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일 현재 단식농성 14일째를 맞고 있는 사람사랑 양천장애인자립생활센터 이상호 소장. ⓒ사람사랑 양천장애인자립생활센터

서울에서는 보기 힘든 제법 큰 눈이 오고 있습니다. 나이 사십에 뭐 그리 대단한 일도 아닌데 들떠서 눈 구경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사태를 보아하니 구경차원을 넘는 것 같습니다. 수습을 해보려 밤을 지세고 있는데 잘못하다가는 천막이 쓰러질 지경입니다.

눈을 치우다 생각해 보니 차라리 눈에 쓰러지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미 경찰의 압력으로 구청으로부터 철거 계고장을 받은 상태이니 말입니다. 굶어 죽는 것도 마음대로 못하는 나라에 제가 살고 있나봅니다. 비폭력을 폭력으로 대응하니 참으로 대단한 사람들입니다. 전기도 빈대를 붙고 있는 실정이라 끊겼다가 다시 들어오는 일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여의도는 온통 송년회 일색

한해의 막바지로 치닫고 있는 여의도의 밤풍경은 온통 송년회 일색입니다. 수십 명이 무리지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거나 커플들은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느라 밤새 여의도 일대를 헤매고 다닙니다. 이런 풍경을 보며 이따금 상념에 잠기기도 합니다. ‘왜 너네만 따뜻하냐!’는 식의 분이 치밀기도 하고 성냥팔이 소녀가 따뜻한 집안 풍경을 훔쳐보는 것 같은 슬픈 연민이 생기기도 합니다. 크리스마스트리, 캐럴송이 울리고 눈발까지 날리니 이거 참! 나 원! 사태악화이며 수습불가능입니다.

천막에 오던 날! “나 단식 들어간다.” (무슨 독립투사가 된 듯) 일방적인 통보를 하고 5살 먹은 아들 녀석에게는 출장 간다고 거짓말을 했는데 가족들의 천막방문으로 이틀 만에 들통 나 아들 녀석에게 그나마 조금 남아있던 위신마저도 바닥을 치고 말았습니다.

집안경제의 보탬은 둘째 치고 기본적인 가족 노릇도 못하고 짐만 되는 신세이니, 꼴이 말이 아닙니다. 이번 단식이 무사히 끝나면 낚시를 배워볼 요량입니다. 가족들의 연민의 시선이 늘어날수록 점점 숨이 막혀오던 차에 나름대로 발견한 기발한 아이디어인데 먹힐지는 의문입니다.

청춘을 가로막은 장애인복지법과 고용촉진법

지금도 생각해 보면 장애인복지법과 장애인고용촉진법은 내 청춘을 가로막는(?) 양대 악법입니다. 80년대 많은 청춘이 그랬듯이 낭만 버전의 활동에 젖어 장래를 고민하던 중 장애인운동이 운명이어 그랬는지 1989년 양대 법안 싸움에 휘말려 그 해 가을과 겨울 두 계절을 온통 보냈습니다.

장애인복지법은 1980년 광주를 피로 물들이며 집권했던 전두환 정권이 정권의 도덕성을 홍보하기 위해 제정되어, 법조문의 모든 말미는 노력조항이었습니다. ‘할 수 있다!’ 말입니다. 안 해도 된다는 말과 같은 것이죠. 애초에 장애인복지보다 군사정권의 아킬레스건이었던 도덕성의 반전이 목적이었던 만큼 법자체가 이념과 철학이 없는 사생아였던 것입니다.

89년 싸움을 통해 강제조항(해야 한다)으로 바뀌고 몇 차례의 개정이 있었지만 장애관련 법조항에서 조차 장애인은 법적 대항권을 원천적으로 상실한 존재입니다. 수십 회의 공청회를 했으며 보건복지부, 국회 등을 닮도록 드나들며 묻고 또 물었습니다.

"당신은 수용시설에 살기 원하나요?"

‘당신 같으면 수용시설에 살기 원하는지, 감옥이야 죄를 짓고 들어간다 하지만 그 곳조차 형기가 있는데 장애인은 왜 평생을 감금과 실종을 강요당해야 하는지, 또한 그것을 장애인복지라고 미화하고 호도하는지, 사회복지사만 매년 십만 명이 나오고 있는 이 땅에서 왜 이 비극에 대해 침묵하는지’를 말입니다.

장애인고용촉진법은 제정 이후 18년이 지난 지금에도 제정 원년의 고용률(2%)를 많은 부문에서 채우지 못하고 있습니다. 몇몇 기관의 달성이 이뤄지면 그것을 축하하는 웃지 못 할 해프닝이 되풀이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대한민국은 그 누구를 막론하고 소득이 없는 이에게 권한이 없습니다. 물론 선택권은 꿈도 꾸지 못 할 일입니다.

장애인에겐 백수의 고통이 평생에 걸쳐서…

비장애인에게는 짧은 백수 기간의 고통이 장애인당사자에게는 수십 년에 걸쳐 일어나고 있습니다. 특히 중증장애인에게는 만성적인 것으로 빈곤이 세습되는 현실로 극명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지역사회에서 산다고 한들 또 다른 시설로 전락하고 마는 현실을 확인케 하는 주요 원인입니다.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투쟁이 양대 법안을 아우르는 찬란한 투쟁이라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몇 가지를 확인하려 합니다.

일반고용은 둘째 치고 장애인복지 전달체계에서 조차 장애인당사자의 고용이 이뤄지지 않고, 직업군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으며, 있다 한들 대부분 한직에 머무르고 있다면 이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요? 이는 현실 불가능 하거나 예산상의 문제가 아닌 장애인복지를 둘러싼 내부의 권력에 무언가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닙니까? 아마도 대상화이겠지요. 사랑, 동정, 시혜 나아가 수용과 재활로 대변되는 대상화 말입니다.

‘대상화는 장애인당사자를 무능력(?)하게 만든 기원이며 기회의 평등을 보장하지 않았던 주류사회의 길고긴 야만의 폭거’(M. Oliver, 1994)라는 지적이 적어도 장애인당사자의 가슴을 울리는 경종임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할 수 있습니다.

장애인계를 범죄집단으로 몰고 간 2006년

2006년 장애인계를 침묵하게 했던 정부의 논리는 가짜장애인이었습니다. 중증장애인 중심의 예산적 조치를 내세워 마치 경증장애인은 상대적으로 큰 혜택을 보고 있는 것처럼 호도하였고 가짜를 만들어내는 잠재적 범죄 집단으로까지 호도했습니다.

이는 장애인계 전체의 도덕성을 의심케 했고 한발 앞서 정부는 장애인계의 저항을 막고자 장애인 당사자조직의 예산축소를 공공연하게 협박했습니다. 심지어 불쌍해서 예산 줬더니 데모하는데 쓰더라는 말까지 하며 장애인계의 위축과 유형의 분열, 장애인당사자와 장애부모의 갈등까지 조장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묻고 싶습니다. 상대적이지만 한국사회의 여성의 권리신장이 여기까지 온 것은 차이를 차별로 만든 이 사회의 폭거에 대한 여성당사자 스스로의 저항과 권리 찾기 운동이었으며 여성은 주체적 여성운동의 역사에 대해 자긍심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지금 저희가 투쟁하고 있는 바로 옆 천막에서 비정규직이 800만을 넘는 야만의 시대를 온몸으로 저항하는 노동자들도 1세기를 넘나드는 그들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기억하며 오늘의 이 싸움도 그 자랑스러운 역사의 한 과정이며 현재진행형이라는 사실의 상징 아닙니까?

넝마주의의 소요라고 폄하했던 50년 빈민운동역사의 결과로 그나마 임대주택과 수급권으로 대변되는 서민들의 정말 최소한의 존재기반이 마련된 것 아닙니까?

사회적 소수자가 자신의 빼앗긴 권리를 되찾아오기 위해 했던 그들 스스로의 헌신과 노력을 지금 현재 장애인당사자들도 온몸을 던져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단지 똑 같은 기회를 달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비장애인보다 더 달라는 것이 아닌 똑 같은 기회를 달라는 것입니다.

15일, 국회가 끝난다 하기에 긴 한숨을 몰아쉬었습니다. 내년이 대선인데…….

장애관련 법안은 대선정국에 밀려 18대 국회로 넘어가고…….

그러면 올해까지 달려왔던 모든 노력은 허사가 될 텐데…….

한주 정도 더 진행 될 거라 하지만 통과는 둘째 치고 심의라도 될까…….

현재 상황들을 되짚어보며 몇몇의 생각과 상념이 넘나듭니다.

단지 하나의 방향이 모든 것을 해결할 것이라는 편협함은 공론화에 있어 심각한 취약점을 갖고 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장애인자립생활운동이 장애인문제의 모든 대안인양 얘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탈시설화, 통합화, 주류화라는 장애인문제의 올바른 해결이라는 길목에서 현실 가능한 구체적이고 기능적 대안으로서의 자립생활을 말하는 것입니다. 장애인차별금지법, 장애인국제권리조약 등에서 장애인당사자 중심의 장애인자립생활을 주요하게 다루고 있는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님을 애써 항변하고 싶은 것입니다.

눈이 쏟아지는 천막 한 귀퉁이에서 쓸데없는 냉소에 시달리면서도 아직 희망을 놓지 않는 것은 장애관련 법안의 중심에 중증장애인이 있기 때문이며 그들은, 아니 우리는 지금보다 더 강해질 것이라는 확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그것은 자립생활운동을 구심으로 하는 중증장애인 중심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직시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단식농성 중에 드는 생각들

호수에서

내가 너를 잊지 못하고 아직도 사랑하는 것은

이 넓은 호수보다 더욱 가깝게 다가오는 것이 너의 얼굴이기 때문이다.

하늘 가득한 눈보다 더욱 가깝게 다가서는 것은 중증장애인의 현실입니다.

• 우리의 문제를 우리가 해결할 수 있도록 본래의 우리의 권리였던 우리의 권한을!!!

• 적어도 우리의 문제를 우리가 결정할 수 있도록 우리의 권한을!!!

• 중증의 장애인이 지역에서 자연사 할 수 있도록 우리의 권한을!!!

• 내가 싫어하는 사람 옆에서 벗어날 수 있는 우리의 최소한의 권한을!!!

• 똑같은 세금을 내면서도 가는 곳마다 천길절벽을 맞이하지 않을 우리의 권한을!!!

• 오줌과 똥을 사람답게 쌀 수 있는 우리의 권한을 !!!

• 닿지 않는 그리움과 서러움의 대상이 되지 않을 수 있는 우리의 권한을!!!

• 하늘 가득 떨어지는 눈을 보며 천막 한 귀퉁이에서 나보다 더 하늘이 그리운 중증장애인에게 선택과 결정의 권한을 !!!

• 장애관련 법안에 중증장애인자립생활 이 한마디만 들어 갈 수 있도록 우리의 권한을!!!

• 부모님과 같이 자살하지 않을 수 있는 우리의 권한을!!!

• 눈 오는 날 아들의 장애가 창피해 마중가지 못하고 집에서 눈물로 보내야 하는 부모가 더 이상 나오지 않을 수 있는 우리의 권한을 !!!

• 눈발에 파묻혀 더욱 그리운 중증장애인자립생활운동의 낙관과 비관의 공존을 헤쳐 나갈 수 있는 우리의 권한을!!!

2006년 12월 17일 단식농성장에서 '우리는 지금보다 더 강해질 것입니다'

*이 글은 19일 현재 장애인복지법 개정 및 생존권 보장을 위한 단식농성 14일째를 맞는 사람사랑 양천장애인자립생활센터 이상호 소장이 보내온 글입니다. 지난 17일 폭설이 내리던 밤에 작성된 글입니다.

장애운동을 한다는 것은 유전적으로 무척 훌륭한 DNA가 없다면 기실 불가능한 것이다. 자본주의는 항상 화려함을 강점으로 한다. 재벌을 비난하지만 재벌에 편입되고 싶은 욕망과 일치한다. 물론 loser(루저: 패배자, 손해 보는 사람)가 재벌로 편입되는 일은 통계학적으로 잡히지 않을 만큼 불가능하다. 자본의 입장에서 천박하거나 가난한 것은 화려한 조명아래 어두운 그늘이 된다. 물론 그것을 들여다보거나 살펴보려하는 용기를 가진 이는 드물다. 주위를 살펴 볼 만큼의 여유는 자본의 입장에서 허락되지 않는다. 하루하루 링거를 꽂은 채 연명치료를 하는 모양새로 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세월호 이후로 대한민국은 늘 울고 있다. 마치 타이게투스산(고대 스파르타인 들이 불구자 혹은 원치 않은 아이들을 버렸던 산의 이름)에 울려 퍼졌던 통곡처럼, 누군가는 타이게투스산에 울렸던 통곡을 대신해야 하지 않을까? 헛소리를 넘어서는 수준에서 통곡을 대신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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