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회에서 장애인당사자가 그나마 대접을 받을 수 있는 날은 ‘장애인의 날’과 ‘선거’다. 장애인인식개선이니 뭐니 하며 느닷없이 휠체어를 타고 눈을 가리며, 흰 지팡이를 짚는다. 그 끝은 항상 장애인의 고통을 알게 되어 귀한 시간이었다니 머니를 앞 다투어 외치고 어디서 주워들은 외국의 장애인복지를 들먹이며 위로의 말을 전한다. 먹는 것 자체가 전쟁과 같은 중증장애인당사자에게 은혜와 같은 먹을거리와 함께 사진촬영을 뒤로 한 채 장애인의 날은 마감한다.

선거! 점자 공보물은 선거관리위원회와 각 후보 캠프가 책임을 서로 떠넘기고, 수어방송은 제한된 시간 안에서만 관리된다. 접근성은 일회용 경사로를 안전을 무시한 채 전시용으로 제작되기 일쑤 이며, 그것마저 그들의 용이한 관리를 위해 정해진 공간에서 적용된다.

가장 심각한 것은 거소 및 부재자투표로 내 몰리는 지적장애인분들이다. 그 분들이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최소한의 환경이 차단되어 있는 상황에서 누구도 선거 참여를 독려 하지 않는다. 투표보조인 제도가 있으나 부정투표 시비에 휘말려 선관위 관계자, 정당관계자 다툼을 뒤로 한 채 쓸쓸하기 만한 권리의 실현을 목도해야 한다.

이 또한 거소, 부재자 투표 홍보에 투표활동보조인제도를 선전하는 것을 병행 했을 때 홍보효과가 클 것임에도 분리되어 시행된다. 결국 투표활동보조인제도는 선전용임을 선관위 스스로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내심 거소투표나 부재자투표를 해 주기를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사표가 되는 것도 문제이지만 누군가의 불순한 개입에 의해 권리가 오염되는 것이 더욱 문제이다.

김영삼 전 대통령까지 장애인당사자가 그나마 선거 국면에 등장 할 수 있었던 계기는 불쌍함과 불행을 다독거렸던 인자한 정치인을 포장하기 위한 수단을 목적으로 했다. 시찰과 포옹, 사진촬영, 인자함과 덕으로 포장한 정치인과 장애인당사자의 안위를 걱정해주심에 감사함을 정성스럽게 국민들에게 전한다. 시대의 양심을 온몸으로 전하기에 앞장서는 천박한 저널리즘에 안위를 위해서도 말이다.

망언의 기록

대부분 퍼스트레이디를 꿈꾸던 이들에게 한시적으로 이루어져 왔던 시찰과 사진촬영이 대선후보가 직접 챙기기 시작했던 것이 성과라면 성과이겠다. 부정하고 있는 이유는 모르겠으나 김대중 전 대통령은 아직도 장애인등록을 거부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당시 민주자유당(이하 민자당) 후보와 맞서고 있던 상황에서 민자당 중앙연수원 김득린 원장은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독설을 퍼 붇는다. 절뚝 다리가 어찌 대통령이 되겠다고 나서는가? 이 사실이 장애인청년들에게 알려지면서 민자당의 공개사과를 요구하며 마포대교 점거, 민자당 점거를 시도했었다. 코미디 같은 과거는 김대중 후보의 배후 조작설 까지 유포되며, 반 민자당 전선의 선봉으로 오인되는 영광까지 얻었으나 그 끝은 실로 참담했다.

마포대교 점거를 정점으로 일부는 마포 서에 일부는 영등포서에 끌려갔고 물론 당시 유행했던 닭장차에서 은밀하게 이루어지는 백골단의 폭행도 함께 말이다. 병신이라고 야유하는 것에 대한 장애인당사자의 저항은 우리의 정치적 의도와는 무관하게 교통마비, 배후 조작, 국가권력의 살인적인 폭행으로 그 끝을 마감했다.

갈비뼈의 통증을 부둥켜안고 한 표를 행사했던 그 해 대선은 참으로 지랄 같았다. 정치적 입장과는 상관없이 2002 대선은 전혀 색다른 양상이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결과도 그러하거니와 새로울 것 같았던 정당정치의 시험무대로서의 의미도 포함되었고 정치적 입장과는 상관없이 사상과 신념의 절차적 정당성이 그나마 보장되리라는 회색빛 전망도 조심스럽게 논의되기도 한 것 같다.

각설하고, 노무현 대통령의 선전에는 많은 변수와 함수 사이에서 장애인당사자의 등장은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니 있었으나 주류의 역동적인 양상에서 장애인당사자진영에서 발견하지 못했던 것이라는 표현이 맞겠다.

기타를 치며 눈물을 흘리는 C.F의 끝은 바보 노무현 이었다. 민자당 중앙연수원장의 절뚝 다리라는 표현을 듣는 순간 피가 거꾸로 역류하는 것 같은 경험을 가진 장애인당사자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지금이야 비하발언의 주류가 ‘장애자’, ‘바보’쯤이지만 97년 당시에는 단연 절뚝 다리가 압권이었다. 유형과 상관없이 그 표현은 장애인당사자를 통칭하는 비하발언이었다. 그렇다면 바보 노무현이라는 표현은 용인 할 수 있는 적절한 것이었을까?

일정의 기대치와 2002까지 헌신과 상처로 시대를 지켜냈던, 시대의 양심을 상징코자 했었던 노무현 캠프의 홍보 전략으로서 바보 노무현이라는 표현은 장애인당사자의 입장에서 과연 용인할 만한 것이었을까?

어설픈 재단이고 섣부른 예단이라고 하더라도 지적장애인분들이 그 표현의 의미와 진정성을 평가한다면 절뚝 다리와 무엇이 다르며, 상처와 표현이 주는 폭력성의 책임은 어디로 간 것인가? 적어도 장애인당사자의 입장에서는 그들의 정치적 입장과는 무관하게 폭력적인 것이다.

정동영! 2007정국은 아니더라도 그 역시 시찰과 사진촬영의 뼈아픈 경험을 공유하고 있다.장애인계에서 목욕봉사로 표현되는 사건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다만 그 결과가 공식적인 사과 여부와 상관없이 장애인정책의 진일보한 반영과 투영까지 도달했다는 평가는 없다.

내심 장애인계를 조심해야 한다는 모든 정당 관계자의 거미본능(거미는 새로운 환경에 직면하거나 익숙한 적대적 관계에서도 공격보다는 촉각을 통한 충분한 정보를 획득하는데 꽤 긴 시간을 투자한다) 정도가 성과라면 성과라고 할 수 있겠다. 이는 정치적 역학관계에서 상대방을 충분히 간파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는 대상에 대해 그들이 원하는 행동양식을 잘 알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17대 국회에서 다뤄왔던 장애인계의 주요한 현안과 정책들을 학습하지 않고 대선에 임하고 있는 것이다.

저항을 피하고 장애인당사자가 원하는 정책의 본질을 학습하고 외화 시키기보다 대중의 소박한 정서에 부응하는 약자의 돌봄 수준에서 행동양식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이명박! 장애인계의 저항을 불러왔던 그의 발언의 요지는 익히 알고 있다. 허나 발언의 시비를 떠나 모자보건법 상에 장애인의 학살을 정당하게 다루고 있는 것이 오히려 문제의 본질이다.

[14조(인공임신중절수술의 허용한계) ①의사는 다음 각호의 1에 해당되는 경우에 한하여 본인과 배우자(사실상의 혼인관계에 있는 자를 포함한다. 이하 같다)의 동의를 얻어 인공임신중절수술을 할 수 있다.1. 본인 또는 배우자가 대통령령이 정하는 우생학적 또는 유전학적 정신장애나 신체질환이 있는 경우]

표현의 수위의 문제만 남았을 뿐 대선에서, 장애인의 날에, 공간의 일상에서, 우리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학살의 위기에 봉착하고 있는 것이다. 어려운 법률용어가 문제이기는 하나 장애인당사자의 삶의 여정에서 학살의 기억은 곳곳에서 발견된다. 시설에서, 지역에서, 혹은 태어나기도 전에, 그 빌어먹을 치료의 과정에서 실패로 결과 지어졌을 경우, 폐기와 자살의 뒤안길에서 장애인당사자는 타살을 경험한다.

혹 살아남더라도 스크린 도어가 설치되어 있지 않은 지하철에서 시각장애인이 낭떠러지 같은 육교만 덩그러니 위치한 도로에서 휠체어장애인이, 타살의 흔적은 없으나 방치와 학대에 좌절한 지적장애인이, 생활고를 못 이겨 타살 같은 자살을 감행하는 장애인당사자와 한국사회는 마주 하고 있다.

면암 최익현을 그리며!

2006년! 2007 대선의 양상을 점쳐 왔었던 대부분의 예상은 경제선거였다. 청춘의 시절! 자유를 빼앗겼던 청춘은 분명히 길거리에 있었다. 자유를 얼마나 되찾았는지는 모르겠으나 빈주머니가 허접해 일상으로, 변절이니 뭐니 욕을 먹으면서 권력을 향해, 각자 나름의 공간에서 노동을 구현하고자 했다. 결과는 소수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경우 참담한 패배였다.

목적의식적 사고의 체계를 가질 수 있었던 일단의 세대는 결과에 대한 분석과 함께 그나마 대선을 임할 수 있겠으나 당장의 생존을 걱정해야 하는 대다수는 거짓이든 진실이든 안정적으로 배불리 먹는 것이 유일하고 강력한 화두가 되는 것은 자명한 것이다.

이 코드는 상당히 강력해서 모든 것을 우선 한다. 경제가 살아야 복지가 있으며, 흉내수준에서 성장한 일단의 사회보장제도도 대선 이후 지속성을 의심받는다.

그렇다면 장애인계는 어떠한가?

『장애인계에서는 그 어느 때보다 활발히 유권자 운동을 했다. 대선 장애인공약을 위해 정책 제안서를 각 후보들에게 보내고 답변을 요구하는 등 적극적인 공세를 폈다.하지만 그 어느 후보도 장애인계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장애인계에서는 200만 유권자라며 복지대통령을 뽑겠다고 선언했지만 콧방귀도 끼지 않았다. 왜 장애인 표를 잡으려 하지 않는 것일까?그것은 200만 장애인 유권자가 하나의 목소리를 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장애인공약에 대한 협상 없이 무조건 지지선언을 했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복지대통령은 나오지 않는다는 실망감에 며칠 앞으로 다가온 선거 날이 원망스럽다. 장애인계에서 그렇게 공들여 만든 정책요구안을 헌 짚신짝처럼 던져버린 후보들인데 누구에게 표를 던질 수 있단 말인가.tv토론회에 나와 장애인에 대해 말 한마디로 안한 장애인에 대해 무심한 후보들인데 누구를 선택하란 말인가. 참으로 참담한 기분이다. 장애인계는 어떠한가? 장애인공약에 대한 협상 없이 무조건 지지선언을 했기 때문이다. -방귀희-』

장애인계를 표로 인식하는 것은 정치인들의 본질이다. 다만 문제는 이권과 인권의 구분 없이 합종연횡을 시도하는 이들이다. 전체의 이익보다는 개인과 개별조직의 이권에 관심을 두고 줄 서기를 시도하는 것이다. 지지의 이유나 근거를 보다 광범위하게 선전하거나 후보의 장애인정책 관련 함량의 미달을 관측하고 조정하고자 하는 정책적 딜(조정-deal)은 관심 밖이다. 이것이 우리의 딜레마이다. 아니 도그마(dogma-몰락)이다.

선거가 축제처럼 신나고 희망과 비전을 제시하는 일정의 집단적 정치행위로서의 본질적 의미는 그들에게 의도되지 않았던 것임을 의미한다.

원하던 원하지 않던 진보와 보수의 양립구도에서 깔끔하게 선택의 정점을 찾기 힘든 문제도 넘어서기 힘든 과제이다. 정치행위라는 본질적인 의미가 퇴색된 상황에서 장애인정책의 대안과 그 함량의 충족성을 시험무대에 올리고 장애인유권자에게 검증받는 선순환 구조의 부재는 주류정치의 비판과 비난의 칼날을 세우기보다 자기모순에 빠져 있는 장애인계의 일차적 모순과 함께 참담하다.

방귀희 선생의 진단이 더욱 절절한 이유이다. 약자의 돌봄 수준에서 다뤄지고 있는 각 후보의 장애인정책에 대한 비판, 외화의 본질, 조정 등의 덕목이 뒤로 물러서게 되는 순간인 것이다. 적장이 훌륭하게 인정받고 그로 인한 자극이 더욱 건강한 정치행위를 만드는 아름다운 모습을 발견하고 싶다.

면암 최익현은 분명히 보수였다. 어찌 보면 보수 중에서도 앞뒤가 꽉 막힌 진정한(?) 보수였다. 허나 면암 최익현의 보수는 기회주의자나 이권을 중심으로 한 합종연횡의 보수는 아니었다. 단발령에 반대하고 봉건적 질서를 유지, 강화하고자 했던, 과거로의 회귀를 꿈꿨던, 그것이 이데아인 줄 알았던 무지의 희생자로 평가 할 수도 있겠다.

허나 그가 아름다워 보인 것은 그의 최후와 그것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이었다. 의병을 일으켜 군국주의에 목숨을 걸고 대항했던 것도 그렇거니와 적들의 진영, 심장부에서 음식을 거부하고 스스로 죽음을 맞이한 그의 최후도 그렇다. 관점과 상관없이 민초에 대한 애정과 헌신, 죽음을 각오한 결의와 최후는 일백년이 지난 지금에도 의미하는 바가 크다 하겠다.

정치생명을 걸고 타살을 강요하는 한국사회의 장애인에 대한 폭력에 맞서 싸우는 것! 시혜와 동정을 근간으로 한 돌봄 수준의 장애인정책에 대해 반대하는 것! 장애인에 대한 투자가 초 고령화 사회로 가는 한국사회의 인권에 가늠자가 되는 것을 주장하는 것! 천박한 경제논리를 넘어 경제적 발전의 목적이 사회적 소수자를 기준으로 한 건강한 분배에 있음을 주장하는 것!

주류사회의 정당구조를 넘어 폭 넒은 장애인정책의 교류와 통 큰 단결의 가늠자로서의 정치행위를 도모하는 것! 장애인지적, 장애 강점적 정당조직문화를 결성 하는 것! 장애인복지전달체계의 의사결정구조가 애초에 장애인당사자의 권한이었음을 각인하고 그것을 확대, 강화 하는 것! 복지, 권리, 시장의 선순환 구조의 대안을 마련하는 것!

보수든 진보든 알아서 장애를 기준으로 한국사회를 재편하기는 만무하다. 의도와는 달리 장애인정책의 함량은 장애인당사자를 통해 이루어 질 듯 하다. 의도한다 해도 단 한 시간도 장애인당사자로 살아본 일 없는 이가 결정 하는 것은 어차피 장애인당사자에게 조정권한을 넘길 수밖에 없다.

무식하기는 하나 사회과학으로서 여성학의 뒤안길에는 여성주의가 있었다. 어차피 행정이 정치에 의해 움직인다면 소비자로서의 권한과 장애를 둘러싼 정치행위의 주체로서 장애인당사자의 정치적 진출은 매우 중요하다. 다만 반성해야 할 것은 행동양식은 있었으나 과연 지혜와 이념, 철학은 있었는가에 대한 의문이다.

지도자가 필요하다. 권력을 향한 행동양식은 지난시기에 비해 비약적으로 발전했으나 집단적 역량을 도모하는 주의와 사상은 있었는가에 대한 반성이기도 하다. 표적과 좌표의 부재는 아무리 훌륭하게 선도한다 해도 결과는 난파선이 될 수밖에 없다. 헌신을 근간으로 한 집단적 정치행위로써 보수의 최후를 맞이했던 면암 최익현이 그리운 이유이기도 하다.

양금택목(良禽擇木)

현명한 새는 좋은 나무를 가려서 둥지를 치고 지혜로운 신하는 군주를 가려 섬긴다.

좋은 나무가 없다면 새는 가시나무를 찾아 그 생을 마감하고자 할 테고 훌륭한 주군을 찾을 수 없다면 지혜로운 신하는 그 재능을 다 하지 못하고 초야에 묻히고자 할 것이다. 보수든 진보든 07 대선을 지나 진정 장애인당사자가 특히 중증장애인당사자, 탈 시설당사자가 무엇을 원하고 있는 지 눈여겨보아 주기를 바란다. 나아가 면암 최익현의 의기와 좋은 나무, 훌륭한 주군으로서 장애인당사자와 함께 하는 집단적 정치행위의 모범 또한 애타게 기다린다.

장애해방 염원 21년 12월 19일 대선 결과와 함께 장애인당사자의 역할을 기대하며!

■면암 최익현=조선 후기의 지사. 1868년 경복궁 중건과 당백전 발행에 따르는 재정의 파탄 등을 들어 흥선대원군의 실정(失政)을 상소하여 관직을 박탈당했다. 이후 일본과의 통상조약과 단발령에 격렬하게 반대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항일의병운동의 전개를 촉구하며 전북 태인 에서 의병을 모았다. 그러나 순창에서 패하여 쓰시마 섬에 유배되었다. 적들이 주는 음식이라 하여 거부하고 단식사를 감행하였다.

장애운동을 한다는 것은 유전적으로 무척 훌륭한 DNA가 없다면 기실 불가능한 것이다. 자본주의는 항상 화려함을 강점으로 한다. 재벌을 비난하지만 재벌에 편입되고 싶은 욕망과 일치한다. 물론 loser(루저: 패배자, 손해 보는 사람)가 재벌로 편입되는 일은 통계학적으로 잡히지 않을 만큼 불가능하다. 자본의 입장에서 천박하거나 가난한 것은 화려한 조명아래 어두운 그늘이 된다. 물론 그것을 들여다보거나 살펴보려하는 용기를 가진 이는 드물다. 주위를 살펴 볼 만큼의 여유는 자본의 입장에서 허락되지 않는다. 하루하루 링거를 꽂은 채 연명치료를 하는 모양새로 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세월호 이후로 대한민국은 늘 울고 있다. 마치 타이게투스산(고대 스파르타인 들이 불구자 혹은 원치 않은 아이들을 버렸던 산의 이름)에 울려 퍼졌던 통곡처럼, 누군가는 타이게투스산에 울렸던 통곡을 대신해야 하지 않을까? 헛소리를 넘어서는 수준에서 통곡을 대신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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