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가 남산만한 올케에게 이끌려 처음으로 지하철 타는 법을 배웠다. 그리고 올케는 범일동에 있는 귀금속 학원에 입학을 시켜 주었다. 보석세공 6개월 과정을 마치고 학원근처 액세서리 공장에 취직을 했다. 첫 출근을 하고 점심시간에 밥을 먹으러 나왔는데 숨이 멎는 것 같았다. “세상에, 병신이 이렇게 많나.” 이 골목 저 골목에서 목발을 짚거나 다리를 저는 사람들이 끝도 없이 나왔던 것이다. 너무 놀라서 한동안은 고개를 들고 다닐 수가 없었다. 그런 풍경에 조금씩 익숙해 질 무렵 IMF로 문을 닫는 보석상들이 늘어나면서 공장을 그만 둘 수밖에 없었다.

꼬까옷 입은 쌍둥이네 가족. ⓒ이복남

올케가 요리학원을 다녀 보라고 해서 일식요리에 도전을 했고 조리사 자격증을 땄으나 그를 받아주는 곳은 아무데도 없었다. 장애인을 받아주는 곳을 찾다가 부산장애인총연합회를 알게 되었다. 취직을 하고 싶다했더니 간사는 영원한 취직은 어떠냐고 물었는데 그 때는 그것이 무슨 말인지 알지 못했다. 하루는 연합회에서 배내골에 놀러 가는데 오라고 했다. 범일동 보석골목에서 장애인을 만난 이후 두 번째로 많은 장애인들을 만난 날이었다.

행사를 마치면서 맘에 드는 사람이 있으면 이름을 적어 내라고 했는데 그는 아무도 적지 못했다. 그런데 며칠 후 연합회 간사가 부르더니 그날 야유회에 같이 간 어떤 사람이 그의 이름을 적었다는 것이다. “누군데요?” 휠체어 장애인인데 지하철도 혼자서 타고 다닌다고 했다. 그 몸으로 지하철을 혼자서 타다니, 언젠가 그는 혼자서 지하철을 타러갔다가 넘어져서 울면서 돌아왔는데 그것도 서른 살이 넘어서였다.

연합회 간사의 주선으로 휠체어장애인 김대성 씨를 만났고 노래방에도 갔는데 대성씨는 노래를 잘 불렀다. 올케하고는 친구처럼 지내는 사이라 올케가 어떻더냐 묻기에 “그 사람이 결혼하자하면 할거다”는 대답이 절로 나왔다. 그 후 올케와 남동생이 대성씨를 만나보고는 “사람이 괜찮더라”고 했다.

2007 서울국제횔체어마라톤대회에 참가한 김대성씨. ⓒ이복남

어머니의 반대는 완강했다. 대성씨는 성격도 털털하고 매사에 당당한 것이 그가 못 가졌고 할 수 없는 많은 것을 가진 사람이었다. 더구나 어머니가 아무리 잘 해 주신다고 해도 숨이 막혔고 집을 나오고 싶었다. 그러나 대성씨는 어머니가 반대하는 결혼은 할 수가 없다고 했다.

대성씨는 전기사고로 척수장애인이 되었는데 예전에 사랑하던 여자와 집안의 반대로 헤어졌다는 것이다. 자식이기는 장사 없다고 어머니도 어쩔 수 없어 승낙을 하셨고 2001년 2월에 결혼식을 하고 제주도로 신혼여행을 갔다. 제주도에서 집으로 전화를 했는데 어머니가 “대성아 사랑한다. 니는 이제부터 내 새끼다.” 대성씨는 어머니의 그 말씀에 감격해 했다.

결혼식을 마치고 연합회 간사는 종이 한 장을 주면서 신혼여행을 가서 읽어 보라고 했는데 나중에 펴보니 ‘척수장애인의 부부생활’이었다. 그때까지는 미처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기에 어찌나 부끄럽고 얼굴이 화끈거리든지 제대로 읽어 보지도 못했지만 아무튼 척수장애인도 부부생활에는 별 문제가 없으니 신경들은 끄시라.

보석같은 하나와 두리. ⓒ이복남

그해 4월 20일 장애인의 날을 맞아 KBS에서 장애인의 어려움에 대해서 취재를 하는데 연합회에서 그들 부부를 소개했다. 생활하는데 불편하기는 하지만 별 어려움은 없었다. 결혼 한 부부로서 자식은 갖고 싶다고 했더니 KBS에서 서울 차병원을 소개했다. 몇 번이나 서울을 오르내리면서 검진을 받았는데 인공수정은 어렵겠다고 했다.

“방송이 끝나고 대성씨도 나만 있으면 된다고 했지만 애기생각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1년 동안이나 고민 하다가 시험관아기를 결심하고 다시 차병원을 찾아 갔다. 시험관아기는 여성의 성숙된 난자를 채취하고, 남성의 정액을 인위적으로 채취하여 시험관에서 수정시킨 후, 2-3일 동안 배양하여 여성의 자궁내막으로 이식하는 방법이다.

자궁에 이식을 하고 착상이 될 때까지 얼마나 가슴을 졸였는지 모른다. “이 아이가 태어나면 평생 감사하면서 살겠습니다.” 그의 기도가 하늘에 닿았는지 한번 만에 착상이 되었다. 그는 한 달을 입원하여 아기의 심장소리를 확인하고는 부산으로 내려왔다.

이제 기다리는 일만 남았다. 넘어질까 다칠까 노심초사하면서 달력만 쳐다보았다. 어서 빨리 시간이 흘러 우리 아기들을 볼 수 있기를. 시계는 느릿느릿 움직였으나 시간이 가는 만큼 배는 불러왔다. 어쩌면 두 배로 불러왔는지 모른다. 아이는 쌍둥이였던 것이다.

2003년 1월 2일 부산 삼선병원에서 귀여운 쌍둥이 딸을 낳았다. 11시 21분 왼쪽아이는 2.57kg였고 11시 22분 오른쪽 아이는 2.74kg였다. 1분 먼저 태어난 언니는 김하나, 1분 늦은 동생은 김두리이다.

어릴 때는 아기가 밤에 30분쯤 자다가 깨고 겨우 재워 놓으면 또 30분 만에 깨어서 정말 미칠 지경이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 아이들을 가졌을 때 그도 30분 주기였었다. 너무 고통스러워 30분쯤 잠이 들었다가 깨면 울고, 울다가 다시 잠이 들곤 했던 것이다.

쌍둥이네 가족의 행복한 모습. ⓒ이복남

“쌍둥이라서 그런지 하나가 아프면 두리도 같이 아프고, 하나가 울면 두리도 따라 울어서 밤새도록 요람을 흔들면서 나도 같이 울면서 우리 엄마도 나를 이렇게 키웠을 거라고 생각하니 더 눈물이 났어요.”

이제 다섯 살이 된 딸들은 아침이면 아빠 옷을 챙겨 놓기도 하고 어린이집에서 돌아오면 방청소도 하는 등 벌써부터 엄마를 도와준다. 아이들의 재롱을 보면서 하나쯤 더 가지고도 싶지만, 둘이나 키워봐서 더 키울 자신은 있는데 시험관아기를 가지기까지의 과정이 너무 고통스러워 엄두도 못 내고 있다.

“세 살 때 어린이집 재롱잔치를 보면서 “내가 이렇게 행복해도 되나, 너무 행복해서 눈물이 났어요.” 엄마 아빠는 물론이고 주변 많은 사람들을 힘들게 했지만 또한 많은 사람들의 축복 속에서 태어난 하나와 두리. 건강하고 예쁘게 자라준다면 더 바랄 것이 없다는 쌍둥이엄마 이영선씨. 당신은 충분히 행복할 자격이 있습니다. 끝.

* 이 내용은 문화저널21(www.mhj21.com)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내 이웃이 행복하지 않는 한 나 또한 온전히 행복할 수 없으며 모두 함께 하는 마음이 없는 한 공동체의 건강한 발전은 기대하기 어렵다. 우리는 함께 살아가야 할 운명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아름답고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가진 자와 못 가진자,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평등하게 공유할 수 있는 열린사회를 건설해야 한다. 쓸모 없음을 쓸모 있음으로 가꾸어 함께 어우러져 나아갈 수 있도록 서로 사랑으로 용서하고 화합하여 사랑을 나눔으로 실천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복남 원장은 부산장애인총연합회 사무총장을 역임하였으며 현재 하늘사랑가족상담실을 운영하고 있다.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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