 주최국과 국제아빌림픽연합(IAF) 국제재활협회(RI)가 공동개최한다. 제1회는 일본 동경에서 개최되었으며 일본이 1위를 했고, 2회 콜롬비아대회에서는 한국이 1위, 3회 홍콩대회는 중국이 1위였다. 4회(호주, 한국 1위) 5회(체코, 한국 1위) 6회(인도, 한국 1위) 그리고 제7회 대회가 일본 시즈오카에서 2007년 11월 13일부터 18일까지 열렸는데 한국이 1위로 4연패를 했다.

이로써 우리나라는 국제장애인기능올림픽 통산 5회의 종합우승을 하게 되었으며 제8회(2011) 대회는 한국에서 개최하게 된다. 이번 대회에는 전체 30개 종목 중 25개 종목에 25명의 선수가 출전한 우리나라는 22개 정규직종에서 금 8개, 은 3개, 동 2개로 종합 1위를 차지했다.

시각디자인 부분을 지도하신 박태호 교수님에게 전화로 임보혁 씨에 대해 여쭤 보았다. 그는 3년 동안 준비를 했고 박 교수님과는 작년 3월에 만났다고 한다. 한 달에 한번 지도를 하게 되어 있는데 교수님은 서울에 있고 그는 부산에 사는지라 한번은 교수님이 그의 집을 방문하여 지도하기도 했단다. 3개월 합숙훈련 기간 동안에도 주어진 과제를 혼자서 성실하게 준비하는 등 열심히 했다고 한다.

허남식 부산시장과 함께. ⓒ이복남

이번 대회의 주제는 ‘후지산을 이용한 심포지엄’과 ‘걷기대회 코스’였는데 막상 현장에 도착해 보니 준비한 것과 방향이 달라져서 당황하기도 했으나 전날 밤에 ‘후지산을 이용한 심포지엄’으로 정하고 전체 모범답안을 다 외울 수 있도록 준비를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경기가 끝나고 나온 그를 보니 준비한 만큼 제대로 하지 못했다고 실망한 얼굴이었다.

박 교수님이 심사위원이어서 밤 10시쯤 심사를 마치고 1등임을 알려 주려고 숙소로 가보니 문을 잠그고 자는 지 기척이 없었다. 나중에 그가 일어나 1등임을 알고는 박 교수님을 껴안고 함께 울었다고 한다. 공단관계자에게 아내에게 전화를 해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남편은 여태까지 사랑한다는 말을 한 번도 안 했는데 그날 밤에 대신 전해주는 전화에서 고맙다 사랑한다는 얘기를 처음 듣고는 1등보다도 더 감격해서 눈물이 났어요”

그 말을 전하는 주미정씨의 눈가에 다시금 이슬이 맺혔다.

“우리 어머니도 ‘내가 그 마이 해 놨으이 지금 이 마이 됐다 아이가’ 하십니다”

그랬다. 물론 임보혁씨의 노력이겠지만 그 노력이 있기까지 아버지, 어머니, 아내, 박태호 교수님을 비롯한 많은 분들의 노력과 기원이 있었으리라. 이를 계기로 2007년 12월 31일 밤 부산 용두산 공원에서 열리는 ‘시민의종’ 타종식에 장애인 대표로 참여 하여 타종을 했다.

S라인의 광안대교. 임보혁씨의 작품. ⓒ이복남

아내 주미정씨는 현재 유아특수재활과 2학년에 재학 중이다. 임보혁씨는 아내가 졸업을 하고 나면, 대학 3학년에 편입을 하여 공부를 계속하고 싶고 기회가 되면 광고 회사를 설립하고 싶단다.

건강하신 부모님이 이웃에 살아 아이들을 돌봐 주시고, 아빠를 자랑스러워하는 나은(11) 나미(8) 나형(4) 삼남매가 있고, 사랑하는 아내 주미정씨가 있고, 국제장애인기능올림픽 금메달의 영광을 안은 임보혁씨. 또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르겠지만 부디 행복하기를.

*수화통역을 해 주신 임보혁씨의 아내 주미정님, 한국장애인고용촉진공단 한윤경님, 인덕대학 박태호 교수님, 부산관광고등학교 구명근 선생님, 부산광역시청 장애인복지계 김두종님, 등 취재에 협조해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 이 내용은 문화저널21(www.mhj21.com)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내 이웃이 행복하지 않는 한 나 또한 온전히 행복할 수 없으며 모두 함께 하는 마음이 없는 한 공동체의 건강한 발전은 기대하기 어렵다. 우리는 함께 살아가야 할 운명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아름답고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가진 자와 못 가진자,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평등하게 공유할 수 있는 열린사회를 건설해야 한다. 쓸모 없음을 쓸모 있음으로 가꾸어 함께 어우러져 나아갈 수 있도록 서로 사랑으로 용서하고 화합하여 사랑을 나눔으로 실천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복남 원장은 부산장애인총연합회 사무총장을 역임하였으며 현재 하늘사랑가족상담실을 운영하고 있다.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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