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멘터리 ‘시민 샘’은 샘 설리번이 자신의 약점, 장애도 남김없이 까발리며 밴쿠버 시장에 당선되는 것을 보여준다. ⓒ시민 샘

지난 2월, 토리노 동계올림픽 폐회식. 대회 기간 내내 메인 스타디움을 장식했던 올림픽기가 토리노 시장의 손에서 국제올림픽 위원장에게로 건네집니다. 이제 깃발은 다음 개최지인 밴쿠버 시장에게 넘겨져야 합니다.

올림픽 위원장은 여유있게 오륜기를 펄럭입니다. 단상에는 이 모든 걸 전동휠체어에서 지켜보는 남자가 자리하고 있는데요. 그에게 다가간 위원장은 손 대신 전동휠체어의 깃대에 올림픽기를 꽂아줍니다. 관중들의 환호속에서 전동휠체어의 조이스틱을 움직여 남자는 단상 위를 빙글빙글 돕니다. 클로즈업 되는 금발머리 남자의 환한 미소. 그가 바로 세계에서 제일 살기 좋은 도시, 밴쿠버의 시장 샘 설리번입니다.

토리노 동계올림픽 폐회식에서 설리번은 차기 올림픽 개최지의 시장으로서의 역할을 훌륭히 완수했다. ⓒ연합뉴스

이 장면은 전세계에 위성중계되었는데요. 이후 세계 각국에서 수천통의 편지가 밴쿠버로 날아들었다고 합니다. 편지는 설리번 시장을 통해 살아갈 용기를 얻었다는 내용이 대부분이라죠.

설리번은 소개합니다. “편지 중에는 자신의 어려운 처지를 비관, 자살까지 하려고 했던 사람이 내가 임무를 수행하는 모습을 보고 마음을 바꿔 열심히 살기로 했다는 등 감동적인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화면에 살짝 잡힌 모습으로도 설리번의 장애는 꽤 심해보이는데요. 19세에 스키 사고로 전신마비 장애인이 되었고 우울증과 자살충동에 시달리는 암흑기를 보냈다고 합니다. 마침내 시장이 되었으니, 이로써 성공신화를 이룬 셈인데요. 쉽사리 이해되지 않는 점은 그가 ‘시민 샘(Citizen Sam, 2006)’이라는 다큐멘터리 영화에 출연했다는 점입니다. 그것도, 흠이 될 일은 꽁꽁 감춰야 할 2005년 시장 선거 중에 말이죠. 다큐멘터리는 사실의 기록, 카메라는 시장 선거전에 뛰어든 샘 설리번을 쫓아갑니다.

밴쿠버 시장 선거 67일 전, 영화는 여기서부터 시작합니다. 선거만큼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일도 없죠. 상대후보 짐 그린과 싸워야 하는 샘 설리번. 카메라는 꽤나 냉정하게 비추는데요. 장애인용 들것에 실려 목욕통속에 들어가 허우적대고, 벗은 몸으로 휠체어에서 침대로 비틀대며 엉덩이를 밀어 옮기는 설리번의 모습은 처절한 데가 있습니다.

이 영화를 본 누군가는 이렇게 말하더군요. ‘끔찍한 장애’라고요. 손발의 움직임이 자유롭지 않은 사람의 일거수 일투족이라니. 시장 후보자에겐 당연히 약점일 수밖에 없겠죠. 그조차도 감추지 않고 드러낸다? 간단치 않은 선택일텐데요. 그런데 설리번을 따라가노라면, 어쩌면 이런 솔직한 드러냄은 장애인들에게 세상과 어깨를 겨눌 21세기형 전략이 되지 않을까, 얼핏 그런 생각이 스칩니다.

루즈벨트 대통령은 생전에 휠체어에 앉은 모습을 거의 드러내지 않았다. 사진은 루즈벨트기념관에 자리한 동상. ⓒ오렌지

확실히 루즈벨트 대통령과는 달라도 많이 다르죠. 루즈벨트 대통령은 자신의 장애를 철저히 숨긴 사람이었습니다. 39세에 찾아온 소아마비로 휠체어를 사용하게 됐지만 대중 앞에선 그 모습을 보이길 꺼렸죠. 장애인이 된 후 찍은 3만 5천장의 사진 중, 휠체어가 등장한 것은 딱 3장뿐이란 사실이 단적인 증거인데요. 그도 그럴 것이 정치적 이유는 관두고라도 루즈벨트 자신이 언젠가 꼭 나을 것을 굳게 믿고 있었다는군요.

샘 설리번은 결국 이렇게 선거에서 승리해 밴쿠버 시장이 되었는데요. 전동휠체어에 앉아있는 자세조차 좀 불편해 보이는 그가 당선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보좌관을 헐레벌떡 뛰게 만들 정도로 전동휠체어를 빠르게 모는 활기, 유권자에게 호감을 주기 위해 치아 미백까지 서슴치 않는 치밀함, 장애인은 대개 진보적일 거라는 고정관념을 깬 보수적인 면모 등 복합적인 것이겠죠. 뭐 밴쿠버 시민의 수준 높은 시민의식도 넣을까요.

어쨌거나 이처럼 솔직한 드러내기의 다큐멘터리라면 언제든지 환영입니다. ‘장애를 극복한’ 어쩌구 하는 미사어구에 둘러싸이지 않은 인간적인 샘 설리번을 만날 수 있었으니까요. 매일 옷 입고 벗기에 눈물겨운 사투를 벌일지라도, 세계에서 제일 살기 좋은 도시를 만들기 위해 정책을 결정하고 조정하는 일에 전력을 다할 수도 있는 사람이 장애인이다. 이런 깨달음, 유쾌합니다.

*꼭 보고픈 영화는 벌써 막 내린 뒤더라. 그 얘기가 여기도 적용되네요. 지난 8월 30일 교육방송에서 딱 한 번 방영했고요. 그것도 밤 11시 30분에! 유투브에서 동영상 파일을 발견했어요. 원래 80분짜리 다큐인데 2분짜리 맛뵈기로 줄어들어서 이것 참. 이것만도 어디야, 고맙게 볼 분들만 클릭!

‘시민 샘’ 동영상 보기 http://www.youtube.com/watch?v=VCo4iSssnvM

[리플합시다]국제장애인권리협약의 비준을 촉구합니다

“장애인에게 제일의 경력은 장애 그 자체”라고 말하는 예다나씨는 22세에 ‘척추혈관기형’이라는 희귀질병으로 장애인이 됐다. 병을 얻은 후 7년 동안은 병원과 대체의학을 쫓아다니는 외엔 집에 칩거하는 세월을 보냈다. 그리고 8년간은 장애인복지관에서 일했다. 그 동안 목발을 짚다가 휠체어를 사용하게 되는 신체 변화를 겪으며 장애 경중에 따른 시각차를 체득했다. 장애인과 관련된 기사와 정보를 챙겨보는 것이 취미라면 취미. 열 손가락으로 컴퓨터 자판을 빠르게 치다가 현재는 양손 검지만을 이용한다. 작업의 속도에서는 퇴보이지만 생각의 틀을 확장시킨 면에선 이득이라고. 잃은 것이 있으면 얻은 것도 있다고 믿는 까닭. ‘백발마녀전’을 연재한 장애인계의 유명한 필객 김효진씨와는 동명이인이라서 부득이하게 필명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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