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는 뇌병변 장애인이었다. 어렸을 적 높은 열병을 앓고 사경을 헤매던 아이를 이렇다 할 치료조차 하지 못했던 어머니의 죄책감 정도가 그의 장애의 시작이었다는 말만 들었을 뿐이다. 그는 비장애인으로 살았던 기억이 없는 이었다.

지방에서 생의 전부를 살았던 그는 다른 도시의 기억은 없었다. 다만 어머니의 자살, 그의 타살이 되었을 지도 모를 부산 영도다리의 지명은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우리의 어머니들이 대부분 그렇듯 그의 어머니도 그를 낫게 하기 위해 그 어려운 살림에도 온 정성을 다해 전국을 돌아 다녔다. 물론 장애를 낫게(?) 아니 비장애인이 되리라는 기적을 향해 말이다.

큰 병원은 애초에 엄두가 나지 않으니 용하다는 민간요법을 찾아다녔던 것이 유일한 치료였다. 그 끝은 부산 어딘가 용하다는 침술사였고 금침 시술을 몇 달간 받아오다 차도가 없자 어머니는 부산 영도다리에 그를 업고 한 서린 생을 마감하고자 했다. 어머니에게는 자살이지만 그에게는 타살의 순간이었다. 참으로 한 서린 생의 마감이다.

생모에 손에 이끌려 생을 마감해야 하는 그의 절망도 그렇지만 아이에 장애가 마치 그녀의 죄 인양 취급했던 주변의 폭력에 20대 초반의 어머니는 다른 선택은 없었다. 하혈이 심했던 그녀에게 산후조리는 차라리 사치였다.

아이의 장애가 확인되는 순간 주변의 따가운 시선, 아이 치료로 인한 빚, 남편 집안의 하대를 고스란히 떠안아야 했다. 치료비는 각 도시를 돌아다니며 노점을 하며 충당하였고 그 고생으로 인해 모유가 돌지 않아 암죽으로 아이의 허기를 달래야 했다. 그녀는 아이가 남긴 암죽으로 생존을 이어 갔다.

돈이 없으니 여관은 꿈도 꾸지 못 할 일이었고 여인숙, 그마저도 돈이 없으면 시장 어귀! 연탄불 기운이 남아있는 곳에서 아이를 품에 안고 밤을 지새우는 일도 많았다. 참으로 힘겨운 삶이었다.

풍찬노숙을 하리라 마음을 다잡고 시장 어귀를 서성이던 어느 날! 밀린 방세 덕에 피해 다니던 여인숙 주인과 마주치게 되고 방세를 재촉하던 주인은 그녀의 가슴에 대못을 박고 만다. 장애인시설 앞에 버리던가, 아니면 산사람은 살아야 하니 아이를 어찌 해 보던가 해야지 얼마나 버틸 수 있겠냐며….

순간 그녀는 귀를 의심했다. 아이를 어찌 해보라는 것이 무슨 뜻인지…. 심장이 멈출 듯 한 공포와 아이의 암죽 그릇과 함께 달라붙어 있던 그 간의 설움이 마주치는 순간이었다. 마치 누군가에게 끌려가듯 영도다리 앞을 아이를 들쳐 엎고 걷고 또 걸었다. 눈물과 설움이 범벅이 된 체 말이다. 삶을 정리하고자 하면 불과 몇 초 사이에 살아왔던 것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던 누군가의 말과 함께….

다리위에서 몇 시간을 울고 또 울었던 그녀는 그만 가고자 했던 목적을 잃어 버렸다. 암죽을 먹일 시간을 훌쩍 넘긴 탓에 배고픈 아이는 자지러지게 울었고 시장 길을 뒤적이며 모성본능과 함께 암죽을 끓일 연탄불을 찾았다. 웬일인지 눈물은 멈추어 버렸다. 아이의 암죽을 끓일 불을 빌려 주었던 시장 상인은 그녀에게 시장 귀퉁이 천막 한 칸을 내 주었다.

K가 어머니로 들은 애기는 여기까지이다. 왜 자살과 타살은 감행되지 않았는지 알지 못한다. 다만 그녀는 그 후 아버지에게 돌아가지 않았다는 말만 듣고 있다.

드물게 비가 오거나 눈이 와서 노점이 불가능한 날에 술에 취해 있는 어머니에게 아주 가끔 들을 수 있는 애기이다. 그로서도 별로 유쾌하지 않은 과거이니 캐묻지 않았다. 아직도 어머니의 가슴에는 그 설움이 고스란히 남아 있으니 술자리는 눈물로 파장되었고 미수에 그친 이유를 묻기에는 용기가 나지 않았던 것이다.

K는 학업을 포기하였다. 장애가 있으니 놀림의 대상이 되었던 것은 당연한 것이었고 어느 날 병신이라고 놀리고 도망가는 급우를 참다못한 K는 다음날 시장에서 가장 날선 포크를 도시락과 함께 가져갔다. 물론 급우의 허벅지는 그날 세군데 구멍이 뚫려야 했으며 당시 잘 나갔던 포크는 미군부대에서 나온 것이었고 마침 그 포크는 삼지창이었다.

다음날 어머니는 학교에 불려갔다. 어머니는 K의 예상과는 달리 언쟁 중 오히려 학교의 책임을 물어 교장 선생님의 귀 싸대기를 올려붙였고 당연히 학교는 K를 정리(?)했다.

K는 가업을 이어 노점을 시작하였다. 어렸을 적부터 익숙했던 시장 골목골목에서 자잘한 심부름을 도맡으며 인기를 구가했던 K는 다방 담배공급까지 영역을 넓혔다.

다방에서는 일일이 손님들이 주문 할 때 마다 사러가는 것이 귀찮은 일이었고 하여 담배는 커피 재료상에 의해 공급되고는 하였다. 시장 메커니즘을 훤히 꿰뚫고 있었던 K는 시장가격보다 훨씬 싸게 담배를 공급 할 수 있는 루트를 확보하는 일쯤이야 쉬운 일이었다.

다만 재료상들과의 싸움이 남아 있었으나 특유의 강짜와 삼지창의 공포 덕에 손쉽게 담배독점권을 확보 할 수 있었다. 더구나 동네 건달들과 거래를 트고 있었던 K에게 재료상 쯤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노점, 다방 담배공급, 이러저러한 심부름 값 등으로 K는 어머니의 짐을 나누어 가질 수 있게 되었다.

민지! 민지는 복 집 딸이었다. 지금도 회 중에는 복이 가장 비싸게 팔리고 있는 것을 보면 민지는 당시 꽤 살림이 괜찮은 집안의 딸이었다. 태어난 곳이 광주였고 원하든 원하지 않던 민지는 80년대 격동의 시기를 목도하며 어린 시절을 보내왔다.

80년 광주. 그녀의 나이 열 살!

광주는 피의 도륙을 감내했어야 했고 그 어린나이에 살육의 기억은 민지의 가슴에 영원히 남게 되었다. 누군가에 의해 시민이 저격되는 모습을 보고 만 것이다.

머리에 총알이 관통하면 비명 없이 마치 실오라기를 허공에 흘리듯 땅 바닥에 몸을 누이게 된다. 한판 살육의 시간이 지난 터라 도시의 중심은 휑하게 버려졌었고 복 집 주변을 뛰어 놀던 민지의 시선에 누군가 금남로의 중심을 빠르게 이동하는 모습이 보였고 저격의 장면을 또렷이 평생 기억하게 된 것이다. 너무 충격적인 장면은 상이하게도 마치 바람에 떠다니는 담뱃재처럼 건조하다. 다만 기억의 순간 심장이 멈출 뿐이다.

광주는 누구라도 할 것 없이 자연스럽게 80년대의 저항의 성지로 각인 되었다. 누군가에게는 건조한 심장의 멈춤일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는 잊혀져간 일상일 수도 있겠으나 꽤 많은 이들에게 전자에 가까웠다. 민지의 기억과 성장은 80년에 멈춰진 채 대학을 가게 된다. 아이러니 하게도 부자 집 딸이라는 것이 낙인이 되어 광주에 흐름과 민지는 가깝게 다가서지 못하고 있었다. 당시에는 청춘들의 들끓는 충정은 좋았으나 말도 안 되는 재단과 어설픈 낙인 또한 공존하고 있었다. 하여 민지는 아슴푸레 짐작하고 있는 자신의 미래와 학원의 문제를 광주가 아닌 곳에서 고민하게 되었고 곧 실행에 옮기게 된다.

부모님도 민지의 수면 끝, 식은땀과 함께 찾아왔던 살육의 아픔을 어찌 할 수 없었다. 학원을 정하고 마귀 같이 취급되었던 복 집 딸의 낙인을 벗기 위해 등록금만 원조를 받기로 한 민지는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게 되었다. 무슨 귀신에 씌었는지 좋은 자리(과외 등등)는 친구들에 손에 넘어가고 민지가 일을 정하게 된 곳은 또 다시 복 집(?)이 돼 버렸다.

학교 옆에는 호수가 흘렀었고 캠퍼스를 벗어나면 음식점이 즐비한 가운데 정원을 끼고 복 집이 있었다. 어려서부터 복 집 딸이었으니 복 집의 내막을 훤히 알고 있던 민지는 곧 복 집 아르바이트에 익숙하게 됐다. 학우들 사이에서는 또 다시 복 집 딸이라는 별명을 얻게 된다. 일과 학업이 몸에 익숙해지니 시간의 여유가 생기게 되고 이러저러한 술자리 끝에 노래패 제의를 받게 된다. 노래를 좋아하기는 했으나 잘 하지 못한다, 핑계를 대던 민지에게 선배들은 장비나 옮기면 되겠다, 하여 노래패에 가입하게 된다.

노래를 못하는 노래패만큼 고통스러운 것은 없다. 연습 때 ‘삑사리’는 오로지 그녀만의 전유물이었으며 어찌 여자애가 2옥타브도 올라가지 않느냐며 인간문화재 제안을 해야겠다는 놀림 사이에 그녀는 있었다.

나름 중앙 노래패라는 자부심이 있었건만 정기공연의 대미는 역시 민지가 장식했었다. 화음 정도를 넣는 대목이었고 그녀의 삑사리가 염려되어 대단히 짧은 소절을 맡겼건만 그녀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연습 때는 올라가지 않던 그녀의 목소리는 공연 때만 되면 하이 톤으로 올라가고 그마저도 끝은 갈라져 괴성으로 마감을 했다.

공연에서 절대 있어서는 안 될 배우와 관객이 하나 된 정적만이 그날 공연의 대단원을 장식하고 말았다. 뒤풀이는 당연히 민지의 대성통곡으로 이어졌고 주위의 동료들은 나름 위로를 하려했으나 사태가 워낙 코미디인지라 위안은 웃음바다로 끝났다.

재앙은 이어져 단과대 노래패까지 만만히 보기 시작하여 통폐합 제안이며, 중앙 노래패 자리를 넘겨 달라는 동아리 협박까지 받아야 하는 수모를 겪게 된다.

참담한 결과였다. 탈퇴를 결심한 그녀는 연습을 배 째기 시작했고 뒤풀이만 찾아다니며 그날의 재앙을 되새기며 깽판을 놓기 시작했다. 선배는 노래는 기교가 아니며 대항문화의 정신을 이어받아 저항을 아로새기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술(사기 내지는 구라로도 표현된다)로 그녀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그렇지요? 선배. 계속 노래패 해도 되지요?”

“그럼 너만큼 튼튼한 사람이 어디 있니!!!!”

선배는 장비만 옮겨 주기를 원했었다. 십년 뒤에 밝혀진 사실이다. 학교는 대동제를 맞게 되고 지역주민연대한마당을 기획하게 된다. 노태우 정권은 88올림픽을 맞아 외국 손님을 맞기 위해 도시정화를 명분으로 노점상 단속을 대대적으로 실시하였으며 노동, 학생, 농민 3대 주력운동을 넘어 새로운 영역으로 도시빈민운동이 복원되었던 시기(학생운동사 - 일송정)였다.

대동제에 지역 노점상분들을 모셔 삶의 진솔한 애기도 듣고 대동제 주점판매 등 수익도 도모해 드리자는 제안은 설득력을 갖게 되었다. 노래패 입장에선 마땅히 쓸데가 없었던(?) 민지는 복 집 아르바이트가 장점이 되는 순간이었다. 주방일하는 분들과 지역의 시장을 돌아다니며 식재료를 구입했던 경험, 어렸을 적부터 부모님을 도와 음식장사의 마진율을 훤히 꿰뚫고 있었던 그녀의 장점이 빛을 말하는 순간이었다.

K와 민지는 그렇게 만났다. 지역을 나름 주름잡았던 K는 노점상 단속과정을 누구보다 뼈저리게 느꼈고 민지는 주민참여를 위해 지역 청년의 결합을 누구보다 아쉬워했던 참이다. K는 발 빠르게 주민들을 조직했고 노점단속으로 생존의 위기에 몰렸던 분에게 대동제 주점 참여는 마른 날 단비 같은 제안이었다. 참여율은 걱정했던 선배들은 민지의 맹활약에 고무되었고 그녀는 K의 조력을 성실하게 소개했다. 대동제는 성공리에 마쳤고 공연의 끝 무렵 K가 소개되었다.

언어장애가 있었던 K는 느리지만 확실하게 애기했다. 시장의 상황을…. 처절한 단속과정이며, 한 평짜리 노점이 우리에게 왜 생존인지에 대해, 그 누구보다 감동적으로 말이다.

며칠을 밤을 새워 장터를 만들고 시장을 보고 지나가는 학우들을 새워 도시빈민문제를 홍보하고 동참을 촉구하는 나날을 보냈던 민지와 K는 자연스럽게 가까워 졌다.

대동제 이후 노래패와 K는 형, 동생 할 정도로 친해졌고 K는 학교에 놀러가는 날이 잦아졌다. 민지 또한 시장에 K를 보기 위해 찾아가는 날이 많아졌다. K는 학원을 둘러싼 이러저러한 기회를 통해 새로운 시각에서 세상을 보게 된다.

88년 IMF(국제통화기금)총회, IBRD(국제개발은행) 총회를 맞아 K 역시 대대적인 노점 단속을 당하게 된다. 단속과정에서 관과 깡패들과 결탁한 기업형 노점은 오히려 생존형 노점을 탄압하는데 앞장서게 된다. 단속반원들의 폭행은 장애가 있는 K라고 비켜가지 않았다.

리어카를 빼앗기고, 흠씬 두들겨 맞고, 경찰서를 제집 드나들듯 하던 K는 어느 덧 가지지 못한 자의 입장에서 가진 자와 맞서게 된다. 그것이 운동인 것은 꽤 시간이 지난 뒤에야 깨닫게 됐다.

그 후 십년! 민지는 실수(?)로 교수가 되었다. K는 지역에서 꽤 지명도를 가진 활동가로 성장하였다. 각자 길이 갈라져 헤어진 시간이 많았다. K는 민지에게 알량한 영웅심에 활약상을 글에 담아 몇 번인가 보냈었지만 민지는 웬일인지 답이 없었다. 자유를 빼앗겨 시대와 함께 저항했던 민지에게 시대는 곧이어 남동생을 앗아 갔다. IMF를 맞은 복 집을 일으키고자 부모님은 사채까지 동원했고 그 끝은 실로 참담했다.

집안을 일으키고자 남동생은 학업을 포기한 채 민지의 학비를 대기 위해 공장에 다녔고 당연히 민지는 집안을 일으켜야 할 희망(?)이 되고 말았다. 번뇌와 고민 끝에 활동을 지속했던 민지는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겪게 된다. 일련의 시위 끝에 민지는 구치소로 가게 되고 누나의 활동이 잠깐 스쳐가는 것으로 생각했던 남동생은 도대체 집안사정은 아랑곳없는 누나에게 절망한다.

10월 어느 날! 민지는 병원에서 연락을 받는다. 도착한 민지는 싸늘한 남동생의 시신을 마주 해야 했다. 동생은 자살했다, 라는 말을 원망 섞인 눈물과 함께 전하는 부모님의 잦아드는 목소리로….

그해 겨울, 지나지 않는 또 다른 봄과 여름이 세월을 재촉할 동안 민지는 보육원에 있었다. 영혼을 빼앗겨 사람의 모양새로 살 수 없으리라 생각했던 민지는 어느 해인가 자원봉사 동아리 후배들과 들렀던 보육원에 몸을 의탁했다.

민지는 지인들의 저주에 가까운 비난을 무릅쓰고 투항(?)을 결심했다. 집착에 가까운 공부를 하며 그리운 동생의 기억과 함께 학업을 이어갔다. 목숨보다 소중했던 지인들을 그리며 활동의 기억과 순간들 사이에서 그녀는 유령처럼 떠돌았다. 동아리방, 공연장, 장터, 뒤풀이 터를 떠돌며 눈가에 습기를 머금곤 했다. 거의 집에서 잠을 청하는 날은 없었다. 지인들과 함께 했던 모든 공간에서 그녀는 유령처럼 맴 돌았다. 머리가 깨진 줄도 모르고 술에 만취해 있기도 했고 동생이 잠든 묘지 주변에서 통곡을 하기도 했다. 환각과 환청 사이에 그녀는 있었다.

몇 해를 보내고 그녀는 학내 활동의 화려한 전력이 오히려 도움이 되어 학생처의 추천으로 교수가 되었다. 변절이니 뭐니 욕을 먹으며 말이다. 지인들과 교수사회 모두 그녀에게 냉소로 일관했다. 복 집 딸이었으니 돈 좀 썼겠지! 학교 잔디를 깔았으려니, 등등….

사람 사이에서 사람을 그리워하는 것은 힘든 일이다.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곳이면 어김없이 그녀는 홀로 슬피 울곤 했다. 그 수많은 사람 중에서 유독 그리운 것은 K였다. K는 지인들과 달리 건강한 생명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지인들에게 실망하고 있었다. 노동의 시간보다 유희의 시간이 많았던 것이다. K는 달랐다. 누구보다 학습과 노동을 성실하게 임했고 후배들을 챙겼으며, 말이 아닌 행동으로 모범을 보여 주곤 했다.

어머니가 몸져누우시고 생존을 걱정해야 했던 어느 날! 불과 열 몇 살에 K는 화장지를 등에 지고 가게 곳곳을 헤매고 다녔다고 했다. 멸시와 천대도 함께 말이다. 어머니의 안위만 보장된다면 못 할 것이 없었다며 넉넉하게 웃음으로 얘기하는 K의 고백은 민지에게 경외심을 불러 일으켰다.

글줄이라도 알라치면 학습이니 뭐니 하며 군림하기에 바빴던 지인들에 모습과는 다른 것이었다. 그들은 분명 노동의 시간보다 군림하거나 지식의 유희가 더 많아 보였다. 그런 지인들에 모습에 민지는 좌절 했었다. 지인들은 시간의 문제였을 뿐 그들 역시 투항을 택했다.

K는 그 후에도 활동을 이어갔다. 보고 싶었으나 자신의 변화에 대한 K의 반응이 두려웠던 민지는 K를 그저 그리워하기만 했다. 아마도 서럽게 그리운 위안을 K에게 받고 싶었던 듯 하다. 지인들의 투항과 과거는 어느 덧 술안주가 될 정도로 천박함을 더 해 갔다. 당연히 지인들과의 술자리를 피하던 K는 민지의 소식만은 궁금했었다.

어느 해였던가! 장터를 꾸리며 만났던 민지는 K의 활동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시장을 지나며 먼 곳을 지나던 민지는 K와 마주치게 된다. K의 절름거리는 걸음을 먼 곳에서 보는 순간 민지는 피할 것인가, 마주 칠 것인가를 짧은 순간에 고민하다 사무치게 그리워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걸음을 멈추었다. K가 그리운 것인지, 동생의 죽음 이후 누구에게도 받지 못했던 위안이 그리운 것인지는 마주치는 그 순간에도 확인되지 않았다.

뭐가 그리 잘 났다고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냐, 라는 원망 어린 K의 시비에 민지는 그저 웃음만 보였다. 어찌 죄책감이 K뿐 만이었겠나만은 민지는 그저 희죽 웃었다.

“야! 너 아직도 데모 질 하고 다닌다면서…. 세상은 눈깔이 팍팍 돌아 갈 정도로 변하고 있는데 빙신 삽질을 해요. 삽질을….”

“그래 아직도 데모 질 하고 다닌다. 어쩔래….”

“꼴값을 떨어라 빙신….”

“너! 빙신 꼴값이 얼마나 무서운 줄 모르는 구나.”

요즘은 병신도 데모하냐, 라는 말을 시위현장에서 백골단에게 들었던 K는 이후 병신이라는 말이 평생 저주가 되었을 법도 한데 민지의 빙신 운운하는 소리는 왠지 살갑게 느껴지곤 했다.

“야! 이 우라질 년아! 허벅지에 빵꾸나고 싶냐.”

K와 민지는 낄낄 데며 술잔을 기울였다. “야! 오늘 술값은 내가 낸다”는 K의 호기에 민지는 바로 맞받아쳤다.

“빙신! 너보다 내가 수십 배 더 번다.”

“우라질 년! 가난한 학생들 피 빨아서 번 돈으로 니 술 안 먹는다.”

“빙신! 꼴에 존심은 있어 서리! 지랄을 해요, 지랄을!”

그날 술값은 민지가 냈다. 마침 술자리가 복 집이었으니 K가 감당하기에는 모자란 노릇이었다. 둘은 밤을 도와 술을 마시고 신 새벽을 함께 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민지는 버스 창가에서 또 다른 K를 발견한다. 화장지 한 무더기를 리어카에 실은 채 가게 곳곳마다 팔러 다니는 장애인당사자의 모습이었다. 그도 뇌병변장애였다. 누군가의 시선에선 구걸이나 민지의 시선에선 K보다 더욱 건강하게 성장 할 수 있는 활동가의 모습이었다.

승객들의 시선과는 아랑곳없이 민지의 독백과 상념은 이어진다.

‘K! 그 자식은 뭐하나? 지역에 저런 훌륭한 분을 두고…. 사무치게 그리운 동생을 이제 놓아 주어야겠다.’

장애운동을 한다는 것은 유전적으로 무척 훌륭한 DNA가 없다면 기실 불가능한 것이다. 자본주의는 항상 화려함을 강점으로 한다. 재벌을 비난하지만 재벌에 편입되고 싶은 욕망과 일치한다. 물론 loser(루저: 패배자, 손해 보는 사람)가 재벌로 편입되는 일은 통계학적으로 잡히지 않을 만큼 불가능하다. 자본의 입장에서 천박하거나 가난한 것은 화려한 조명아래 어두운 그늘이 된다. 물론 그것을 들여다보거나 살펴보려하는 용기를 가진 이는 드물다. 주위를 살펴 볼 만큼의 여유는 자본의 입장에서 허락되지 않는다. 하루하루 링거를 꽂은 채 연명치료를 하는 모양새로 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세월호 이후로 대한민국은 늘 울고 있다. 마치 타이게투스산(고대 스파르타인 들이 불구자 혹은 원치 않은 아이들을 버렸던 산의 이름)에 울려 퍼졌던 통곡처럼, 누군가는 타이게투스산에 울렸던 통곡을 대신해야 하지 않을까? 헛소리를 넘어서는 수준에서 통곡을 대신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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