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용시설이 아닌 지역사회에서 살고 싶다. ⓒ에이블뉴스

과거를 논하는 것은 상당히 두려운 일이다. 주관이 너무 개입되어 누군가의 또 다른 상처가 되지 않을까 하는 것이며 별 의미 없는 순간의 기억을 과대 포장하여 객관으로 해석하는 우를 범할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다. 그것이 운동의 역사이면 더욱 그러하다.

다만 회상 내지는 회한쯤으로 평가절하해주기를 간곡히 바란다. 회상과 회한을 뛰어 넘을 자격과 역량이 없음을 누구보다 나 자신이 뼈저리게 잘 알고 있으니 오해가 없기를 부탁드린다.

운동이 기획한 대로 되는가?

80년 후반 어느 때인가 주력운동에서 잘 나간다던 누군가와 간담회 비슷한 것을 한 적이 있다. 아마 서울장애인운동청년연합 시절인 듯하다. 당시 우리 안에서도 장애운동을 주력운동의 부문쯤으로 생각하는 활동가들도 꽤 많았던 것 같다. 지금도 장애운동의 독자적 진출(일정기간?)과 주력운동에 복무하는 장애운동의 단상은 아직 끝나지 않은 현재진행형이다.

당신들은 장애대중의 객관적 조건에 대해 기본적인 파악도 되지 않았으며 이는 장애운동을 과학적으로 해석하고 실천하는데 있어 상당한 약점으로 작용할 것이라는 것이 주요내용이었다. 난다 긴다 하는 선배들도 말 한마디 제대로 보태지 못했으며 꽤 많은 사람들이 무슨 큰 잘못이라도 한 듯 간담회는 패배감에 휩싸인 채 장을 마감했다.

그로부터 20년을 뛰어 넘어 주력운동에서 지명도를 갖고 있는 이와 담배연기를 나누며 짧은 대화를 한 적이 있다. 상황에 대한 꼴 같지 않은 분석이 대화의 주요내용이었다. 판단의 다름을 확인하고 장을 마감할 때쯤 그가 던진 한마디가 아직도 귀에 쟁쟁하다. 운동이 기획한 대로 되나요? 당치도 않은 짬밥을 가지고 책상머리에서 운동을 기획하고 있지 않은가에 대한 혹독한 비판이었으리라!

첫 번째! 의문은 상당히 풀린 측면이 있다. 당시가 80년 후반이고 보면 장애인등록제(정육점에서 고기등급 나누는 것과 병원에서 장애등급을 나누는 일 중 어느 것이 더 과학적일까? 우문현답이다)가 시행초기였고 당연히 장애대중의 토대는 미로의 한 귀퉁이를 차지했을 것이다. 이는 장애라는 객관을 적절히 은폐하고 국가의 책임보다는 민간의 책임에 중심을 두고 동정과 시혜가 만연한 빌어먹을 ‘장판’(장애인을 둘러싼 시선)과 나아가 시장의 논리까지 더하여 돈 되지 않음과 투자가치 없음으로 더더욱 장애인의 본질적 문제를 희소성과 질곡에 머물게 했던 원인에 다름 아니다. 애초에 분석 내지는 해결의지가 없었던 것이다. 적어도 장애인 문제는 전근대 내지는 봉건적 질서에 기생하고 있는 것이다.

돌아보면 우리의 의지보다 그의 무지가 비판받아 마땅했음에도 이렇다할 변명조차 하지 못하였던 것은 장애운동에 대한 특정한 편향과 주목, 소박함이 이유였을 것이다.

두 번째! 운동이 기획한 대로 되는가? 물론 할 말 없다. 다만 그렇다 해서 분석 없이 일정의 현안에 매몰되고 신앙처럼 숭배하는 것이 운동인가에 대한 반문이다. 더하여 과거의 모든 장애운동의 역사를 특정한 시각에서 재평가하고 그것을 통해 자의적 해석이 난무하다면 그것 또한 왜곡이며 비 과학이다. 나아가 의도적으로 증언이 누락된 기록이라면 시간의 문제일 뿐 의심의 눈초리를 피할 리 만무하다.

눈물나는 장복법 개정의 과정

17대 국회는 장애인계에 있어 몇 가지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정치적 입장을 떠나 장애인당사자 의원이 여야에서 활동을 시작하였고 이분들이 제일 처음 손을 댄 것은 장애인복지법 개정이었다. 이후 상당기간 장복법 개정 T/F가 진행하였고 장애인계의 주목받는 인사들이 양당 장복법 개정T/F에 참석하였다. 장애인정책의 꽤 많은 양과 질의 변화를 예상하며 운영되었으나 17대 국회 끝자락 까지 이렇다할 반전을 꾀하지 못하였다.

장복법 개정의 반전은 언제나 그랬듯이 현장에서 시작되었다. 김포 사랑의 집 사건과 희망한국 프로젝트 내용 중 장애인시설 강화 정책이 알려지면서 I.L. 현장의 거친 반대에 부딪히게 되었다. 06년 여름 한증막 같았던 과천 정부청사 앞에서 몇 차례 집회와 두 달에 걸친 천막농성을 시작으로 장복법 개정의 불씨가 지펴진 것이다. 집회는 초기 상당히 소박한 양상이었다. 허나 시간이 갈수록 탈 시설 장애인당사자의 증언이 회를 더 해가며 집회 참석자들의 분노를 낳게 했으며 이는 중증장애인당사자의 실존적 위기의식까지 형성되기에 이른다. 지역에 살고 있는 것은 한시적일 뿐 언제 시설에 갈지 모른다는 실존적 위기의식! 그것 이었다. 또한 그것이 똑 같은 장애를 갖고 있는 탈 시설 장애인당사자의 증언에서 시설의 문제가 확인됨으로써 대오는 더욱 강고함을 더 해갔다. 김포 사랑의 집에서 벌어진 성폭행, 향정신성 의약품 강제투여, 타살 의혹은 중증장애인당사자의 공분을 불러 일으켰으며 시설확대가 희망한국의 비전이라는 정부의 판단에 반대 한 것이다.

과정은 눈물나는 것이었다. 단 몇 시간의 집회 참석을 위하여 전국의 중증 장애인당사자들이 활동보조인도 없는 상황에서 뜬 눈을 지 세우며 과천까지 한 걸음에 달려오는 것이었다. 단 몇 시간에 집회참석이 가져올 건강의 악화를 뻔히 목도하면서 말이다. 허나 그들의 얼굴은 밝았다. 대안을 제시해 줄 전문가도 없었으며 장애인계의 주목 역시 받지 못하였다.

외로움의 연속이었다. 토론이라는 것은 반일 만국 공동회 수준의 반복된 증언이었고 논의의 수준 역시 증언의 틀을 크게 벗어나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현장 역시 열악하여 이동과 접근의 문제, 신변처리 문제등 항시적이고 일상적인 고통의 연속이었다. 다만 끊임없이 결합하는 전국적 양상의 주인공들은 알려진 얼굴이 아닌 새로운 분들이 대부분이었던 것은 이후 실천을 이어 갈 큰 힘이 되어 주었다. 그것이 목적의식적이든 자생적이든 장애운동의 역사에서 발견할 수 없었던 양상이다. 시설문제를 둘러싼 기간의 노력은 있었으나 장애인당사자 중심, 나아가 탈 시설당사자 중심의 전국적이며 중앙에 집중했던 실천은 최초로 기록될 것이다.

일정의 성과를 뒤로 하고 실천의 장은 국회로 자연스럽게 이동하게 되었다. 장애인복지법 개정 필요성의 절박하고 간곡한 발견이 그 것이다.

과천의 의지를 구조적으로 해결하는 것은 장복법 개정이었다. 아무리 정부의 정책을 변화 시킨다 해도 장애를 둘러싼 기본적인 입장을 반영하고 있는 장애인복지법이 여전히 수용과 재활 중심의 정책을 고집한다면 이는 장애인에게 장애를 변화시킬 것을 강요하는 것이며 끊임없이 의심 받아왔던 장애의 속도와 변화가 만족스럽지 않을 경우 우리 장애인당사자들은 언제 시설로 갈지 모른다는 거역할 수 없는 사실의 발견이었다.

장애인복지를 어떤 형태로 해석한다 해도 장애인은 시설을 반대한다. 적어도 탈 시설장애인당사자들은 시설에 장애인동료가 감금되는 것을 반대한다. 장애를 둘러싼 재활의 역사는 적어도 중증의 장애인에게 희망이 되지 못했음을 문서가 아닌 전문가의 판단이 아닌 장애인동료의 증언에서 가감 없이 규명되었다.

시설이 아닌 지역사회에서…

우리는 시설수용이 아닌 지역에서 생활해야 하는 것.

우리는 치료를 받아야할 환자도 아니고 보호 받아야할 어린이도 아니며 숭배를 받아야할 신도 아니며 동정과 시혜의 대상은 더더욱 아님을 발견하는 것.

우리는 우리의 서비스를 관리해야할 입장에 있음을 아는 것.

우리는 장애 그 자체보다 장애를 장애답게 만드는 장애사회를 변화시켜야 하는 것을 아는 것.

그 수많은 예산이 장애인에게 투여되지만 단 한 번도 우리가 지역사회 사는 것은 서비스가 아닌 권리라는 것을 가르쳐 준 이 없었던 것에 대한 과거와 현재의 재발견이며,

장애를 변화시키고자 했던 노력보다 사회가 변화되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준이 없는 과거와 현재의 재평가이며,

동정과 시혜를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야 했던 것이 굴욕이었음을 눈물로 고백하는 장애인동료의 시선에서 나 또한 습기를 감추지 못했음을 공감하는 것이며,

장애는 우리에게 강점으로 작용할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것에 신뢰이며,

우리가 우리문제에 대해 주의, 주장을 하는 것은 권리를 넘어선 의무임을 장애인동료의 아픔에서 체화하는 것이며,

그 아픔은 슬픔과 연동되지만 그것에 끝은 희망이고 우리가 우리의 문제에 주체가 되어야할 때가 됐음을 각인하는 것이며, 이는 적어도 장애인복지전달체계에서 당연히 이루어 져야 함을 과천과 국회에서 공유했고 또한 외쳤다.

장애인복지법 개정 활동은 한 여름 벌건 대낮에 과천의 뜨거움에서 한 겨울 칼바람이 나뒹구는 국회 앞 천막에서 시작과 끝을 마감했다.

희년의 비과학 장애인복지법 개정

06년 장애인계는 지난 시기보다는 더, 단절의 시기를 복원했던 자의적 평가보다 더 많이 무엇을 이루었던 것 같다. 장애운동 안에 주력과 부문, 주체와 비주체, 이권과 인권의 새로운 탄생은 그동안 장애인계가 난맥상을 보여 왔던 선택과 집중, 대의를 위한 긍정적 자기전복이라는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줬다. 더구나 이제는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중증장애인의 진입에 대해 누구도 부정하지 않으며 그들이 주력이 될 것이라는 것에 이의를 달지 않는다. 외국의 어느 장애인선배는 이렇게 얘기했다. 소개하자면 70에 가까운 어르신이며 단 한 번에 비장애인이 될 수 있는 약이 있어도 먹지 않겠노라 담담함과 동시에 잔잔한 미소로 얘기하는 것을 보아도 내공지수가 감지되는 분이다. 더군다나 나의 연식에 대한 알 수 없음과 외국인이라는 불편함도 있었을 터인데도 말이다. 한국의 황우석 신드롬에 대해 냉소로 일관했던 것은 둘째 치고 무위로 끝날 것을 예견한 것 만 보아도 ‘포스 만땅’의 신성인 분이다. 나는 아직 그 약에 관련한 화두에 대해 답을 내지 못했음을 솔직히 고백한다.

다만 이제 반 정도는 장애인으로 살았는데 이후 삶을 비장애인으로 사는 것이 불편할 수 있겠다는 심정으로 나도 약 안 먹는다. 로 구라를 치고 다닌다. 아직도 그 분의 말씀 중에 가슴 속으로 절절한 것은 다음과 같다.

"아무리 강력한 법안을 마련한다 해도 그것은 과정이며 끊임없는 현재진행형이기 위해서는 전국적이고 일상적인 장애인의 공간 안에서 권리의 싹을 틔워야 한다. 이슈는 그 반열위에 서야 한다."

선배의 말이 아무런 지원도 없는 상황에서 탈 시설 당사자의 노동으로의 참여를 해결하고 있으며, 시설에서 지역으로라는 권리의 선언을 그저 선언이 아닌 현실로 만들어 내고 있으며, 중증의 장애인이 중증의 장애인을 일상공간에서 만나고 나아가 장애가 강점이 되고 있으며, 신체장애인의 자립생활의 성취와 마감을 넘어 지적장애인의 자립생활을 목도하고 있으며, 또한 이 모든 성과가 전국적이며 그것이 장애인자립생활센터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고 끊임없는 현재진행형이라면 대안이 될 듯하다.

이 과정이 탈 시설화, 통합화, 주류화로 대변되는 장애인권리의 종지부를 찍는데 있어 주요한 단초라면 이번 장애인복지법 개정을 통한 자립생활서비스의 법적 기반 마련, 장애인복지전달체계로써의 I.L. 센터의 진입등은 강력한 법안의 전국적이며 일상적인 권리를 중심으로 한 시설의 대안으로써 공간적 유의미를 장애인자립생활센터를 통해 뛰어넘는다 하겠다.

특정종교에서는 50년마다 희년이 온다고 한다. 말 그대로 장애운동이 20년 쯤 됐으니 30년이 지나면 현재보다는 비약적으로 장애인의 삶은 변화할 것이다.

장복법 개정 이후의 과제는?

장복법 개정 이후 문제는 남아있다. 시행령과 시행 규칙, 조례제정 말이다. 안을 만드는 것도 중요하나 현장을 강화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중증의 장애인들이 지역사회에서 일상적으로 모일 수 있고 지역을 변화시킬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 장애 강점적 조직 문화와 장애인지적 환경의 변화를 도모함으로써 장애사회의 변화를 촉구할 기준과 척도, 유형을 포괄하는 장애인당사자의 결집, 지적장애인의 자립생활, 노동 등의 과제를 안고 장애인복지법은 현재진행형이다. 이후 과제에 있어 그 힘의 수위를 떠나 아마도 문제해결의 진행은 전국적이며 일상적으로 이뤄질 것이다. 누군가의 시선에선 한심하고 느려 보이겠지만 우리의 시각에서는 신나고 즐겁고 행복한 자립생활운동의 방식 그대로 진행될 것이다. 과제가 산적한 만큼 피곤이 앞설 듯하다. 허나 즐거운 마음으로 기다려진다. 선명한 선언의 불안함보다 역량의 결집을 예지하는 자립생활운동이 더 즐겁다.

두 번 몰매를 맞았으나 토대의 구축은 IL에서는 이미 자연발생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으며, 장애운동은 단절됐던 것이 아닌 계승과 혁신이 연동되고 작동된다면 새로운 역사를 쓰게 되는 것이다. 그 중심에 자립생활이 있다. 나는 더욱 느려질 예정이며 자립생활을 통해 행복하고자 한다. 비극이 숨통을 조여오거나 책임만이 난무하는 운동은 생이 짧기 때문이다.

전국의 자립생활 활동가! 장애인복지법 개정을 지지해 주셨던 각계인사! 희년을 맞이하고자 하는 자립생활운동에 의무와 책임을 다하며 희년의 행복함을 맞이하자! 그 과정에 중증장애인 중심의 일상적 공간, 현장을 강화하는 노력 또한 확인하자!

*이 글은 본지가 지난 3월 6일 장애인복지법 전부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한 것과 관련해 사람사랑양천장애인자립생활센터 이상호 소장님께 요청해 받은 글입니다.

장애운동을 한다는 것은 유전적으로 무척 훌륭한 DNA가 없다면 기실 불가능한 것이다. 자본주의는 항상 화려함을 강점으로 한다. 재벌을 비난하지만 재벌에 편입되고 싶은 욕망과 일치한다. 물론 loser(루저: 패배자, 손해 보는 사람)가 재벌로 편입되는 일은 통계학적으로 잡히지 않을 만큼 불가능하다. 자본의 입장에서 천박하거나 가난한 것은 화려한 조명아래 어두운 그늘이 된다. 물론 그것을 들여다보거나 살펴보려하는 용기를 가진 이는 드물다. 주위를 살펴 볼 만큼의 여유는 자본의 입장에서 허락되지 않는다. 하루하루 링거를 꽂은 채 연명치료를 하는 모양새로 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세월호 이후로 대한민국은 늘 울고 있다. 마치 타이게투스산(고대 스파르타인 들이 불구자 혹은 원치 않은 아이들을 버렸던 산의 이름)에 울려 퍼졌던 통곡처럼, 누군가는 타이게투스산에 울렸던 통곡을 대신해야 하지 않을까? 헛소리를 넘어서는 수준에서 통곡을 대신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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