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도상고(현 부산관광고등학교)에 입학을 했는데 1학년 때 담임이었던 임신우 수학 선생은 그에게는 구세주였다. 선생은 그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안한규를 그의 짝지가 되게 했고 그 짝지로 하여금 그의 공부를 도와주도록 했던 것이다. 임 선생은 3년 동안 임보혁과 안한규를 자신의 반에 있도록 했고 담임을 맡으셨다.

어느 가을날의 임보혁씨. ⓒ이복남

친구의 도움으로 처음으로 공부를 했다. 어머니도 아들을 이대로 두어서는 안 되겠다 싶었는지 한 달에 십만 원씩이나 하는 언어치료를 받게 하였으며, 아들의 공부를 위해서 과외를 시켰다. 학교에서는 친구가, 집에서는 가정교사의 도움으로 성적은 점점 좋아지기 시작했고 고 한번은 반에서 1등을 하기도 했다.

동의대학교 무역학과에 응시를 했으나 면접에서 농아라고 떨어졌다. 재수를 했고 이번에는 경성대학교 경영학과에 지원했으나 또 떨어졌다. 화가가 되고 싶었는데 웬 무역학과였을까.

임신우 선생과 친구 안한규. ⓒ이복남

“그 무렵 아버지가 돌아오셨는데 일본어를 하시기에 수산물 무역 일을 하십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자신의 일을 물려받기를 원하셨던 모양이다. 그러나 임 선생은 “니가 잘 할 수 있는 과에 가라”며 동명대학 산업디자인과를 추천했다.

대학생활은 그런대로 괜찮았다. 그는 구화로 친구들과 의사소통은 가능했던 것이다. 그런데 같은 과에 농아가 한명 있었는데 친구들과 전혀 어울리지 못하고 언제나 외톨이로 지냈다. 그가 다가가도 친구는 외면했다.

기능올림픽에서 작업 모습. ⓒ이복남

어머니가 그토록 싫어하는 수화를 배워보기로 했다. 다른 대학의 수화동아리를 찾아 갔다.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농아친구들도 만났다. 수화를 배우면서 자신도 농아로 살아 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나니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그동안 외톨이로 지내던 같은 과 농아 친구하고도 수화로 대화를 할 수가 있었다. 그 친구는 수화를 할 줄 모르는 그를 친구로 인정하기 싫었던 모양이었다.

2학년이 되어 전공이 네 개 분야로 나누어지면서 그 친구는 다른 분야로 가서 그 후 소식은 잘 모른다. 산업디자인과의 전공은 제품, 가구, 도자기, 시각디자인으로 나뉘는데 그는 제품디자인을 택했다. 졸업을 하고 더 공부를 하려고 4년제 대학에 편입시험을 쳐 보았으나 떨어졌다. 그 때 농아 선배가 4년제를 나와도 취업하기는 어려우니까 그냥 사회에서 일하라고 했다.

생애 최고의 순간. ⓒ이복남

그런데 막상 직장을 구하려니까 제품디자인 즉 TV 냉장고 오디오 등 가전제품의 디자인실에 들어가기는 하늘의 별 따기였다. 전공을 시각디자인으로 바꿔 광고회사에 디자이너로 들어갔다. 90년대 초반이었는데 그 때만 해도 주로 수작업이었기에 장래를 생각해서 밤에는 학원에서 컴퓨터그래픽을 배웠다.

그리고 농아 친구들을 만나기 위해 농아인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는데 그곳에서 운명의 여인을 만날 줄이야. 여기서 잠깐 그가 만났던 운명의 여인 주미정(37)씨를 만나 보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개금에 있는 회사에서 경리를 보고 있었는데 교회가 재미가 없었어요. 그래서 목사님(남동우)께 00성경공부를 하고 싶다했더니 장애인전도협회에 나가서 장애인봉사를 해보라고 했어요”

금메달 수상작품. ⓒ이복남

그 무렵 전도협회에는 수화반과 점자반이 있었는데 처음에는 점자를 배웠다. 전도협회에서 점자를 배우다보니 수화반 강사가 임보혁씨였다. 점자반 기초를 마치고 수화를 배웠다.

“예전부터 주변에서 수화를 하는 농아를 만나면 나도 언젠가는 배워보고 싶다고 생각했었는데 이렇게 수화를 하는 남편을 만날 줄은 몰랐어요”

자신은 어릴 때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그런지 매사에 우유부단했다. 무엇하나 자신의 생각을 똑 부러지게 말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 임보혁씨를 만나보니 자기생각이 확고한 사람이었다. 약속시간에 철저했고 자신이 밥을 사면 그가 커피를 사는 등 맺고 끊고 하는 것이 확실했던 것이다. <임보혁씨 이야기는 3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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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웃이 행복하지 않는 한 나 또한 온전히 행복할 수 없으며 모두 함께 하는 마음이 없는 한 공동체의 건강한 발전은 기대하기 어렵다. 우리는 함께 살아가야 할 운명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아름답고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가진 자와 못 가진자,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평등하게 공유할 수 있는 열린사회를 건설해야 한다. 쓸모 없음을 쓸모 있음으로 가꾸어 함께 어우러져 나아갈 수 있도록 서로 사랑으로 용서하고 화합하여 사랑을 나눔으로 실천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복남 원장은 부산장애인총연합회 사무총장을 역임하였으며 현재 하늘사랑가족상담실을 운영하고 있다.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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