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사진 ⓒ배은주

예식장에서 결혼식을 하기에 장애인들에게는 적합하지 않은 점이 많다. 작은 엘리베이터를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때로는 밥도 못 먹고 돌아오곤 했던 나의 친구들 결혼식을 떠올리며 나는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오는 사람들을 위한 결혼식을 준비하기로 했다.

그러한 이유로 예식장이 아닌 모든 편의 시설이 갖추어져 있는 장애인 복지관 강당에서 결혼식을 치렀고, 피로연은 복지관 강당 잔디밭에 마련하였다. 이동에 불편함 없이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편안하게 예식을 보고 편안하게 식사를 할 수 있었다. 물론 지금도 결혼식 비디오를 볼 때마다 화려한 샹제리에가 있는 예식장에서 할 걸 그랬나 하는 아쉬움은 남는다.

또 하나에 문제점은 웨딩드레스였다. 비장애인들이 입는, 길고 커다란 웨딩드레스를 대여에 입어보니 치맛자락이 너무 길었다. 모든 여자들에 공통된 소망은 결혼식 날만큼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싶은 소망이 있기 마련이다. 나 역시 결혼식 날만큼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싶었다. 그래서 생각해낸 묘안이 휠체어위로 웨딩드레스를 입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하면 그 긴 웨딩드레스 치맛자락을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다행히 웨딩드레스 속에는 쇠로 된 든든한 패치코트가 있다는 점은 활용했다. (두꺼운 방석 두 개를 놓고 그 위에 앉은 채로 웨딩드레스를 입으면 신기하게도 사진에서 처럼 웨딩드레스 속으로 휠체어가 쏘옥 들어가게 된다.)

물론 사회자가 각본에도 없는 인사를 여러 번 시켜서 대략난감 했고 퇴장할 때 드레스 자락이 휠체어 바퀴에 걸려 다시 한 번 애를 먹기는 했지만, 13년이 지난 지금 생각해도 그 아이디어는 좋았다고 생각된다.

내가 결혼을 하면서 느낀 점은 장애인들 결혼만 전문으로 하는 웨딩업체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것이었다. 예식장에서부터 결혼식 그리고 신혼여행까지 실정과 상황에 맞게 대행해주는 업체가 있었다면 그때 힘들게 결혼 준비를 하지 않아도 되지 않았을까 생각이 든다.

올해로 결혼 13년째로 접어들었다. 밝은 날도 흐린 날도 있었다. 행복 할 때도 있었고 불행할 때도 있었다. 기쁠 때도 있었고, 슬플 때도 있었다. 하지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내게 키워낼 수 있는 아이들과 섬길 수 있는 남편이 있다는 사실이 눈물이 날 만큼 감사하다는 것이다.

결혼. 쉬운 길은 아니다. 생전 겪어보지 못했고, 피한방울 섞이지 않은 남과 평생 함께 산다는 일이 어찌 쉬운 일이겠는가?

10년쯤 지나니까 이제야서야 조금 남편을 알 것도 같다. 아니 이제는 알려고도 알 필요도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사람이 사람을 안다는 것은 불가능 하다는 걸 이제야 나는 알게 되었다. 사람이 사람을 안다는 것은 그저 조금 그 삶을 이해하고 있다는 뜻일것이다.

결혼해서 50년씩 해로 한 후에 금혼식을 하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을 보면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보다 더 존경하게 된다. 아니 실제로 그분들은 결혼에 관해서 만큼은 박사들인 것이다. 생각해보라 그 많은 세월동안 한사람을 사랑하기 위해 그분들이 했을 노력과 인내와 의지를….

사랑은 한순간에 빠져들 수 있다. 그러나 그 사랑을 지키기 위해서는 엄청난 노력과 인내와 의지가 필요한 것이다. 모든 사랑은 자연스럽게 찾아오고 유지 되지만 결혼을 한 후에 남녀 간에 사랑만큼은 노력과 인내와 의지가 없으면 안 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결혼 후에 사랑은 이어가는 것이 아니라 지켜가고 만들어 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장애인들에게 있어서 결혼은 더 많은 노력과 인내와 의지가 필요하다. 자신의 장애를 모두 이해하고 포용할 것 같아서 결혼을 했지만 그것이 착각 이였음을 깨닫게 되는 날이 올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결코 서운해 해서는 안 된다. 잘 생각해보라 내 부모도 내 형제도 내 장애를 깊게 이해하고 있지 못할 때가 있었지 않은가? 그러니 배우자가 다 알지 못하고 있는 건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부부야 말로 ‘기브 앤 테이크(give and take)'의 법칙이 꼭 필요한 관계가 아닌가 싶다. 배우자를 위해 사랑을 베푼 만큼 되돌아오게 되어 있다

끝으로 결혼 13년 동안 그래도 우리 아이들이 ‘엄마아빠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구나’라고 믿게 만든 비법이라면 비법이고 노하우라면 노하우라 할 수 있는 방법은 공개한다.

건망증을 활용하기. 나는 건망증이 심하다. 그 심한 건망증이 인관관계로까지 이어져 특히 사람들에 결점이나 나쁜 점은 더 잘 잊어버린다. 그러한 까닭에 안 좋은 일이 있었던 동네 아줌마를 어쩌다가 만나더라도 먼저 다가가 반갑게 악수를 청하곤 한다. (물론 그 아줌마는 내 악수를 외면하고 획하고 뒤돌아서 가버렸지만.)

남편에게도 그대도 적용이 되어 싸울 일이 있어도 잊어버리고 서운한 점이 있어도 잊어버리고 뭐든 잊어버리는 게 되는 것이다. 부부싸움을 할 때 보통 여자들이 남편에게 과거를 들먹이며 그때는 어땠고 저때는 어땠고 하면서 몰아붙이지만 나는 싸울 때 별로 할 말이 없다. 모두 잊었기 때문이다. 반면 남편은 사소한 별것까지 다 기억하는 타입이라 늘 남편은 내게 할 말이 많다. (그 얘기를 들어보면 역시 내가 무심할 때가 참 많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나는 부부싸움을 하고 나서도 몇 시간만 지나면 그 사실조차 잊어버리기 때문에 남편을 보고 싱글 벙글 웃게 된다. 남편은 그런 나를 늘 철이 없다고 놀리지만 사실 내가 그러는 것은 철이 없어서가 아니라 정신이 없어서라는 사실을 남편은 모르나보다.

요즘 사람들은 모두 너무 똑똑한 것 같다. 똑똑한 것은 좋은 거지만 행복하게 사는 데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것 같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망각’이란 것을 더 해주셨는지도 모른다.

행복. 그것은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 내는 것이고 스스로 지켜 내는 것이다.

우리의 생각으로 의지로 때로는 건망증으로.

3살 때 앓은 소아마비로 인해서 장애인이 됐으며 초·중·고교 과정을 독학으로 검정고시에 합격했다. 96년도에 제1회 KBS 장애인가요제에서 은상을 수상하면서 노래를 시작하게 됐고 97년도에 옴니버스 음반을 발표하기도 했다. 2001년 ‘한국장애인고용촉진공단 작품현상공모’에서 장려상을, 2006년 우정사업본부 주최 ‘국민편지쓰기대회’ 일반부 금상을 수상하고 같은 해에 ‘2006 전국장애인근로자문화제’ 소설부분 가작에 당선되었다. 현재 CCM가수로도 활동 중이며 남녀 혼성 중창단 희망새의 리더로, 희망방송의 구성작가로도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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