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술 한잔 같이 하자던 동기가 나에게 물어본다. 왜 일본에서 공부하니? 이 연구를 하게 된 계기와 이유는? 오랜만에 들어보는 질문이다. 그런데 막막했다. 남들처럼 거창한 계기도 특별한 목적도 없기 때문이다. 언제부터 일까? 대학에 입학했을 때였을까? 내 인생과 장애인복지의 접점은 어디였을까?

1998년. 일본에서 활동보조라는 것을 처음 했다. 시설에서 30년을 사셨고, 자립생활한지 5년이 되어 간다던 내 이용자. 무 학력에 언어장애마저 있어 가끔 지적장애도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의문을 품은 적도 있었다. 그런 그분 밑에서 난 특별한 저항감 없이 그녀의 맞춤형 활동보조인이 되어 갔다. 필자를 리드하고, 할 말을 당당히 하는 이 대단한 힘은 도대체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늘 궁금할 뿐 이였다. 그리고 99년에 처음으로 그 힘의 원천이 자립생활 이념 이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필자의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졌다.

2000년 12월. 하와이에서 자립생활리더 대회가 있었다. 중증장애인의 자립생활 안에서 비장애인으로서의 역할로 고민할 즈음에, 필자는 130만원이라는 거액을 털어 그곳에 참가 했다. 그리고 미국의 누군가에게 질문을 했고 시시한 대답을 들었다. “장애인당사자 옆에서 늘 함께 하다 보면 고민이 풀릴 것이다” 었다. 너무 허무하고 실망스러운 대답이었다.

2001년. 필자가 99년부터 활동보조를 해온 다른 이용자 한 분의 피해의식 증상이 점점 심해졌다. 활동보조인들이 상처를 안고 그만 두기 시작했다. 그만두지도 거절하지도 않은 필자에게 의뢰가 집중되었다. 그녀의 환상과 환청을 같이 겪으면서 그녀와 있는 무서운 시간들이 연민의 시간으로 바뀌어 갔다. 한국으로 귀국하기 전까지 그녀의 활동보조를 즐겁게 했다. 내가 그녀를 이해 할 수 있었던 것은 오랜 시간을 그녀와 함께 했기 때문 이였다. 하와이에서의 들었던 대답은 정답이었다.

그 후 그녀의 증상은 더 심해졌고, 그녀에게 파견할 활동보조인은 더 이상 없었다. 자립생활센터에서는 회의를 했고 그녀와 면담을 했다. 그리고 다시 활동보조인 파견이 시작되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녀는 병원에 가는 것도 약을 먹는 것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지금도 그 지역에서 자립생활을 하고 있다. 자립생활센터는 장애인에게 그런 곳이다.

2001년과 2002년. 동료상담을 통역하면서 100여명의 당사자들과의 만났다. 생애 최고의 훈장이었다. 멋진 감동과 아픈 현실로 인해 눈물을 흘리면서 그 책임이 사회에 있음을 확인했다. 그리고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내면의 큰 힘을 찾아가는 과정을 눈으로 확인하면서 당사자들이야 말로 운동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확신을 가지게 해주었다. 그리고 동료상담은 비장애인인 필자에게 조차 자유를 주었다.

2002년 8월. 6년간의 유학생활을 접고 한국으로 들어왔다. 4년간의 일본 센터에서의 활동보조 경험, 한국과 일본의 자립생활교류의 통역, 그리고 무엇보다 동료상담 통역을 전담했던 내가 한국의 자립생활운동을 확산하는데 참여한다는 것은 참 부담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왜냐하면 당사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귀국을 앞두고 일본의 리더들과 한국에서의 역할에 대해서 상의를 했다. 정보제공과 함께 리더를 키워내는데 힘을 쏟으라고 조언 해주셨다. 훌륭한 한 사람의 리더를 키우는 것은 몇 백 명에게 정보를 제공하는 것 보다 큰 효과가 있는 일이라는 것 이였다. 신나게 일해야 하는 이유가 생겼다.

2003년. 최 중증 장애인 당사자를 발굴해야 한다는 사명감에 필자의 눈은 늘 빛났었다. 처음 대구에서 구족화가의 길을 잠시 접고 자동차에 미술도구와 함께 짐을 실고 서울로 와준 그와의 만남이 있었다. 그리고 일본 최고의 동료상담가와 비슷한 감성과 고집 가능성마저 지녔던 그녀와의 만남도 있었다. 그들이 성장과 좌절의 겪을 때 필자도 똑 같이 그만큼 기쁘고 아팠다. 그곳에서 무리를 해서라도 열심히 해야 하는 이유였다.

2004년. 건강을 잃었고 내 세상이 무너져 버렸다. 혼자서 바닥을 치고 또 쳐도 오를 수 없을 만큼 몸도 마음도 아팠다. 그 때 많은 장애인 당사자들이 손을 내밀어 줬다. 어찌 도와줄지 몰라 눈치만 보던 그들이 바닥을 치는 필자를 보며 어여 손을 잡으라고 따스하게 웃어 주었다. 비장애인, 서포터, 한걸음 뒤에 서서 바라보기라는 그럴싸한 포장으로 당사자들과 거리를 두었던 필자와는 달리, 당사자들은 필자를 그냥 항상 함께하는 동료이며 동지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평생 필자가 존경과 감사로 함께 가야 할 동지가 생긴 것 이다.

2008년. 너무 빠르게 당사자운동은 양적으로 크게 성장을 했으며, 사회가 그 운동에 부응(만족하진 않지만)도 해주었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질적인 성장을 위한 준비를 해야 할 때가 되었다. 그 질적인 성장의 무대에 장애인당사자가 중심에 서고 비장애인이 서포터로서 멋진 조화가 이루어지길 기대해 본다. 운동이라는 것이 당사자만의 것은 아니지만 당사자가 없으면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뒤돌아보면 매 순간이 이 일을 하게 된 계기였고 목적과 접점도 있었다. 비장애인으로서의 역할은 당사자 이념만큼이나 매력적이기도 했다. 이렇게 지나간 시간을 정리해보니 많은 추억들과 함께 과거의 시간에 같이 있어 주었던 많은 사람들이 그립다.

“제 지난 과거에 같이 있어 주셨던 여러분들 오갱끼데스까? (건강하신가요? )”

[제4회 에이블퀴즈]퀴즈를 풀면 선물과 지식이 팍팍!!

[리플합시다]장애인들은 이명박 대통령당선자에게 이것을 바란다

98년 일본의 자립생활센터에서 활동보조를 시작했고, 99년부터 한국과 일본사이에서 동료상담,연수,세미나 등의 통역을 통해 자립생활이념과 만났다. 02년 부터는 활동보조서비스코디네이터로 일을 하면서 우리나라의 장애인운동과도 만났다. 그렇게 10년을 죽을 만큼 열심히 자립생활과 연애하고 사랑을 했다. 그리고 나는 다시 일본에 있다. 다시 한번 일본의 정보를 한국에 알리고 싶어 이 공간을 택했다. 일본의 장애인들 이야기(장애학)와 생존학(장애,노인,난치병,에이즈,죽음,윤리)이야기를 이곳에서 풀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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