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사랑 양천장애인자립생활센터 이상호 소장. ⓒ에이블뉴스

김도현 선생님(이하 님)에게.

선생님이란 표현이 스스로 권위이고자 하니 우리는 동지로 바꿔 불러야 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다만 표현의 적절성을 떠나 마치 하나(집단을 둘러싼 폭력적 동질성?)가 되기 위한 강요이거나 따르지 않으면 배제될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꼴에 고집은 있어서 동지란 표현보다 선생님이란 표현을 집착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아집이라기보다 대중성(?, 마치 이것은 이글의 화두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을 담보하지 못한 것은 그 스스로 소멸계를 내재하고 만다는 80년대 어느 시기의 반성이었기 때문입니다.

님을 처음 보았을 때부터 지금까지 장판에 날라든 한 마리 파랑새라는 생각을 내내 했습니다. 전태일 열사가 죽기 전 그토록 간절했던 것은 한자로 되어 있는 근로기준법을 읽어줄 대학생친구 하나였습니다. 그 곁에 없었던 많은 지식인들의 각성과 반성, 명확한 인식과 주체들의 희생이 오늘을 만든 동력이겠지요. 님이 감옥에 갇혔을 때 누군가 작성했을 성명서의 첫줄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합니다. ‘사법부는 김도현을 구속하려거든 먼저 한국사회에게 사형을 구형하라!!!’

이 생생한 한마디가 의미하는 장애인문제를 둘러싼 맥락은 제가 생각하기에 이렇습니다. 그동안 장애인문제의 해결방식은 비장애인중심으로 고안된 사회에 장애인을 끼워 맞추기 위해 장애인의 변화(흔히 애기하는 A.D.L.)를 도모해왔습니다. 그것이 옳다하더라도 총량은 항상 부족했으며, 결과 역시 일부 인간승리류의 포장이외에는 대안 없음을 반증해왔습니다. 동정과 시혜적 조치들은 또한 장애인이 시설에서 죽어나가건 몇 십 년을 방구석에 처박혀 있던 무지, 내지는 관심 없음이었습니다. 그나마 은혜적 조치는 재활이었고 그보다 훨씬 많은 예산이 은폐로 대변되는 수용시설을 통해 이루어져 왔습니다. 반인권적이니 뭐니 하면서 생활시설로 개념을 바꾸었습니다만 본질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변해도 시설은 시설입니다.

시설을 둘러싼 두 가지 대안 없음의 얼개는 이렇습니다. 하나는 시설 이외의 대안 없음이고, 그리하여 재활의 양을 더 늘려야 한다는 공급자 중심의 논리입니다. 지역으로 돌아와도 폭력적인 환경 덕에 끊임없이 집에 갇혀 지내야 하거나 그 나마의 은혜! 재활의 덫에서 언제 정상이 될지 모르는 약속 없는 시간의 반복을 노정해야 합니다. 또 하나는 시설민주화이겠지요. 물론 두 가지 담론의 중심에 중증장애인이 있습니다.

첫 번째의 반론은 이렇습니다. 그렇게 좋으면 당신이 시설에서 한달만 살아보라 라는 것입니다. 명동성당 앞에서 양심수체험을 위해 감옥을 만들어 살게 했던 일이 있었습니다. 보복부 고위공무원이 됐든 국회의원이 됐든 한번 살아 보라라는 애기입니다. 두 번째 시설민주화인데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인권을 중심으로 시설을 변화시키고 폐쇄적인 원장체계의 권력구도를 민주적인노조를 통해서 변화시키고자 하는 의도인데 단기적으로는 대안인 듯 하나 장기적으로는 노동자와 장애인을 적으로 만들 것입니다. 마치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눈에 보이지는 않으나 내재를 넘어서 곪아 터지고 있는 살기어린 갈등처럼 말입니다. 한편에서는 정당한 노동의 대가로 비정규직과 상대적으로 높은 임금을 받는 것을 귀족노조로 호도당하고 끝도 모를 혹독한 노동과 해고의 늪을 헤어 나오지 못하며 이에 연대하지 못하는 정규직노조를 적으로 규정할지도 모를 현실을 장애운동의 미래에서 우리는 목도하게 될 것입니다. 진보는 그저 깃발이 아니며, 선언에서 그쳐서는 안 됨을, 이를 뛰어넘어 예지를 근간으로 한 대안의 생산과 대중적 궐기를 목표로 한 소통과 주체형성이어야 합니다. 속도와 효율성을 중심으로 한 천민자본주의가 장애인을 절벽의 나락으로 떨어뜨렸다면 소통과 주체형성에 있어 걸리는 시간의 반비례는 이제는 객관으로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요?

중증장애인에게 있어 불변의 진실은 지역에서 살 것인지 시설에서 살 것인지에 대한 선택 없음으로 인한 어쩔 수 없는 실종과 감금(장애인당사자의 선택이 아님으로 저는 수용이 아니라 실종과 감금이라고 생각합니다)이 바로 시설이라는 것입니다.

시설의 대안으로서 자립생활은 저에게는 참으로 혁명적인 담론이었습니다. 대중성과 ‘선도투’(소수 활동가 중심의 선도적, 중앙집권적 투쟁)의 판단의 길목에서 과거 우리는 여지없이 후자를 선택했으며, 장애대중을 일상적으로 만날 수 없는 공간(현장)의 부재는 항상 타는 목마름이었습니다. 매년 평가의 마지막은 내부강화와 재생산구조의 마련이었습니다. 목적의식적이 아닌 우연(?)으로 날라든 파랑새가 그저 희망이었고 깃발을 유지 할 수 있었던 최소한의 미덕이었습니다. 파랑새는 민중의 교사이기도 합니다. 다만 매를 들어야 할 때도 있지만 따뜻한 시선으로 함께 하고자 하는 어머니의 모습이기도 해야 한다고 주워들었습니다.

이제 님께서 제기하신 몇 가지에 대해 언급해 보겠습니다. 활동보조인(저는 개인적으로 활인이라는 말이 좋습니다. 사람을 살리는 일이지요. 사람을 죽이는 일에 급급한 전쟁과 사람을 살리는 것을 목적으로 한 활인은 반전운동의 새롭고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서비스의 전달체계에 관한 것입니다.

활인이 장애인에게 가장 잘 공급될 수 있는 모형이어야 하고 독점적 체계는 지양해야 하며, 이를 왜곡하여 독점하고자 하는 몇몇 센터가 있다는 님의 의견입니다. 맞습니다. 무슨 이의가 있겠습니까? 장애인당사자가 원하는 것으로 재편되어야 한다는데 말입니다. 다만 몇 가지 짚어보아야 할 것은 장애인당사자가 원하는 체계가 현재의 재활중심의 체계인가하는 문제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현재의 체계는 수용 및 재활중심이라는 것입니다.

장애인의 손상된 신체기능의 회복(재활 - 최근의 재활개념은 권리와 통합으로 전이되고 있다고 합니다. 이에 대해 무지하거나 쓸데없는 아집만 없다면 이러한 변화는 고무적인 것입니다.)을 시스템의 근간으로 하는 체계에서 활인이 세팅된다면 서로 충돌하거나 백화점식 프로그램의 하나로 전락하여 천덕꾸러기가 되지 않을까요. 흐름을 관통하는 문제가 될 텐데 문제의 핵심은 활인서비스 총량의 부재입니다. 이는 지급된 예산이외의 영역에 공격적으로 대처하여 활인의 사회화(국민정서상 이의 동의 없음은 또 다른 충돌을 일으키겠지요. 마치 귀족노조로 호도되는 것처럼 말입니다.)가 오히려 멀지 않은 미래에 관건이 될 터인데 당사자중심이 아닌 공급자 중심의 모형에서 총량확대에 대한 절박성을 얼마나 담보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이 논의의 진정성은 총량의 확대에 있어 어느 순간에도 저는 공급자를 발견하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함께하는 사회류의 따뜻한 시선이 아니라면 말입니다. 오히려 확대 이후 총량의 독점은 공급자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이제 총량의 확대와 함께 고민하는 것은 공급자 중심의 불평등한 권력관계를 비판, 견제하고자 하는 장애인당사자주의자들의 집중입니다. 이는 간단한 산술이 현실이 되지 못하는 원인의 알 수 없음과도 같습니다.

시설 1인당 예산과 수급권자예산까지 합쳐지면 장애인당사자의 구매력이 보장되며, 이는 장애인당사자 욕구를 반영한 서비스를 구축하는 데 있어 필연적 요인이 될 것이라는 아주 간단한 산술입니다. 직접지급방식은 활인만 유효한 것이 아닌 오히려 탈 시설화의 주요한 영향임에도 현실이 되지 못하는 원인은 장애인당사자와 공급자와의 불평등한 권력관계로 밖에 해석하지 못함이 저의 미천함이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또한 공급자중심의 모형에서 절대로 가능할 수 없는 FACT는 당사자간 조정입니다. 남성의 이해로 여성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자본의 은혜적 조치로 노-노 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나아가서 집단의 권력화가 전제되지 않는 연대는 그 자체로 소멸계를 내재 할 수밖에 없음을 우리는 역사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주체형성이겠지요.

이에 대한 대처는 당사자들의 강력한 권익옹호이어야 함은 두말할 나위 없습니다. 다만 권익옹호의 전술적 채택이 중앙집권적 투쟁이냐 지역을 중심으로 한 설득과 절차적 정당성의 확보냐 물리적 투쟁이냐 담론을 중심으로 한 흐름의 전환(PARADIGAM SHIFT)이냐에 대해 이제 자유로워 질 때가 되지 않았나요? 그들만의 리그라는 냉소의 굴레를 벗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논의를 희화시키는 듯하지만 논리의 충돌로 인한 논쟁이라기보다는 소통의 부재로 인한 오해와 갈등의 증폭이 더더욱 팽배하다고 진단하고 있는 장애언론 모 인사의 장애인계에 대한 진단에 저 스스로도 자유롭지 못함을 솔직히 고백합니다. 폄하하는 것은 아니지만 독점적이라는 표현입니다. 표현의 진위에 있어 변별력을 갖기 전에 모든 센터가 낙인화되어 그나마(저는 자립생활이 마지막 희망이라고 생각합니다) 이후 전망에 대한 성장을 도모하기 전에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입지 않을까 하는 우려입니다. 센터와 장애부모가 적이 된 듯 인식하고 성과의 무임승차를 노리는 기회주의로 간주되는 것이 님의 목적이 아님을 잘 알고 있습니다. 소수의 의견(센터의 독점을 공식화 했다는 어떤 문건도 기사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이 있었다 치더라도 조정의 역할을 자임하는 것이 교사의 덕목이 아닙니까? 갈등의 증폭을 적대적 긴장감으로 외화하는 것이 더욱 문제가 아닙니까?

좀 더 많은 논의가 필요하겠으나 활인만 된다고 자립생활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특정 서비스의 과도한 주목이 자립생활의 모든 것을 해결하는 미션으로 활인을 상정하는 것이 오히려 더욱 기형이 아닌가 싶습니다. 노동, 주택, 연금, 선택적 수당(요즈음 보복부에서 얘기하는 ‘선택적’을 저는 증오합니다, 100억 정도 내놓고 L.P.G.의 대안인양 활인을 호도하고 있지 않나요, L.P.G.의 희생양이 활인입니까?), 사회적 모델을 근간으로 한 장애판정의 혁신이 없다면 활인 역시 수많은 가짜 장애인을 양산 할 것입니다. 그리고 아직 먼 길이기는 하나 자립생활의 최대한의 가치는 노동입니다. 일상생활과 직업생활이 연동되어야 실제로 소모적인 것으로 자립생활을 간주 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를 추동 할 수 있는 마지막 항전지로서 자립생활운동의 건강성을 부여하고 싶습니다. 기능으로서의 센터가 아닌 역동적인 장애인당사자중심의 탈 시설화의 대안으로서 말입니다. 긍정하든 긍정하지 않든 기술집약적 산업구조는 더 이상 노동을 만들어 내지 못 할 것입니다. 결국 사람의 얼굴을 한 사회, 사회복지를 근간으로 한 노동의 창출에 있어 장애운동, 자립생활운동의 낙관과 비관을 넘어선 건강성을 확인하고자 합니다.

김도현 선생님! 지금도 운동의 건강성과 소통을 도모하기보다 악성 댓글에 의존해 정서적 반감만이 팽배한 상황을 우리는 목도하고 있습니다. 자제에 권고가 안 통한다면 조직적인 자정의지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창피한 일입니다. 저 역시 모멸감을 느낄 정도로 비난을 감수한 적이 수회 있었습니다. 이후 더 비난을 감수한다 쳐도 지금 출발하는 사람들에게 비난 보다는 기회의 평등이 보장되었으면 합니다.

역량의 강화는 권한부여와 동시에 연동되며 작동되어야 말로만 그치지 않는 역량강화가 이 루어 집니다. 장애운동 역시 제가 알기로는 승리의 역사 보다 실패의 역사가 더 많았습니다. 기록하고 평가하며 이를 통해 작동 할 수 있는 사람을 얼마나 중심에 두었는가가 핵심인 듯 합니다. 아마도 대중추수냐 대중주체냐의 또 다른 표현인 장애인당사자주의가 이후 상당기간 핵심으로 작용 할 듯 합니다. 한국사회가 가감 없이 규명해왔던 중증장애대중 중심의 자립생활운동의 미래 말입니다. 이후 매를 들 것인지, 관조아래 따뜻한 시선으로 응원 할 것인지 소주 한잔하면서 넉넉하게 애기합시다.

*이 글은 자립생활지원 제도화와 관련한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준) 김도현 정책국장님의 기고에 대한 사람사랑 양천장애인자립생활센터 이상호 소장님의 반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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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운동을 한다는 것은 유전적으로 무척 훌륭한 DNA가 없다면 기실 불가능한 것이다. 자본주의는 항상 화려함을 강점으로 한다. 재벌을 비난하지만 재벌에 편입되고 싶은 욕망과 일치한다. 물론 loser(루저: 패배자, 손해 보는 사람)가 재벌로 편입되는 일은 통계학적으로 잡히지 않을 만큼 불가능하다. 자본의 입장에서 천박하거나 가난한 것은 화려한 조명아래 어두운 그늘이 된다. 물론 그것을 들여다보거나 살펴보려하는 용기를 가진 이는 드물다. 주위를 살펴 볼 만큼의 여유는 자본의 입장에서 허락되지 않는다. 하루하루 링거를 꽂은 채 연명치료를 하는 모양새로 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세월호 이후로 대한민국은 늘 울고 있다. 마치 타이게투스산(고대 스파르타인 들이 불구자 혹은 원치 않은 아이들을 버렸던 산의 이름)에 울려 퍼졌던 통곡처럼, 누군가는 타이게투스산에 울렸던 통곡을 대신해야 하지 않을까? 헛소리를 넘어서는 수준에서 통곡을 대신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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