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서 본격적으로 장애인복지가 시작된 것은 1981년이다. 1976년 제 31차 유엔총회에서 1981년을 '세계 장애인의 해'로 정하고 '모든 국가는 장애인들의 사회적 참여가 여러 분야에서 충분히 이루어지고 다른 국민들과 동일한 기회와 동등한 대우를 받을 권리가 보장되며 신장되도록 최대한으로 노력할 것'을 각 회원국에 권고했기 때문이다.

유엔의 권고에 따라 우리나라에서도 1981년 장애인복지법이 제정되었지만 당시만 해도 장애인은 능력부족이라는 인식이 팽배했기에 장애인복지는 '장애인은 무엇무엇은 할 수 없다'로 시작하였다가 그 부당함을 외치는 장애인들의 목소리가 조금씩 높아지면서 하나씩 들어주는 이른바 동정과 시혜의 복지로 시작되었다.

박태윤씨. ⓒ이복남

그 중의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장애인 운전면허다. 처음부터 장애인은 운전은 할 수 없다고 제외시켰다. 그러나 자동차산업의 발달로 운전에 대한 욕구가 높아졌고 더구나 외국에서 국제면허를 따오는 장애인이 늘어나자 1983년 정부에서도 하는 수 없이 장애인면허를 허용하였는데 2종에 한한다고 못을 박았다.

장애인들은 그동안 금지되어 있던 것이 허용되니 2종이라도 감지덕지해야 했다. 산업화의 물결을 타고 자동차는 급속도로 불어났다. 장애인들의 차량소유도 상대적으로 늘어났지만 그 효용가치는 비장애인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혼자서는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어 바깥세상과 소통할 수 없었던 장애인들이 차량을 소유하면서 그야말로 살아있음을 확인하게 되었던 것이다.

너도나도 기를 쓰고 운전을 배웠고 어렵게 딴 면허증을 받아들고는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할 수 없다고 포기하고 좌절했던 것을 성취했을 때의 기쁨은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들은 모를 것이다. 장애인의 재활이 잃은 기능의 보조가 아니라 남은 기능의 활용이라면 운전은 가장 확실한 재활이었다. 그 재활을 확인하고자 장애인은 면허만 따면 무작정 차를 몰고 다녔다. '나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스스로에게 확인시키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말 타면 경마 잡히고 싶다했던가. 정말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지만 이제 운전만은 자신 있게 할 수 있는데 2종 면허가 족쇄가 될 줄이야. 한 달에 2만원(94년 당시 생활대상자 지원금)씩 지급되는 생계보조비에 매달려 할 수 있는 마지막 기능인 운전마저도 포기하란 말인가. 싫다 싫어 일 할 수 있는 기회를 달라 아무리 외쳐보아도 메아리조차 없었다. 하는 수 없이 하나 둘 차를 끌고 거리로 나서기 시작하였으니 이른바 '나가시'라고 하는 자가용 불법영업이었다.

장애인고용촉진공단이 생겼어도 장애인들에게 이렇다 할 직업대책을 세워주지 못하는 정부의 무능을 통감해서인지 경찰에서도 장애인 자가용영업은 눈감아 주었는데 아뿔싸. 1종 면허를 촉발하는 도화선이 터진 것이다. 1992년 4월 8일 밤 특수대의 일제단속에 장애인의 자가용영업이 적발되어 부산 동부경찰서로 연행이 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목구멍까지 차 오른 원망과 분노를 가까스로 억누르며 나가시로 연명을 해 오던 사람들이었다. 양하지마비 장애인 한사람이 동부경찰서에 도착해서는 옷을 홀딱 벗고 엉금엉금 기어서 동부경찰서 앞 8차선 도로에 들어 누웠다.

소식을 접한 장애인들은 동부경찰서로 하나 둘 모여들었는데 경찰에서도 불감당이라 자신들의 적발이 실수였노라는 그야말로 웃지 못 할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날 밤 동부경찰서 앞에서 홀딱 시위를 벌인 하상인은 1종 면허에 불을 붙여 놓고 그 결실을 보지도 못 한 채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이 자리를 빌려 다시 한 번 고인의 명복을 빈다.

4월 9일. 날이 밝자 울분에 찬 장애인들은 비속을 뚫고 부산지방경찰청으로 몰려갔다. '장애인의 생계대책을 세워 달라' '장애인에게 1종 면허를 허용하라' 비속에서 울부짖었으나 애꿎은 전경들만 안절부절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러나 그날 이 후 자가용영업으로 장애인이 적발되었다는 소식을 다시는 듣지 못했다.

“죽음이 아니면 자유를 달라” 자유라니 어떤 자유? 운전으로 돈벌이를 할 수 있는 직업선택의 자유 말이다. 장애인 1종 운전면허, 길고 긴 투쟁이 시작되었다. 목마름에 대한 갈증과 분노는 용광로처럼 타올랐다. 1994년 9월 1일 기다리고 기다리던 1종 면허가 허용되었지만 반쪽에 불과했다. 그동안 일선에서 죽기 살기로 싸웠던 용사들 즉 휠체어 장애인은 제외되었던 것이다. 다시 투쟁은 시작되었다. 그 여름의 땡볕아래서 부산역 서명 작업, 그리고 전국연대를 통한 길고 지루한 투쟁의 결과로 2000년 1월부터 양하지 장애인에게도 1종 면허가 허용되었다. 한국 장애인 역사에 한 획을 긋는 쾌거였다.

天下多忌諱 而民彌貧(천하다기휘 이민미빈) 노자 도덕경 제57장 '천하에 금하는 것이 많아지면 백성이 가난해 진다'는 것이다. 장애인에게도 1종 면허가 허용됨으로써 비로소 장애인도 택시운전을 할 수가 있었고 장애인 택시기사가 늘어나자 장애인이 운영하는 택시회사도 생길 수가 있었던 것이다. 박태윤씨 이야기는 [2]편의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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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웃이 행복하지 않는 한 나 또한 온전히 행복할 수 없으며 모두 함께 하는 마음이 없는 한 공동체의 건강한 발전은 기대하기 어렵다. 우리는 함께 살아가야 할 운명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아름답고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가진 자와 못 가진자,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평등하게 공유할 수 있는 열린사회를 건설해야 한다. 쓸모 없음을 쓸모 있음으로 가꾸어 함께 어우러져 나아갈 수 있도록 서로 사랑으로 용서하고 화합하여 사랑을 나눔으로 실천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복남 원장은 부산장애인총연합회 사무총장을 역임하였으며 현재 하늘사랑가족상담실을 운영하고 있다.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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