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일회용이다. 연습도 없고 재활용도 없이 단 한번만 사용할 수 있다. 일단 인생열차에 발을 들여 놓았다면 종착역까지는 논스톱으로 가야한다. 당연히 후진도 안 되고 중간에 내릴 수도 없다. 단 종착역까지 가는 노선은 얼마든지 수정이 가능하다. 가는 길이 맘에 안 들면 다른 길로 가 볼 수는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정된 노선이 평탄하고 좋은 길인지 아니면 울퉁불퉁 험난한 고갯길인지는 알 수 없다. 미리 가 볼 수도 없을뿐더러 되돌아 올 수도 없기 때문이다.
원하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길을 바꿔야 했고, 그 길이 좋은(?) 길이었을 때 전화위복이라고 한다. 그 때 만약 다른 길로 갔다면 지금 쯤 어떻게 되었을까. 인생열차가 가는 길에 만약 즉 if는 없다. 위기를 기회로 삼은 의지와 노력이 있을 뿐이다.
임보혁(40)씨. 그의 고향은 제주도 산방산이다. 남제주군 안덕면 사계리에서 아버지 임창진(64)씨와 어머니 김행렬(61)씨 사이에서 2남의 첫째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경기(驚氣)를 잘 일으켰고 4살 무렵 심하게 열병을 앓았다. 외가가 근처에 있어 외할머니가 그를 이뻐했고 병원도 없는 시골마을이라 외할머니는 침을 맞혔다. 4살이라 한참 말을 배울 무렵이었으나 그 일이 있은 이후로 말을 잘 하지 못했다.
외할머니와 어머니는 마늘도 심고, 밀감도 따고, 물질(해녀)도 했으나 가난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아버지는 가난이 싫어 돈을 벌어 오겠다고 일본으로 갔다. 사계국민학교에 입학을 했다. 이름표 달고 가방매고 도시락 들고 학교를 왔다 갔다 할 뿐이었다. 들리지도 않고 말도 잘 못하니 공부는 뒷전이었다. 공부를 못한다고 선생님에게 야단도 많이 맞았다. 혹시라도 선생님이 농아인줄 몰랐던 것은 아니었을까.
“어머니가 학교에 자주 왔으므로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통신표에는 전 과목이 양가양가였고 딱 하나 미술만 우/수였다. 그래도 친구들 하고는 잘 지냈고 학교를 마치면 딱지치기 구슬치기에 열을 올렸고, 새총으로 꿩도 잡고 용돈벌이로 지네를 잡으러 다녔다. 돌멩이를 들추면 지네가 바글바글 했는데 지네를 잡아 건재상에 가져가면 보통 한 마리에 십원을 주는데 한번은 팔뚝만한(?) 지네를 잡아 백원을 받기도 했다.
중학생이 되었다. 어느 날 밤에 자전거를 타다가 넘어졌는데 왼쪽 귀에서 피가 났다. 모슬포 병원에 갔으나 의사는 위험하다며 서울 큰 병원으로 가보라고 했다. 외할머니와 어머니와 함께 서울로 갔고 세브란스병원에서 수술을 했다. 귀의 염증이 뇌로 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고 했는데 수술 후 일주일이나 깨어나지 못했다. 외할머니와 어머니는 혹시라도 잘못되는 게 아닌가 싶어 그 일주일을 피눈물로 지새웠다고 했다.
아버지는 일본에서 돈을 보내 주셨고 부산에 친척이 있어 사하구 당리동에 집을 한 채 사 두었었다. 병원에서 퇴원을 하자 부산 당리동으로 이사를 했다.
어머니는 부산 배화학교(청각장애인 학교)에 입학을 시키러 갔으나 아이들이 수화로 얘기하는 것을 보고는 마음이 변해 집근처 장평중학교에 입학을 시켰다.
부산의 중학교는 고향 학교와는 사뭇 달랐다. 고향의 친구들은 그가 농아라고 놀리지도 않았고 선생도 너그러웠으나 부산의 선생은 무서웠고 친구들은 그가 바보라고 놀리며 때리기까지 했다. 중학교 성적도 다른 과목은 양 아니면 가였고 미술에서도 이론 때문에 수를 받지는 못했기에 공부는 언제나 꼴찌였다. 친구들의 놀림에 화가 났고 공부에는 더욱 흥미를 잃어 학교에 다니기도 싫었지만 그럭저럭 졸업은 했다.<임보혁씨 이야기는 2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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