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3월 25일쯤 서울 등 대도시의 육교와 지하철 역 등에 일제히 나붙은 ‘선영아 사랑해’라는 여섯 글자의 현수막 광고는 4·13 총선 선거용 혹은 선영이라는 여성을 쫓아다니는 스토커의 소행 등으로 오인돼 한바탕 소동을 일으켰다.

이때 선관위는 이 현수막이 특정 후보를 홍보 또는 음해하려는 것이 아닌지 촉각을 곤두세웠고 대학가 등에서는 선영이라는 이름을 가진 여성들에게 전화와 e-mail이 쏟아지기도 했다는 것.

K는 그 현수막을 보는 순간 가슴 찡한 전율을 느꼈다. 80년 어느 세월. 학부에서 더 이상 안위를 찾기에는 시대가 간곡하여 삶의 방향을 전환하려던 일단의 무리들은 공활(공장 활동 - 위장취업 전 사전 현장 활동: 국가안전기획부 좌경용공용어 해설집 1988)을 꾀한다.

선영은 가난한 노점상의 딸이었다. 어머니는 소양강댐을 놀러오는 관광객을 상대로 장사를 하기 위해 매일 큰 대야 가득 도토리묵을 얹고 누군가는 즐거운 마음으로 산행을 했을 그 길고 고통스러운 길을 무거운 짐과 함께 오르곤 했었다. 높이 올라갈수록 값은 올라가니 당연히 내려오는 길은 멀었다.

어두워진 산길을 빈대야와 함께 내려오는 것은 그나마 다행이었고 묵을 다 팔지 못한 날은 대야를 또 다시 머리에 올려야 하니 어두운 산길에 긁히고 넘어지는 날에는 묵은 산길에서 뒹굴어야 했다. 고통스러운 삶에 회한에서 오는 눈물도 함께 말이다. 다만 그 길이 고통스럽지 않았던 것은 딸의 행복한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희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선영은 서양학과 재학 중이었다. 유화를 그리려면 백색 유화 물감을 많이 쓰게 되는데 당시 학교식당 밥값이 600원 이었고 화이트(백색 유화물감) 하나에 5000원 가량 했으니 쉽지 않은 학업이었다. 그림을 그리기 위해 밥을 굶고 그 돈을 모아 밤새 붓 끝을 놓지 않았던 이유는 어머니였다.

서글픈 밥 배를 채우는 일은 친구 밥 먹을 때 하나를 시켜 학교식당 아줌마의 구원으로 곱빼기를 더하거나 당시 유행했었던 동아리 출범, 학생회 출범식에 뒤풀이용으로 내놓았던 막걸리와 두부김치를 챙겨 먹는 일이었다.

또한 학생회실 곳곳에서 벌어지던 뒤풀이자리에 끼어들어 특유의 넉살을 담아 안주를 쓸어 담는 일이다. 항상 주린 배였다. 또한 그것은 청춘 시절뿐만이 아니라 선영의 인생에서 자주 벌어지는 일이었다.

어머니는 노점을 하기 위해 집을 비우는 일이 다반사였고 어린 나이에 혼자 밥을 챙겨먹는 것은 흔한 일이 되어버렸다. 어머니가 밥을 해 놓은 날은 그나마 다행이었다. 챙겨 놓지 않은 날은 하루 종일 빈방에서 주린 배를 움켜잡고 어머니를 기다리는 일이 반복 되었다. 어머니가 돌아와서 자리한 방안은 쏟아진 묵과 함께 흘린 눈물, 주린 배를 움켜잡고 흘린 눈물이 서럽게 만나는 공간이었다.

그래서 그런 것인지 선영의 그림에서는 유독 가난한 자의 일상이 많았다. 서양화가 민족적이지도 않은데다가 비싼 유화물감을 소용케 하니 잘 맞지 않는 옷과 같았으나 선영의 그림에서는 뭔지 모를 애틋함과 회한이 묻어나곤 했었다.

어렸을 적부터 산전수전 다 겪은 선영은 눈치가 빨랐다. 학부 시절 인생 조지는 것으로는 비할게 없었던 운동권의 길은 애써 피해 갔었다. 밥 배를 채우기 위해 다가섰던 학생회 뒤풀이 자리에서 주워들은 이야기들을 애써 외면하고 그림만 그렸다.

학생회 일꾼이었던 K는 선영의 어려운 사정을 전해 듣고 아르바이트로 학생회 현수막 제작을 맡겼다. 한 푼이 아쉬운 선영은 날름 동의했다. 일을 시작하는 순간부터 교내 현수막 제작 및 부착에 있어 그녀의 신기 묘묘한 내공은 학내뿐만이 아니라 그 지역 학생회 일꾼들 사이에서도 소문이 자자했다.

내막은 이렇다. 소파와 소파 사이에 수십 개의 현수막을 걸고 일필백계로 한 획에 문구를 쓴다(아는 사람은 알지만 하수들은 일단 연필로 밑그림을 그리고 페인트로 덮는 수순을 밟는다). 하루 밤 사이에 70개를 썼다는 일화는 전설로 남아있다.

다음은 부착인데 나무와 나무 사이, 벽과 벽 사이, 심지어 건물과 건물 사이에도 그녀는 단 한 번의 실수도 없이 원숭이가 무릎을 꿇을 정도의 내공을 보였다. 그녀의 영역은 날로 확대되어 당시 주요한 소통과 주장의 도구였던 대자보 제작 및 부착, 홍보 포스터 제작, 단체복 실크 인쇄, 걸개그림까지 확대되어 독보적인 그녀의 전성기를 구가 하게 된다.

마치 검투사 마냥 손목에는 청 테이프가 서너 개 감겨있고 어디서 구했는지 죽도를 넣는 검복을 구하여 당일 붙일 대자보가 고스란히 담겨 있곤 했다. 등산 배낭에는 현수막이 고이 접혀 있었고 그녀의 담치기(신기 묘묘한 부착행위)는 퍼포먼스 수준까지 도달하여 구경꾼이 모일 정도였다.

밥 배를 채우기 위해 기웃거렸던 뒤풀이 자리에는 시대의 아픔과 분노, 실천 등이 흔한 안주거리였고 선배들이 휩쓸고 간 술자리에는 항상 책 몇 권이 놓여 있었다. 소설류의 금서이었는데 말은 많으나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이 없어 답답했던 그녀는 자연스럽게 책과 접하게 되고 궁금증이 더한 그녀는 선배들과 질문과 토론 등이 이어진다.

외면하고자 했으나 그녀의 어머니가 살아왔던 동시대의 많은 사람들의 고단한 삶의 이유들이 속속들이 실타래를 풀게 되고 공감과 실천의 부재에 대해 일정의 죄책감을 가지게 되는 자신을 그녀는 발견한다.

등록금 싸움 활동이 일부 좌경학생들의 소요가 아닌 가난한 이들이 빈곤을 세습하게 되는 구조를 바꾸고자 하는 것임을 알게 된다. 고민과 갈등을 낳게 되고 결국 운명 같은 길을 선영은 맞이한다. 다만 그토록 눈에 밟히는 것은 어머니였다. 재적, 구속, 낙인 등으로 이어지는 고난의 길을 가는 것쯤은 이미 고단한 삶에 여정에서 충분히 단련된 그녀에게는 별일 아닌 것으로 치부 할 수 있었으나 어머니가 나누어야 할 마음고생까지 감당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선배! 나는 졸업해서 디자인회사에 취직하고 어머니에게 산길을 오르내리는 일을 그만 하게 하고 싶어요”

됫병 소주를 찾아 들고 단절을 선언하겠다던 그녀의 결심은 며칠을 굶어가며 싸움을 주도하던 선배의 자취방에서 무너지고 만다. 몇 날을 굶었을 그가 먹고 있던 것은 말라비틀어진 밥과 간장 한 종지였다. 용돈이라고 내려오면 가난한 후배들 밥 사 먹이고 심지어 용돈까지 챙겨주던 그는 말라비틀어진 밥을 간장과 함께 비벼 먹고 있었던 것이다.

“선영이 왔냐!”

반가이 맞으며 기어이 나가 외상을 얻어 밥상을 챙기려 했던 선배에게 그날 할 수 있었던 것은 말도 되지 않은 술주정 뿐 이었다.

“선영아! 나도 졸업해서 검사 되는 것이 꿈이었다. 근데 그게 참 나쁜 짓이더라!”하며 씩 웃는 선배에게 선영은 태나지 않게 속울음을 울 수밖에 없었다.

더욱 사랑하는 것이 하나 더 늘었을 뿐 어머니에게 죄를 짓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이 땅의 가난한 어머니들의 고통을 외면하는 것이 더욱 큰 죄를 짓는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과 함께 선영은 단절을 접는다.

공활은 계획되고 과정을 밟게 된다. 운이 없었다. 마침 그 곳은 파업에 휘말리게 되고 사측에서 고용한 깡패들에게 공활조직은 백색테러를 당하게 된다. 선영은 퇴근 후 새벽, 자취방 길목에서 전치 8주의 린치를 당한다.

눈물 섞인 밥을 먹어 본 사람은 안다. 단 몇 분간이라도 짐승 같은 린치를 당해 본 사람은 안다. 그것이 얼마나 사람을 절망케 하며 공포에 휩싸이게 하는 지를….

마땅히 치료 받을 돈과 쉴 곳을 찾지 못한 선영은 학교 기숙사에서 몇 달을 보낸다. 린치와 함께 찾아 온 공포 덕에 말도 제대로 못 할 정도로 정신적인 충격과 함께 기약 없는 요양의 시간을 보내던 선영에게 말 못할 큰 죄책감을 가진 이는 K였다. 표 나게 말 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닌데다 수습을 책임져야 했던 K에게는 일상과 활동, 끝도 모를 자책과 함께 하는 술자리가 이어졌다. 동료들 역시 무슨 일이 있어 저리 힘들어하나 걱정만 했을 뿐 딱히 말 한자리 보태지 못하는 답답한 시간의 연속이었다.

여름, 가을이 지나 겨울까지 이어지는 아픈 시간이었다. 밤새도록 이어지는 술자리 끝에 눈은 내리고 K는 그 날도 이성을 놓을 정도로 만취 해 있었다. 패인 수준까지 가려는 K를 동료들은 어떻게든 붙잡으려 했으나 맑은 영혼의 후배 한사람을 망가뜨렸다고 내내 자책하는 K를 동료들 역시 어찌 할 수 없었다.

눈과 함께 만취해 있었던 K가 갑자기 소리소리 지르기 시작하더니 "선영아 미안해!"하며 대성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내막을 알지 못했던 동료들은 K의 그간 고통이 연예사의 뒷골목 이었구나 짐작하며, '한심한 새끼 얘기하지', '짜식 어떻게 해주랴', '꼴값 떤다' 등등의….

술자리는 이어졌고 눈발은 더욱 거세졌다. K는 느닷없이 술집을 나와 뛰기 시작했다. 무척 추웠던 날이라 혹시 걱정되어 술자리를 파하고 같이 뛰기 시작한 동료들이 도착한 것은 선영이 기거했던 기숙사 앞마당이었다.

K는 그 넓은 마당에 눈을 헤집고 무언가 쓰려 했다. 눈발은 계속 내리니 글이 써질 리가 만무한데 K는 고집스럽게 계속 무언가를 쓰려 했다. 동료들은 ‘야 c - 8, 오늘 K이 자식이 무슨 삽질을 하려는지 모르나 밤새더라도 같이 하자', '아나 이 개자식, 지랄을 해요 지랄을' 등등….

마땅한 연장 하나 없이 밤새 그 생쇼를 하자니 머리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올 정도였다. 체력이 바닥이 날정도 이었음에도 고집스럽게 K는 마치 무슨 종교행위 같은 행동을 이어갔다.

새벽과 신 새벽은 같은 말이기도 하나 다른 말이기도 하다. 새벽은 매일 오는 일상이며 신 새벽은 사무치게 그리워해야만 온다. 신 새벽이 돼서야 눈은 그치고 K가 쓰고자 하는 것이 완성됐다.

'선영아 사랑해!'

K에게는 대가를 치를 만한 종교행위 내지는 연예행각이었을지 모르지만 동료들 입장에서는 참으로 죽을 맛이었다. 어디 쳐 박혀 동사 할지도 모르겠다 싶어 동참 한 것이지만 밤새 그 생쇼를 하자니 무슨 날벼락인가 싶었다.

아침이 오고 기숙사 앞마당을 내려다 본 선영은 짠 한 마음과 격한 감정이 동시에 오는 것을 주체 하지 못했다. 그 앞마당에 새겨진 자신의 이름도 그렇거니와 질질 짜며 통곡을 하는 K도 그러했다. 수많은 창문이 열리고 한국사회 연예사의 한 획을 긋는 일이니 뭐니 하며 주접을 떠는 이들을 뒤로 한 채 선영은 창문을 닫는다.

2005년 3월 25일. 선영아 사랑해 현수막을 쳐다보는 K의 눈가에는 습기가 또 다시 머물고 있음과 회한의 단상이 다시금 자신에게 머물고 있음을 발견한다.

에필로그 [epilogue 혹은 뒷 담화문]

공지영의 고등어는 삼류신파일까 아니면 철저하지 못했던 사람들을 재단하기 위함일까 누군가는 전자이고 누군가는 후자 일 것이다. 또 누군가는 인간을 존엄케 하고자 했던 예의와 같은 회한이었을 것이다.

지금 힘들어 할 누구의 후배를 위해 이 글을 쓴다. 물론 남의 이야기이니 상상은 예찬하기로 한다.

K와 선영은 잘 산다. 사실 같은 거짓이고 거짓 같은 사실이니 진위여부의 확인은 사절이다. 앞서 밝혔듯이 주워들은 얘기일 뿐이다.

웬 연초부터 신파냐 하는 분도 계실 것이고 도대체 장애인문제하고 무슨 상관이냐 하는 분도 계실 것이다. 나아가서 운동을 희화 시키는 것이 아니냐는 분도 있겠고 현장에서 박 터지게 싸우기도 바쁜데 무슨 놈의 학출 러브 스토리 따위를 이 어려운 지면에 싣는가 하는 분도 계시겠다.

사람들은 이유와 상관없이 울고 싶을 때가 있다. 너무 힘들어서. 우는 것은 대단히 나약한 것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인 유교문화권에서는 더구나 그러하다. 그럴 때는 제발 울게 내버려 두기를 바란다. 섣부른 재단으로 넘겨짚지도 말 것이며, 현학적인 언사로 분석하려 들지도 말기를 바란다.

오히려 눈물을 잃어버린 것이 더욱 문제다. 지금도 어렵고 힘겨운 행보를 하고 있는 분들에게 더구나 장애운동을 하고 계신 분들에게 삼류신파와 같은 짠한 마음과 함께 그동안 속상한 것 털어 버리고 실컷 울거나 실컷 웃기를 바란다. 좌경용공 어쩌구 이런 거 빼고 말이다.

세상은 달라진 듯 하나 적어도 중증장애인당사자에게는 지혜와 용기가 필요한 또 다른 한해의 시작임을 각인하며 말이다.

[리플합시다]장애인들은 이명박 대통령당선자에게 이것을 바란다

장애운동을 한다는 것은 유전적으로 무척 훌륭한 DNA가 없다면 기실 불가능한 것이다. 자본주의는 항상 화려함을 강점으로 한다. 재벌을 비난하지만 재벌에 편입되고 싶은 욕망과 일치한다. 물론 loser(루저: 패배자, 손해 보는 사람)가 재벌로 편입되는 일은 통계학적으로 잡히지 않을 만큼 불가능하다. 자본의 입장에서 천박하거나 가난한 것은 화려한 조명아래 어두운 그늘이 된다. 물론 그것을 들여다보거나 살펴보려하는 용기를 가진 이는 드물다. 주위를 살펴 볼 만큼의 여유는 자본의 입장에서 허락되지 않는다. 하루하루 링거를 꽂은 채 연명치료를 하는 모양새로 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세월호 이후로 대한민국은 늘 울고 있다. 마치 타이게투스산(고대 스파르타인 들이 불구자 혹은 원치 않은 아이들을 버렸던 산의 이름)에 울려 퍼졌던 통곡처럼, 누군가는 타이게투스산에 울렸던 통곡을 대신해야 하지 않을까? 헛소리를 넘어서는 수준에서 통곡을 대신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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