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최하위를 기록한 선거참여와는 달리 장애인계는 지난 시기에 대비 선거에 대한 관심과 참여가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여러 가지 분석이 있을 수 있으나 17대에서 처음 출발한 장애인비례대표가 주요 근거라 할 수 있겠다.

총선 흥행에 성공하기 위한 여러 가지 고육지책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참여율이 미동조차 하지 않는 주류 정치와는 사뭇 다른 양상인 것이다. 장애인비례대표를 둘러싼 이러저러한 이해관계와 소박한 수준에서 장애인당사자의 정치참여를 지지하는 대중정서까지 더 하여 장애인계는 그 어느 때보다 관심과 참여의 의지가 높았다.

다만 과정과 결과, 이후에 대해 짚고 넘어갈 몇 가지 대목이 눈에 띈다.

장애인비례대표, 선출과정이 폭 넓은 장애인당사자의 결집과 관심, 절차적 정당성은 배제 된 채 이루어진 점이다. 여성의 경우 정치자금법에 의해 각 정당이 일정 비율의 여성 후보자를 선거에 배정할 경우 국가보조금을 받을 수 있다. 각 정당은 보수적 투표 참여율을 극복하기 위한 방안과 정당 조직을 강화하려는 측면에서 여성의 정치참여를 환영하고 있다.

허나 장애인당사자의 경우 소득수준이 열악함으로써 정당 활동을 하기 위한 후원회를 결성하거나 재정을 담보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다. 더구나 중증장애인의 경우 이동과 접근조차 마련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 실질적인 정당 참여는 요원한 것이다.

이로 인해 주류 정당의 경우 장애인 당사자의 참여와 장애인위원회의 추천보다는 비례대표 개인의 역량을 통해 등원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정당 구조에서 장애인위원회의 함량의 충족성을 떠나 그 중요성이 얼마나 관찰되고 있는 가에 대한 의문이다.

시설에서 지역사회로…일상생활을 넘어 노동까지

각설하고. 18대가 시작하자마자 17대에서 해결하지 못했던 다양한 의제들이 넘쳐날 것이다. 주류정당에서 장애정책이 우선순위에서 배제 될 것은 어찌 보면 뻔한 것이며, 이를 둘러싼 갈등은 이미 노정된 것이다. 보험(의료민영화를 예측한 사 보험 가입은 아니다)을 든다는 심정으로 꺼내보면 탈 시설화, 노동, 내부의 권력 등이 있겠다.

첫 번째, 민주노동당 곽정숙 당선자의 경우 장애여성정책을 최우선으로 하겠다고 발표하였다. 장애여성 문제가 중요치 않다는 것은 아니지만 가장 중요하다는 것에는 동의할 수 없다. 비장애 여성문제와는 달리 장애라는 의제 가운데는 장애유형이 꽤 큰 함량을 차지하고 있다.

17대 국회에서 다양한 특별법이 시도되었다. 장애유형별 특성을 고려했다기 보다 사실은 그 분들의 고단한 삶의 여정과 주류사회의 배제에 대한 분노가 그 배경이었다. 국어가 있다면 수어가 있는 것이고 나아가 수많은 언어장애인분들의 소통이 있다. 소통이 불가능하거나 공포의 대상으로 취급받았던 지적, 정신장애인 분들의 문제와 그 심각성은 17대의 끝자락에서 조차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장애유형별 전달체계와 수용시설은 문제를 해결하기는커녕 분리와 배제를 심화하고 있다.

장애유형 중에도 가장 심각한 차별에 봉착하고 있는 것은 지적, 정신장애인 분들이다. 물론 이분들과 탈 시설의 문제는 때 놓으려야 때 놓을 수 없다. 탈 시설화의 전술적 다양성은 차지하더라도 지적, 정신장애인분들, 나아가 유형의 분리는 당사자의 권리와 단결을 가로 막는다.

사회로부터 장애를 분리하고자 했던 시도는 이미 전근대적인 것으로 취급받고 있으며, 권리니 뭐니를 떠나 국가비용의 문제만 보더라도 실패한 정책임은 탈 시설화의 거대한 흐름을 작동시키고 있는 각 국가에서 보고되고 있다.

서울시의 경우 시설 생활인 일인당 연 예산이 1,800만원을 넘고 있음을 보고하고 있다. 1,800만원을 직접 지급하거나 장애사회를 개조하는 데 쓴 다면 이는 불필요한 국가예산을 줄일 수 있으며, 중증장애인이 지역사회 일상생활을 넘어 노동까지 구현하는 길목을 보장하는 것이다.

단 40만원의 지출로 해결할 수 있는 장애인과 어르신 분들의 보행보조기구의 마련은 이후 10년간 넘어지거나 고령으로 인한 디스크 발생 등의 원인으로 인한 1,300만원 가량의 추가 의료비 지출을 예방(독일. 보조공학 지출비용에 대한 국가비용분석. 2006)한다.

비용이 없는 것이 문제가 아닌 어디에 전달할 것인가! 어떤 욕구에 부응 할 것인가가 더욱 문제이다. 대략 3만 명의 장애인에게 꽤 큰 예산을 소모하고 있는 시설정책은 온당하다고 할 것인가에 대해 18대 국회는 답을 내야 할 것이다.

장애유형별 정책들은 큰 틀에서 통합과 단결을 기조로 하여야 한다. 적어도 장애인당사자 입장에서는 그러 하다. 유형을 분리하는 제도는 필연적으로 장애유형의 단결과 하나의 목소리를 방해한다. 결국 장애인당사자의 정치적 단결까지 근원에서부터 막아서고 있다.

꽤 연륜이 있는 장애인당사자 리더조차도 다른 장애유형을 가진 지인들을 없다고 한다. 리더들조차 이러할 진데 장애유형별 대중적 단결은 요원한 것이 되고 만다. 장애인당사자 스스로 아니면 누군가에 의해서 단결을 원천적으로 봉쇄당하고 있는 것이다. 당연히 주류사회에서는 장애인당사자들의 무기력을 때만 되면 시비하고 있다.

대부분의 장애인당사자들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다른 장애유형을 보지 못한 채 자라왔다. 농아인 친구가 없었으며 시각장애인 친구는 없었다. 지적장애인과 정신장애인 친구들은 더욱 볼 수 없었다. 이는 장애유형 간 상대적으로도 그러하다. 장애여성은 그 근원적인 차별로 인해 장애남성과 서로의 시선을 피한 채 살아왔다.

분리와 배제는 장애인당사자의 삶의 곳곳에서 발견된다. 결국 지역이라는 공간적 저항의 유의미를 되짚지 못한다면 시설과 장애유형 간 의도하지 않은 분열은 더욱 팽창할 것이다. 임신기간의 장애의 학살은 안락사의 논쟁에서 장애인당사자를 우선순위에 놓게 될 것이고 시간의 문제일 뿐 이는 지적, 정신장애를 넘어 신체장애 까지 다가올 것이다. 히틀러는 장애를 학살하는데 있어 신체장애인과 지적, 정신장애인을 분리하지 않았다.

장애운동을 한다는 것은 유전적으로 무척 훌륭한 DNA가 없다면 기실 불가능한 것이다. 자본주의는 항상 화려함을 강점으로 한다. 재벌을 비난하지만 재벌에 편입되고 싶은 욕망과 일치한다. 물론 loser(루저: 패배자, 손해 보는 사람)가 재벌로 편입되는 일은 통계학적으로 잡히지 않을 만큼 불가능하다. 자본의 입장에서 천박하거나 가난한 것은 화려한 조명아래 어두운 그늘이 된다. 물론 그것을 들여다보거나 살펴보려하는 용기를 가진 이는 드물다. 주위를 살펴 볼 만큼의 여유는 자본의 입장에서 허락되지 않는다. 하루하루 링거를 꽂은 채 연명치료를 하는 모양새로 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세월호 이후로 대한민국은 늘 울고 있다. 마치 타이게투스산(고대 스파르타인 들이 불구자 혹은 원치 않은 아이들을 버렸던 산의 이름)에 울려 퍼졌던 통곡처럼, 누군가는 타이게투스산에 울렸던 통곡을 대신해야 하지 않을까? 헛소리를 넘어서는 수준에서 통곡을 대신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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