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비게이션 시스템이 널리 보급됨에 따라 많은 운전자들에게 큰 보탬이 되고 있다. 낯선 목적지를 찾아갈 때 이전에는 약도를 미리 프린팅하거나 길을 잘 알고 있는 사람에게 물어봐야 하는 번거로운 절차를 밟아야 했으나 이제는 어디든 장소만 입력하면 알아서 척척 안내를 해 주니 얼마나 좋은 세상인가!

그렇다면 최신 지도가 내장되어 있는 고성능의 내비게이션 장치를 초보 운전자에게 주어도 이를 잘 활용하여 숙련된 운전이 가능할까? 아마 아무리 좋은 내비게이션 장치를 준다 하더라도 초보 운전자는 여유가 없다보니 주변을 탐색하는 시야를 확보하기가 쉽지 않아 허둥댈 가능성이 높다.

즉, 주변의 지형지물과 현재의 도로 상황 등을 총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넓은 시야를 지닌 숙련된 운전자에게 내비게이션은 매우 유용하겠지만 그렇지 못한 운전자에게는 오히려 혼란을 가져다 줄 수도 있다.

안내견과 시각장애인의 관계 역시 이와 같다. 시각장애인을 이끄는 안내견의 모습을 처음 본 사람들은 일방적으로 시각장애인이 끌려가고 있는 모습으로 비쳐지기 쉽다. 그러나 이것은 대단히 잘못된 생각이다. 필자는 다음의 두 가지 고정관념이 이러한 잘못된 생각을 만들었다고 본다.

첫째, 앞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누군가로 부터 항상 도움을 받아야만 다닐 수 있다.

둘째, 안내견은 높은 수준의 훈련을 통하여 시각장애인이 가고자 하는 곳을 미리 알고

처음부터 끝까지 스스로 판단하여 안내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녔다.

이 두 가지의 고정관념으로 시각장애인은 항상 의존의 대상으로, 안내견은 멀티 슈퍼도그로 각인되는 오류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안내견이 안내를 잘 해줄 수 있는 기본 능력을 갖추고 있다 해도 시각장애인도 그에 상응하는 보행수준을 지니고 있어야 최고의 파트너가 될 수 있다. 즉, 안내견이 결코 일반사람이 생각하는 것처럼 일방적으로 시각장애인을 안내하면서 다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시각장애인들 중에는 혼자 밖에 외출하는 것을 무척 꺼리는 사람들이 많다. 일반적으로 혼자 목적지를 찾을 수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더 큰 이유는 따로 있다. 바로 오리엔테이션 정보를 수집하는 보행 훈련을 제대로 받지 못 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오리엔테이션이란, 시각장애인이 독립보행을 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요소로, 자신이 가고자 하는 목적지에 이르기까지의 주변 정보를 잔존감각(청각, 후각, 촉각, 잔존시력)을 활용하여 파악하는 것이다. 이 오리엔테이션에 대한 내용은 다음번에 구체적으로 언급하고자 한다.

필자는 초등학교 4학년 전까지 혼자 집 밖에 나가 본 기억이 별로 없다. 일이 있을 때 마다 항상 가족들과 같이 다녔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느 정도 나이가 되자 스스로 내가 원하는 물건들을 사보고 싶은 욕구가 생기기 시작했다. 그 동안 가족들과 집주변을 수도 없이 다니면서 무엇이 어디 있는지 명확하게 알고 있었기 때문에 혼자 나가는 것에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부모님은 안 보이는 자식이 혼자 나가서 길이라도 잃을까 염려가 되어 절대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혼자 몰래 집을 나와 과자 한 봉지를 사기 위해 근처에 있는 상점을 찾았다. 그런데 가족의 손을 잡고 다닐 때에는 쉽게 찾을 수 있을 것만 같았던 상점이 혼자 찾으려니 도저히 어디 있는지 알 수 없어 끝내 당황하기 시작했다.

결국 근처를 지나던 동네 아저씨께서 찾아주셨는데, 신기하게도 혼자 많이 내려왔다고 생각했지만 알고 보니 절반도 채 가지 못하고 근처만 헤매고 다녔던 것이다.

즉, 당시 전혀 단독 보행의 경험이 없었던 필자로서는 안내를 받아가며 다닐 때와 혼자 다닐 때 거리감각에 대한 오리엔테이션 정보의 차이를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 후, 혼자 다니기 위해 나름대로 주변 지형을 이용하는 방법이라든가 신체를 이용하여 거리를 재는 요령을 터득해 가기 시작하면서 자신감을 얻게 되었다.

시각장애인이 안내견에게 고마워하는 것은 목적지까지 주인을 모셔다 주기 때문이 결코 아니다. 바로 자신의 의지대로 안전하게 다닐 수 있는 보행 영역의 폭을 넓힐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주었기 때문이다.

안내견이 시각장애인을 어떻게 안내하는지를 이해하면 더욱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

시각장애인은 자신이 가고자 하는 머릿속의 대략적인 지도를 그린 상태에서 안내견에게 방향을 제시한다. 그러면 안내견은 주인의 명령대로 방향을 잡아주고 앞서서 이끌어 준다.

이 때 안내견의 가장 큰 역할은 위험한 장애물을 피해주고, 계단과 높은 턱 또는 횡단보도나 교차 지점 등에서 신호를 보내주어 시각장애인이 맘 놓고 다닐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것이다. 이러한 안내견의 도움 덕분에 시각장애인 스스로 머리에 그린 지도를 바탕으로 안전하게 이동할 수 있게 된다.

독자 여러분의 이해를 돕기 위해 간단히 사례 한 가지를 적어보겠다.

철수는 집에서 근처 상점까지 물건을 사러 간다. 철수가 아무리 안내견에게 '상점 가자'고 외쳐도 절대 그 녀석은 움직일 기색이 없다. 당연하다. 상점이 어디 있는지 알면 그건 개가 아니다.

상점의 위치는 집에서 나와 차도를 오른쪽으로 하고 인도를 따라 똑바로 약 100m을 가다가 유도블록이 느껴지면 왼쪽 골목으로 들어간 후 두 번째 정문이다. 그럼 위치를 머리에 그렸으니 안내견에게 인도 쪽으로 방향을 잡아주고 힘차게 '앞으로'를 외친다.

여기서 이제 안내견의 진가가 발휘된다. 시각장애인이 혼자 흰 지팡이를 들고 100m을 똑바로 가기란 결코 쉬운 게 아니다. 우리나라 인도가 얼마나 위험천만한 곳인지 이 글을 읽는 정안인 분들은 안대로 눈을 가리고 50m만 가보시라! 잘못하면 출발하자마자 인도 정 가운데에 있는 거대한 장애물에 머리를 부딪치고 쓰러질 수도 있으니 신중히 결정한 후 시작하기 바란다.

만일 흰 지팡이를 들고 출발했다면 앞에 걸리는 물체들을 하나하나 확인해 가면서 이동해야 하므로 매우 더딜 수밖에 없다. 또한 걷는 내내 신경을 지팡이 끝에 기울여야 하므로 도착하는 순간 까지 온 몸이 팽팽한 긴장감으로 굳어버릴 것이다. 가장 위험한 것은 자신이 똑바로 걷고 있는지 조차 파악할 수 없는 지경에 빠졌을 때이다.

그러나 안내견과 걷게 되면 이러한 문제들로부터 완전히 자유롭다. 시각장애인이 직접 앞에 있는 물체를 확인하지 않아도 되므로 자신이 원하는 속도대로 다닐 수 있으며, 부딪칠 위험을 하지 않아도 되므로 필요 이상으로 긴장하지 않아도 된다. 또한 안내견은 기본적으로 가장 안전한 곳에서 직선보행을 원칙으로 훈련받았기 때문에 방향이 틀어지는 것을 방지할 수 있다.

다음으로 100m 가량 왔다고 판단이 되면 서서히 속도를 멈추면서 '왼쪽'이라고 안내 견에게 지시를 내린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왼쪽 골목을 찾아 들어간다.

마지막으로 상점의 문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 시각장애인이 혼자 다닐 때 가장 힘들어 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이 문을 찾는 것이다. 근처 까지는 왔는데 문손잡이를 찾기 위해 더듬어야 하는 상황은 시각장애인이라면 어쩔 수 없이 겪어야 할 일이다. 그러나 안내견이 문손잡이를 찾는 것은 누워서 식은 죽 먹기보다 쉽다. 그러므로 문손잡이 앞에서 허둥대는 일은 전혀 없다.

이처럼 안내견과 시각장애인은 서로의 역할이 분명하게 나뉘어 있다. 시각장애인은 안내견에게 방향을 제시해주는 내비게이션과 같은 역할을 담당하며, 안내견은 안전을 책임지는 운전자와 같은 존재이다.

그러므로 이 둘의 관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자칫 일방적인 관계로 오해하기 쉽다. 그 결과 시각장애인과 안내견 모두에게 필요 이상의 무능력과 능력의 경계선을 규정짓는 오류를 범할 수 있음을 조심해야 한다. 그로 인해 자칫 시각장애인 당사자에게 큰 상처를 주는 실책을 범할 수 있으니, 본 글이 조금이나마 많은 분들에게 도움이 되길 바란다.

[리플합시다]금배지 꿈꾸는 장애인들에게 나도한마디!

[제8회 에이블퀴즈]4·9 총선-장애인정치세력화 특집 퀴즈!

선천성 시각장애로 특수학교(대전맹학교)를 나와 2002년 창원대학교에서 특수교육과 사학을 복수전공했다. 대학교 1학년 때 첫 안내견 강토와 만나 함께 생활하고 있다. 장애인에 대한 인식수준이 상대적으로 부족한 지방의 열악한 현실에서 안내견 강토의 활동은 많은 사람들에게 시각장애인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변화를 일깨워 주는 존재로 부각되었다. 지난 2005년에는 삼성화재 공익광고에 출연하여 대한민국광고윤리대상을 수상하였고, 안내견에 대한 대중의식을 높이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대학교 졸업과 동시 삼성화재안내견학교에 입사하여 시각장애인에게 안내견에 대한 올바른 정보를 전달하는 홍보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또한 시각장애인 및 안내견 인식개선을 위하여 정기적으로 강연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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